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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잽잽 Apr 24. 2023

아들은 왜 넘어져야 하는가

아들을 키우는 아빠가 되는 법-1

  나는 양육 전문가가 아니다. 이제 7살이 된 아들이 다른 아이들에 비해 대단히 뛰어난 무언가가 있다고 믿지도 않는다. 설사 빛나는 무언가가 보인다 하더라도, 그것이 지난 7년의 양육의 결과물인지 아니면 그저 DNA에 각인돼있던 기질이 드러나는 것인지 나로서는 알 도리가 없다.


  그럼에도 아들을 키우는 이야기를 글로 써야겠다는 마음을 먹은 이유는 두 가지다. 


  우선 지난 만 6년의 시간동안 내가 유일하게 꾸준하게 해온 일은 아들 육아였다. 직장에서의 일은 잘 될때도 안 될때도, 열심히 할 때도 도망칠 때도 있었지만 아들을 키우는 일은 잘되든 안되든 도망칠 수 없는 그런 종류의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또 하나는 아들을 키우는 정보를 공유하기가 참 힘들었다는 점이다. 특히, 대부분의 가정에서 주양육자가 엄마이기에 아들을 키우는 아빠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하는지 - 그 선배들의 기록을 찾아보기란 참 어렵다. 물론 가장 가까운 선배라면 나의 친 아버지겠지만, 글쎄 그 육아책을 펼쳐드는 데는 조금 위험이 따른달까...


  아이를 키우는 비법이 따로 있어서 그걸 공부해 적용시키는 일이 육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 식으로 될 일이었으면 AI까지 나온 마당에 수천 년 누적되어온 인류의 문명사가 이미 모든 육아문제는 해결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표준화된 아이들이 어른으로 자라고 input과 output의 법칙으로 우리 세상은 굴러갔을 테니까. 신생아를 재우는 로봇 하나 나타나지 않은 걸 보면,(나는 바운서의 효과를 전혀 누리지 못한 경우다.) 우리는 아직도 그 작은 존재에 대해 아는 게 그리 많지 않다.


아이가 아니라 나를 돌보는 일, 육아


  다만 육아를 고민하는 일은 그저 양육자인 본인을 되돌아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일방향적인 소통이 대부분인 양육관계에서, 조그마한 저쪽이 어떤 말과 태도를 취할지를 우리가 결정할 순 없지만 그래도 좀 더 큰 이쪽에서 어떤 마음으로 이 시간을 보내야 할지 정도는 충분히 개별적으로 고민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아들을 7살까지 키워오면서 본의 아니게 세우고 지킨 원칙이 있다. 나는 절대로 아들이 넘어지는 걸 부러 막지 않는다. 넘어졌다고 해서 뛰어가 일으켜주지 않는다. 물론 높은 곳에서 떨어질 것 같거나 돌부리에 무릎이 치일 것 같을 때, 횡단보도를 건널 때도 어미 호랑이처럼 가만히 내버려둔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놀이터에 엄마와 함께 온 다른 아이들을 보면 깨닫는다. 내가 유독 아들이 넘어지는 걸 내버려두는구나- 하고.


  물론 나는 남자이기에, 내가 자라온 시간에 빗대어 아들의 성장을 바라본다. 이런 것도 꼰대의 '라떼'인진 모르겠으나, 내가 어릴 때는 놀이터 정글짐 위를 날아다니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손으로 잡고 건너게 돼있는 곳 위에 발로 올라서서 그 당시 체감으론 꽤 빠른 속도로 뛰어다녔다. 요즘 놀이터는 모래도 아니고 예전처럼 놀이터에 아이들만 우르르 몰려있는 것도 아니니 사정이 좀 다르긴 하다. 많은 게 변한 건 사실이다.


