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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노이 민언냐 Aug 30. 2022

명언으로 명치 때리는 남편

자존감은 안녕하신지          일러스트 by하노이민언냐

남편 왈; 자존감이 높으면 가진 것보다 더 잘 되드라. 반대로 자존감이 낮으면 가진 것에 비해 더 안되고... 그래서 늘 자존감을 지켜보고 점검해야 해.


뭐.. 뭐야.. 이 남자! 왜 때문에 드라마에 나올 법한 주옥같은 대사가 네 입에서 나오냐 말이지. 자존감 수업은 물론 핫하다는 심리학 서적을 읽을 때, 아들의 게임 레벨 올린다고 폰 게임에 열심히 던 남편이 아니냐.

군중 속에서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기분이 들 때가 있다.

S; “한국에서는 손님 초대해서 먹는 저녁은 어때?”


하노이에서 살다 보니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여러 감정도 덤으로 따라온다. 문화 차이로 소외감이 들기도 하고 인종이 달라 기가 죽을 때도 있다. 하루는 프렌치, 유러피안 백인 친구들과 와인을 한 잔 하는 자리에 초대받았다. 낮은 테이블을 둘러싸고 바닥에 앉으며  베트남 사람이 된 거 같다며 웃는다. 자연스럽게 식습관이나 문화에 대해 이야기가 오갔다.  다들 웃지만 웃을 수 없는 농담들이 오갔고 알 수 없는 고유 명사들이 둥둥 떠다녔다. 호스트인 P는 이런 나를 위해 대화 속의 지명과 등장인물들을 설명해주기도 한다. 하지만 설명이 더해지면 열기는 식기 마련이지만 말이다. 사실 어디가 웃음 포인트가 도통 알 수 없었던 건 안 비밀! 이때 프랑스 남부 출신의 S는 내게 한국 식사 문화에 대해 질문을 한다. 갑작스러운 질문은 옳지 않다. ‘아.. 음.. 아.. 음’ 버벅거리다가 뜬금없이 그리스처럼 거하게 차려 먹는다는 말도 안 되는 비유를 들었다. 그리스 영화의 잔상이 남은 걸까..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그리스'에 쥐구멍에 숨고 싶었다. 2초 간의 정적은 기분 탓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P; "헤이, 민. 오늘 저녁에 와인이랑 푸아그라 어때?"

나; “푸아그라? 나는 많이 못 먹어. 너 요리하려고?”

P; “아니, 요리 안 할 거야. 많은 양도 아닌걸..”


푸아그라를 와인과 함께 내놓을 예정이라는 프렌치 P의 말에 라며 의아해했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푸아그라가 작은 캔에 든 스프레드 타입을 보자 놀란 토끼 눈이 되었다. 푸아그라 하면 동물학대의 온상이자 프랑스의 럭셔리 메인 요리가 아니었나. 실제로 쬐끔한 빵에 짭조름한 푸아그라 스프레드를 곁들여 먹는 걸보고 P와의 대화가 떠올라 부끄러움에 몸서리쳤다. 모르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닌데 말이지. 달콤한 불고기 특제 소스를 아는 건 오직 나 한 사람이라고 자부심을 느끼지 못한 나는 유죄일까.


“많이 내성적이라 모임에 안 나오시는 줄 알았는데, 직접 뵈니 밝으시네요!”


하지만 다국적 환경에서만 해당하는 것도 아니다. 한국 커뮤니티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실없는 농담도 잘하고 대화에 잘 섞이지만 알고 보면 뼛속까지 내향적인 1인이다. 성격 검사도 열 번하면 열 번 다 ‘I’로 시작하니 말이다. 각종 모임에서 이름만 올라간 유령인 셈이다. 프로 불참러인 나는 얼마 전 학교 행사에 갔다가 이런 말도 들었다. 자주 빠지셔서 부끄러움을 많이 타나 했다고 말이다. 음.. 부끄러운 것도 맞지만 세상 뒤집어지게 얼굴 빨개지고 묵언 수행할 정도 아니다. 어쩌면 14년 영어 강사, 민언냐로 산 덕분에 긴장감이 덜해졌는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대화를 주도하기보다는 추임새를 치고 들어주는 게 오히려 편하다. 주인공보다는 감초, 나물에서 빠지면 허전한 깨소금이라고나 할까. 그렇다고 “응, 응.”만 하고 끄덕이는 온순한 성격은 아니다. 조용히 매운맛이다. 특히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자신이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이다. 분기 별로 마음속에 작은 구멍이 뽕뽕 뚫리고 그 사이로 어두운 그림자가 비집고 들어온다. 특히 내 안에 생각과 에너지를 과잉 주입할 때가 그렇다. 너무 많이 쑤셔 넣다가 퍽 하고 김밥 옆구리가 터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럼 웃고 넘길 말에도 주책없이 발끈하게 된다. 그때, 바이오리듬 업다운의 편차가 제로에 가까운 남편은 말한다. 자존감을 점검해보라고! 그렇다. 평소에는 재치 있게 받아칠 수 있는 말도 여유가 없으면 씩씩 대고 발톱을 드러내는 나! 그리고 거기에 긁히는 건 바로 ‘나님’이란 게 함정이고 말이다. 남몰래 발을 동동 구르며 아파하는 것도 당연히 내 몫이다.


그때마다 남편은 '우쭈쭈'의 달콤한 위안보다는 조용히 듣고 있다가 시크한 명언을 툭하고 던진다. 그래, 이제 한 방 먹을 때가 되긴 했어. 그동안 너무 잠잠했지. 이번에도 ‘자존감’이라는 예리한 단어로 명치를 가격하는 '토르' 남편! 후려 맞은 나는 두 눈 번쩍! 정신 바짝! 티셔츠 다섯 장을 사줘도 늘 제일 위에 놓인 세탁된 녀석만 입는 무지렁이가 다가 아니었다. 새로 산 지 1달 하고도 3주가 지나서야 빛을 본 새 티셔츠를 입고 사진을 찍던 그는 이번에도 촌철살인으로 후드득 바스러지기 직전인 정신줄을 다시 단단하게 한다. 사랑도 티셔츠도 한 놈만 팬다는 그는 알고 보면 뇌섹남! 뜯어보면 매력남! 백만 년 만의 둘만의 주말 브런치에서 다시 한번 나를 일으킨 건 남편이다. 이거 앞뒤가 달라도 너무 다른 반전남이다. 깊이를 모를 그의 매력에 나는 또 한 번 빠져든다. 너를 하노이 ‘토르 남편’으로 명한다.

피. 에스. 하나. 그래, 문제의 근원은 외부보다 내부에 있을 때가 더 많다. 자존감은 안녕한지, 나부터 찬찬히 지켜볼 일이다.


피. 에스. . 푸아그라 스프레드를 검색해보니 나만 몰랐던 거? 한국에서 구할 수 있고 꽤 많은 사람들이 즐기고 있다. 요리에 문외한인 민언냐는 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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