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선을 긋는 기술

경계를 배우고, 마음을 키우다

by Go on

계약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가끔 이상한 손님들 때문에 마음 쓰이는 일은 있었지만

이 정도면 견딜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날은 34도까지 오른 푹푹 찌는 날이었다.

땀에 절은 아주머니가 부동산으로 들어왔다.

며칠 전, 아들 명의 집의 전세계약을 했던 할머니였다.

즉, 아주머니는 10여 년 전 아들 앞으로 집을 사줬고

매번 전세계약을 할 때마다

바쁜 아들을 대신해 위임을 받아

전세계약을 한다고 했다.


전세 계약을 할 때

방문을 페인트 칠해주는 조건이 있었다.

특약에 명시해 놨기에 꼭 지켜야 하는 약속이었다.

집이 비어 있는 상태라

자신이 사포질을 하고 페인트칠을 할 거라고

땀을 줄줄 흘리며 말했다.


"네? 사모님이요?"

"빼빠를 미느라 내가 아주 죽어."

'빼빠?' 처음 듣는 말이었다. 사포를 뜻하는 속칭이라고 했다.


사람을 쓰던가 에어컨이라도 켜시라고 했더니,

돈 아까워서 그런 '짓'을 어떻게 하냐고 했다.

"페인트도 내가 종로에 가서 직접 골랐어. 오후에 부동산으로 배달될 거니까 그것 좀 갖고 올라와. 세 통 될 거야"


네...?

주연은 다급하게,

"사모님. 페인트를 집으로 배달시키시면 되지 않을까요? 전 사무실 못 비워요."


그 단지는 가파른 오르막길이었다.

아니, 무엇보다도 본인이 그 집에서 사포질 하면서 있을 건데

왜 부동산으로 배달하게 해서
주연에게 심부름을 시키는 건지

도저히 이해가 안 갔다.


"그게 그렇게 싫어?"

아주머니는 갑자기 독기 어린 눈으로 주연을 쳐다봤다.

"내가 부동산으로 시킬 수도 있고! 집으로도 시킬 수 있고!

페인트 오면 그냥 갖고 올라오면 되지. 뭐가 힘들다고 난리야 난리는."


주연은 어이가 없었다.

이건 오해도 아니고 그냥 억지였다. 이해를 구할 수 없는 사람 앞에서는 어떤 논리도 소용이 없었다.

손님 집 보여주러 나가면 부동산에 사람이 없게 되고,

혹시 그 사이에 누가 페인트라도 가져갈 수 있다고

차분히 설명했더니,

"관둬!! 싫으면 관둬!! 거 별거 아닌 거 갖고 떠드네 거.

아니 사람 좋게 봤는데 아주 그냥 계약할 때만 살살거렸네??"


너무 모욕적이었다.

정말 별 거 아닌 거 갖고 이렇게 설명을 해야 하나.

그리고 이런 개떡 같은 소리를 들어야 하나.

격분한 아주머니는 자기 할 말만 쏟아내고 나가버렸다.

얼이 빠진 주연은 멍하니 창문을 봤다.


저렇게 억지를 피는 사람들에게 굳이 설명하지 말라던 대표의 말이 떠올랐다.

'친절하되 말을 많이 섞지 말고 만만하게 보이지 말아라.'


그러던 중 페인트가 배달되었고

곧이어 들어온 대표는,

주연에게 자초지종을 듣고는 그냥 놔두라고 했다.


다행이었다.

대표가 만약 주연에게 얼른 페인트를 갖다주고 오라고 하면

주연은 꼼짝없이 해야 할 지경이었다.


"공인중개사는 중개를 잘해야 되잖아.

그런데 부동산이 너무 많다 보니까

사람들이 이거 해달라 저거 해달라 하거든.

중개 범위를 넘어설 때는 우리가 판단해야 해."


대표는 커피 한 모금을 마시며 말을 이어갔다.

"물론 가끔은 빈 집 청소해야 할 때도 있어. 집을 빨리 계약시키려면 말이야.

그런데 그 조건은, 주인이 우리한테 부탁해야 해. 그래도 할까 말까인데 말이야.

아까 그 아줌마처럼 우리를 그렇게 하대하는 사람 얘기는 절대 들어주지 마."


대표가 차분하게 설명하는 동안, 주연의 머릿속에는 하나의 문장이 맴돌았다.


"친절하되, 만만해 보이지 말 것."

처음에는 그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부동산에 찾아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평범한 이웃들일 거라고 생각했다.


주연의 첫 손님이었던 전주 아주머니는 좋은 말로 위로까지 해줬었다.

하지만, 그 후 여러 손님들을 겪으면서

단순한 호의만으로는 상대할 수 없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걸 알았다.


"선을 정확하게 그어야, 이 일 오래 한다."

대표는 그 말을 하고 페인트 아주머니한테 전화를 했다.

"사모님. 페인트가 왔네요? 이거 언제 가져가실 거예요?

지금 우리 손님 집 보여주러 나가야 해서요."

페인트 아주머니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바로 오겠다는 말을 했다.

주연은, 대표의 저 말투. 예외란 있을 수 없다는 듯한 말투.

그걸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며칠 뒤, 한 중년 남자가 들어왔다.

"저... 부탁이 하나 있는데요."

어떤 일이냐고 묻자,

등기를 떼어달라고 했다.


등기 한 건 열람하는데 700원.

달라고 하기도 애매한 금액이었다.

그런데 그 남자는

무려 여섯 건의 등기를 열람해서 복사해 달라고 했다.

일단, 누구나 집에서 인터넷 등기소에 접속하면

700원을 내고 등기를 뗄 수 있다.

하지만, 컴퓨터를 다루는 게 서툰 어르신들과

부동산에서만 등기를 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주연은 남자가 민망하지 않게 웃으며 말했다.

"아 이거는 저희가 좀 곤란하고요. 여섯 건 까지는 해드릴 수가 없어요. 건당 700원이라서요.

정말 필요하신 한 건 정도는 저희가 해드리겠습니다."


"돈내야 하는 거였나요? 몰랐네요. 죄송합니다. 그럼 이것만 부탁드릴게요."


이런 거였나.

친절하되 선을 그어서 만만하게 보이지 않게 하는 것.

예전 같았으면 여섯 건 다 떼어줬을지도 모른다. 그런 친절을 베풀면 손님은 꼭 다시 올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런 부탁을 하는 손님들치고 다시 부동산을 찾은 손님은 없었다.


이제 내공을 쌓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어이없다고 욕만 하고 있을 게 아니라,

분명한 선을 그으며, 지켜야 할 것들을 지킬 줄 알아야 했다.

아직 갈 길이 멀었지만,

주연은 조금씩, 이 일을 오래 버틸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자신의 선을 긋는 법을 배우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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