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잘못은 당신이, 사과는 내가

배운 척, 배우지 못한 사람들

by Go on

그날은 매매 잔금이 있었다.

옆 부동산이 물건지 즉, 주인쪽이었고

주연의 부동산은 손님을 맞춘 계약의 잔금이었다.


주연의 손님은 양재동에 거주하는 78세의 친절한 할머니.

소싯적 국민학교 교사였다는 할머니는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지만, 귀가 어두우시고 이해도가 많이 떨어져

계약을 진행할 때 상당히 힘들었던 분이었다.

드디어 잔금일.

할머니는, 매수한 아파트가 있는 분당으로

이삿짐을 먼저 보냈고

양재동에서 잔금을 정산한 후 출발하겠다고 했다.


잔금 1주일 전부터

주연은, 매수인인 할머니를 위하여

전화로, 문자로, 메모로,

매매계약서와 신분증, 주민등록등본 1통, 도장등

잔금시 필요한 서류를 계속 알려드렸다.

또 할머니가 집을 매도하고 오는 거라,

양재동에서 필요한 매도용 서류도 모두 안내해드렸다.


그 시각, 분당 아파트의 매도인은 이미 옆 부동산에 도착해 있었다.

짐도 다 빼놓았고, 할머니만 오면 잔금만 남은 상태였다.


그때가 대략 1시 경이었다.

할머니의 이삿짐 차는 이미 도착해있었고,

그녀만 오면 모든 것이 끝나는 상황.


주연은 할머니가 어디쯤 오시는 지 궁금하여 전화를 했다.

"응. 이미 출발했지. 30분 후면 도착해."


주연은 매도인측 부동산에 사정을 얘기하고 양해를 구했다.

하지만 30분이 지나도, 할머니는 오지 않았다.

그리고 전화도 받지 않았다.


그 순간부터 상황은 꼬였다.

매도인은 빨리 잔금받아서

본인이 매수한 동탄 집으로 가야 했고,

동탄 쪽 부동산으로부터

언제 출발하는 지를 묻는 전화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물고 물리는 상황.

누군가가 지연되면, 줄줄이 다 틀어지게 된다.

그때 울리는 벨소리, 할머니였다.

"네 사모님 어디세요?"

주연은 다급하게 물었다.

"응...내가 아직 양재인데, 내가 여기서 집을 팔고 가야하잖아.

그런데 내가 이삿짐차에 등기권리증이랑 인감증명서...또 인감도장을 넣었나봐."


와...

주연은 눈앞이 깜깜해졌다.

스피커폰으로 같이 듣던 대표의 얼굴이 하얘졌다.

늘 침착했던 대표조차 당황했다.

할머니는 매도용 서류를 이삿짐에 넣은 것이고,

그것때문에 양재부동산에서 잔금 진행을 못하고 있었다.

이 날벼락같은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아무생각이 안났다.


"그럼 아직 양재에서 잔금을 못치르신거에요?"

"응...그런거지. 우리 딸이 떠났으니까, 걔 도착하면 같이 좀 찾아줘봐."


대박...

일단 옆 부동산에 와있는 매도인을 진정시켜야했다.

대표와 주연은 옆 부동산에게 상황을 설명하며

연신 미안하다고 했다.


약 30분후, 주연은 할머니의 딸을 만났고, 같이 이삿짐 차로 달려갔다.

아저씨들이 '안방'이라고 써있는 박스들을 찾기위해

모든 짐들을 바닥에 내렸다.

30도를 웃도는 날씨에 땀은 비처럼 흘렀고,

결국 필요한 서류가 담긴 파일을 찾았다.


시간은 3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딸은 파일을 들고 다시 양재로 향했다.

주연은 땀에 젖은 채 부동산으로 돌아왔고, 상가 복도엔 매도인의 고성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대표 또한 매도인을 달래고 있었으나,

달래질 일이 아니었다.


'왜 우리는 우리가 잘못하지도 않은 일에, 항상 미안하다고 해야 할까...'

주연은 황망하고 서글퍼졌다.


이삿짐업체 아저씨들도 짐을 올리지 못하고 기다려야했다.

수건을 목에 두르고 땀을 훔치며,
아파트 현관 계단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잔금이 끝나지 않으면 매도인의 허락없이는 짐을 들일 수 없다는 걸 잘 알기에,

그저 말없이 시간만 흘려보내고 있었다.

주연은 자신의 잘못은 아니지만, 괜히 자신이 죄인이라도 된 듯 미안했다.

박카스를 건네며 부동산에 들어와 잠시 더위를 식히라고 했지만,

그들은 빨리 짐이 들어갈 수 있게만 해달라고 독촉했다.


4시가 다 되어 도착한 할머니와 딸.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태연히 앉았고, 매도인은 벙찐 표정으로 할머니를 바라봤다.

3시간 넘게 기다린 법무사 사무장도 말이 없었다.


잔금은 속전속결로 마무리되었고,

매도인은 분을 참지 못하고 의자를 차고 나갔다.

할머니는 이삿짐 올려야 한다며 아무 일 없다는 듯 나섰다.

함께 온 딸도, 한마디 사과 없이 조용히 따라 나섰다.


주연은 어이가 없었다.

집을 보여줬을 때 한없이 자애롭고 예의바르던 할머니는

온데간데 없었다.

지킬 앤 하이드도 아니고,

사람이 이렇게까지 달라질 수 있을까.

원래 그런 사람이었던 걸까.

자신이 불리해지는 순간

모른 척하고 돌아서는 염치없는 사람이었던 걸까.


'나도 늙으면 저렇게 되려나...

미안하다는 말이 그렇게 어려운 걸까.'


어떤게 진짜 모습인지 모르겠다.

자신도 저렇게 나이들고 싶다며

대표에게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던 사람은

바로 주연 자신이었다.

그 사실이 떠올라 더 짜증이 났다.


모든 일이 마무리된 후,

대표는 담담하게 말했다.

"부동산을 하다보면 직업에 대한 선입견이 없어져.

손님이 의사든, 교사든, 사업을 하든 뭐든 간에 다 필요없고,

여기는 큰 돈이 거래되니까 민낯이 나와. 진짜 인성이 튀어 나와."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아무리 예의 바른척 해도, 결국은 드러나는 게 그 사람의 본모습이었다.


배운 사람은 예의 바를 거라는 생각.

그 생각을 버려야 할 첫 날이었다.

그리고 주연은, 자신이 믿는 믿음을 돌아보게 됐다.




이미지 제작 : ChatG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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