넘어져야 재밌다


  하지만 태어날 때부터 몸으로 호기심을 해결하는 아들들 - 물론 개인차가 있겠지만, 이런 기질적 경향은 여러 논문에서도 이미 입증된 것이며 모두가 경험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니 정치적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 은 몸에 자극이 와야 세상을 느낀다. 그 자극을 막으면, 다른 무엇보다 아이들은 그 상황을 재미없다고 느낀다. 아들들은 재미없는 상황을 곧 스트레스라고 받아들이는 것 같다. (재미없어=기분 나빠가 되는 건 언어체계가 잡히는 6살 즈음 증명되었다..)


  처음 아들을 놀이터에 데려갔을 때, 미끄럼틀을 거꾸로 올라가다가 넘어진 적이 있다. 물론 다른 친구들이 있으면 그렇게 올라가선 안된다고 말해주었겠지만, 혼자서 아둥바둥하는 모습이 귀여워 가만히 놔둬본 적이 있다. 아들은 아빠를 찾지도 울지도 않고 다시 일어나 미끄러운 바닥을 통통한 사지로 지탱해 다시 밀고 나갔다. 어떤 부모의 눈에는 거대한 골절상이나 찰과상으로 이어질 일일지 몰라도, 번쩍거리는 미끄럼틀을 마주하고 숨가쁘게 쌕쌕대는 아이의 세계에서는 지금 한바탕 전투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미끄러질 것이냐 버텨낼 것이냐. 그 순간은 분명 세계의 사활을 건 전투다. 아들들은 전투에서만 재미를 느낀다.


  그렇게 몇 번을 시도해 겨우 성공한 아들이 해발 1m에서 보인 환한 미소는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한 번 넘어질 지언정 자신이 하고 싶었던 동작을 해내고 목표했던 지점까지의 도전을 반복하는 데 아들은 재미와 효능감을 느끼고 있었다.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길러주는 일


  많은 엄마들은 '내려와' '하지마' '위험해'를 입에 달고 산다. 물론 그 심정을 이해 못하는 게 아니며 육아 동지로서 그 노고 역시 모르는 바가 아니다. 하지만 자기 몸으로 넘어지고 자기 힘으로 일어나는 일을 배워야 할 때가 있다면 분명 유아기일 것이다. 특히 남자 아이들은 그때 그 기억으로 점점 더 몸으로 많은 것들을 해나가고 동시에 통제력을 길러 나가는 것 같다. 


  물론 내가 남자이고 각종 운동을 좋아하는 아빠라서 아들과 몸으로 놀기에 더 편했던 건 사실이다. 지금도 아내는 자신이 주양육자였으면 아들을 어떻게 키웠을까 싶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7살이 된 아들은 지금 축구, 수영, 농구, 야구 구기종목을 돌아가며 공처럼 데굴데굴 온 힘을 다해 구른다. 5살이나 6살부터 운동 학원을 다닐 수 있기에 그때부터 하나씩 보내기 시작했더니 일주일은 그냥 그렇게 흘러간다.


  그렇다고 활동적인 아들이 집에서 괜히 소파 위를 뛰어다니거나 쿵쿵대며 난장을 부리지는 않는다. 스스로의 몸이 가진 힘을 잘 알고 있고 우리는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 자주 나눈다. 멋진 축구선수가 왜 집에서는 뛰어다니지 않는지, 힘이 세졌지만 왜 유리문을 혼자 열어선 안되는지, 나는 아들이 스스로의 몸이 가진 감각을 느끼고 있기에 그것에 대한 통제도 기꺼이 이해한다고 믿는다.


  세상 모든 일은 가능한 범위 안에서만 가능하다. 나는 내가 가능한 조건 아래에서는, 아들이 몸으로 마음껏 모든 걸 부딪히며 크기를 원한다. 그 안에 규칙이나 기술이 필요하다면 (근본없이 이것저것 해온 아빠보다는 좀 나을 수 있도록) 배워가며 더 잘 즐길 수 있길 염원한다. 언젠가 어른이 되고 세상에 자신이 책임질 일이 많아질 그때가 되어도, 사실 몸으로 즐길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은 크게 넘어져도 곧 또 일어난다고 믿으니 말이다. 그러지 못해 쓰러지고 지쳐있고 누워있던 날이 많았던 나를 돌아보며, 오늘도 아들의 축구교실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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