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심심한데 집이나 보러 갈까?

계약은 부담, 보는 건 공짜

by Go on

"집 보러 왔는데요?"


벤티 사이즈의 아메리카노를 들고 나타난 손님은

예약도 없이 "집 좀 보여주세요."라고 말했다.

그 순간부터 스무고개가 시작됐다.

매매인가요? 전세인가요? 월세인가요?
예산은요? 입주 날짜는 언제쯤이죠?


매매든 뭐든 상관없이 아무 집이나 보여달라고 할 때,
주연은 그런 손님들에게 가능한 한 집을 보여주지 않았다.
누가 봐도 단순한 '구경'이었다.
계약할 생각도 없이 남의 집에 들어가서는 사진만 찍어 가는 경우가 허다했다.

무엇보다도, 집을 보여주는 건 단순한 안내가 아니었다.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수고와 배려가 필요했다.
쓸데없는 시간 낭비를 막기 위해, 중간에서 선을 그을 때도 있었다.

처음에 주연은, 들어오는 모든 손님에게 열과 성의를 다해 집을 보여줬었다.

그들은 마치 곧 계약할 사람처럼 이것저것 물었고,

주연은 그 기대에 보답하려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기 시작했다.


며칠 전, 출근하자마자 걸려온 한 통의 전화가 그 시작이었다.

손님은 오전 중으로 부동산을 방문해서 집을 보겠다며 예약을 부탁했고,

통화를 마치고 수화기를 내려놓으려던 순간,

주연은 듣지 말았어야 할 말을 듣고 말았다.


"여보! 정민이 아파트 구경 가자!"


정민이 아파트...? 이게 무슨 소리지?

주연은 대표에게 물었고,

돌아온 답은 귀를 의심케 했다.

"친구가 여기에 집 샀나 보네. 그런 사람들 많아.

그냥 친구한테 물어보면 될 걸, 괜히 부동산까지 와서 알아보는 거야.

속이 뒤틀렸나 보지.

연예인이 어디 집 샀다고 하면, 사람들이 그 단지 구경 간다잖아.

손님인 척하고, 똑같은 구조 보여달라고 하고..."


좀 전에 예약한 손님이 도착했고,

단지를 설렁설렁 둘러보더니 남편에게 조용하게 한 마디 뱉었다.

"별 것도 아닌 곳에 집사고 더럽게 잘난 척하네."

'정민이' 욕을 하는 듯했다.


손님을 보내고 부동산으로 들어온 주연의 뒤로,

옆 부동산 사장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여기도 혹시 머리 벗겨지고 갈색 양복 입은 남자 들어왔었어요?"

옆 부동산 사장은 매우 격앙되어 있었다.

"아니, 내가 진짜 어이가 없어서... 웬 남자가 들어오더니 XX빌라 좀 보여달래.

자기가 매매로 보고 있다는 거야.

근데 거기가 너무 멀잖아. 좀 이상하다 하면서도 그쪽 부동산에 전화해서 차로 데려갔다?

15분 넘게 가잖아 거기.

꾸역꾸역 갔는데, 매매로 본다는 인간이 집을 휘리릭 보더니 그냥 나오는 거야.

그래서 어떠셨냐고 물어보니까,

잘 본 거 같다면서 생각해 보겠다고 나보고 먼저 가래.

내가 차를 돌려서 나오는데, 그 인간이 자기 친구한테 전화하는 소리가 들리는 거야.

야, 부동산 차 타고 여기 왔다. 몇 호냐? 이러더라고?

지하철역에서 내려서 택시 타기 싫다고, 집 보는 척을 한 거야.

아, 내가 진짜 너무 황당해서..."


와...

너무나 창의적이었다.

이제는 집 구경을 떠나서

공짜 택시 업무까지 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대체 어디서 이런 아이디어를 얻는 걸까.


그날 이후, 주연은 본능적으로 진짜 손님과 가짜 손님을 구분하기 시작했다.

구경 손님들은 처음에는 그럴듯한 질문을 던지지만,

대표와 주연이 구체적인 내용을 물어보면

슬쩍 시선을 피하거나, 대답이 엇나가곤 했다.


부동산은 다른 직업과 달리

전시된 물건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예약을 잡고 시간에 맞춰

목적지를 일일이 방문하여 설명하는 곳이다.

그런데 그 예약이 또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한 건의 예약에 얽혀있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다.

특히, 물건지가 다른 부동산일 경우엔

주연의 손님이 시간 약속을 지키지 않거나,

누가 봐도 구경꾼 티를 낼 때에는

주연은 난처해질 수밖에 없었다.


부동산에게 주말과 공휴일은

언제나 구경꾼들로 가득한 전쟁 같은 날이었다.

토요일 하루에 예약된 집만 해도 10건이 넘었다.

점심 먹을 틈도 없이, 같은 집을 여러 번 보기도 하고

주변 입지조건과 집 상태에 대한 설명을 무한 반복했다.

매매, 전세, 월세 손님들은 이 부동산 저 부동산을 돌아다니며 예약을 잡았고,

대표와 주연은 손님이 겹치는 시간마다

사무실을 비워두고 집을 보여주러 나가야 했다.

집을 보여주는 시간은 보통 한 손님당 30분에서 1시간,

어떤 손님은 두 시간 가까이 걸리기도 했다.

아침식사 후 오후 5시까지 아무것도 먹지 못한 주연은

그 사이 또 들어온 구경 손님을 상대했다.

어린 티가 나는 20대 남녀는 아예 대놓고,

"집 구경 하러 왔어요."

주연은 본인도 모르게 목소리가 차분해졌다.

"저희는 구경은 못 시켜드리고요, 계약의사가 있으신 분만 집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집을 보고 계약 안 하실 수 있죠.
보면 꼭 계약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구경 목적은 못 보여드린다는 뜻이니까 오해 마세요."

여자는 아무 생각 없다는 듯,

대답도 없이 획 돌아서 나가버렸다.


손님들의 80프로 이상은

그렇게 집보고 가서

문자에 답장을 안 하거나, 전화를 받지 않았다.

처음엔 주연이 뭘 잘못했나 고민했지만,

알고 보니 모든 부동산이 겪는 일이었다.

하루에 4킬로미터 이상을 걸어 다니며

구경 손님들을 상대한 적도 있었다.

그래도 혹시나, 계약 의사가 있는 손님일지도 모른다는

작은 희망으로 끝까지 웃으며 설명했다.


한참을 걸어 다니며 설명해주고 나면
온몸이 뻐근하고 피곤했다.
하지만 속이 썩어도,
주연은 늘 환하게 웃으며 손님을 보냈다.

"수고하셨습니다. 연락 주세요."

계약이 되지 않더라도,
그 마지막 친절함이 다음 손님을 불러올 거라고 믿었다.

주연은 그렇게, 하루를 보내곤 했다.


1년에 한두 번 매매 바람이 불 때를 제외하면,

부동산 일의 대부분은 구경꾼들에게 집을 보여주는 일의 반복이었다.

"그렇게 보여주다 보면 누군가 계약하지 않아요?"

누군가 물어보면, 주연은 고개를 저었다.

구경꾼들의 목적은 아예 달라서

그들의 임장이 계약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아니, 정말 없다.

주연은 문득 궁금해졌다.


'저들은 구경하고 노트에 적고 사진 찍은 걸로 뭘 할까...?'


그리고 그 의문은 곧 풀렸다.

그것도 예상치 못한 곳에서.




이미지 제작 : ChatGPT



#부동산 #임장 #집구경 #현장실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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