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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묵은 일기장의 데자뷔: 나와의 약속, 슬픈 연대기

홀로 남았을 때 나를 지켜줄 존재

by 영보이 삼

오랜 시간 띄엄띄엄, 그러나 꾸준히 일기를 써온 사람입니다. 최근 낡은 물건과 책들을 정리하다 우연히 과거의 기록들이 담긴 공책들을 발견했습니다. 마치 타임캡슐을 발견한 듯, 잊고 지냈던 시간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흩어져 있던 일기 조각들을 모아보니 꽤나 묵직한 두께를 자랑했습니다. 호기심과 약간의 망설임을 뒤로하고, 마치 퍼즐을 맞추듯 낡은 페이지들을 하나씩 읽어 내려갔습니다. 그 시절의 서툴고 순수했던 감정들이 생생하게 느껴져 얼굴이 붉어지기도 하고, '내가 이런 생각을 했었나?' 싶을 정도로 낯선 단상들을 발견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감동도 잠시, 페이지를 넘길수록 묘한 기시감이 느껴졌습니다. 마치 데자뷔처럼, 시간만 흘렀을 뿐 일기의 내용은 놀랍도록 닮아 있었던 것입니다. 어린 시절엔 "내일부터는 반드시 공부를 열심히 해야지!"라고 다짐했고, 사회 초년생 시절엔 "이번 주부터 칼퇴근하고 자기 계발에 힘써야지!"라고 외쳤습니다. 시험 스트레스는 "이번 분기 목표를 반드시 달성하리라!"라는 결연한 의지로 포장되었을 뿐, 본질은 다르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책 좀 읽자", "영어 공부 시작!"과 같은 다짐들은 연례행사처럼 등장했다가 감쪽같이 사라지곤 했습니다.

돌이켜보면, 과거에도 자존심 상하는 일에 밤잠을 설쳤고, 현재 역시 무너진 자존감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씁쓸한 데자뷔 같은 인생입니다.

제 일기장의 클리셰는 다음과 같습니다.

사건 발생: "오늘 선생님께 혼났다... (분노)" 혹은 "이번 프로젝트는 실패로 돌아갔다... (좌절)"

감정 토로: "너무나 속상하다! 나의 능력은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 걸까."

반성 및 다짐: "다시는 이렇게 살지 않겠다! 내일부터/다음부터는 반드시 달라질 것이다!"

구체적인 계획 (현실과는 동떨어진 이상적인): "매일 2시간씩 공부하고, 주 3회 운동을 하고, 잠들기 전 30분은 꼭 책을 읽어야지!"

문제는 그토록 굳건했던 약속들이 어째서 이토록 힘없이 무너졌느냐는 것입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저는 '나 자신과의 약속'을 너무나 가볍게 여겼던 것 같습니다. 마치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어', 혹은 '힘들면 안 해도 괜찮아'라는 면죄부를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발급했던 것입니다.

혼자만의 약속은 친구의 "오늘 피맥 어때?"라는 달콤한 유혹에 눈 녹듯 사라졌고, 동료의 "퇴근하고 한잔할까?"라는 제안에는 빛의 속도로 '다음 기회에'라는 변명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리고 어김없이 찾아오는 후회와 자책의 시간... 그리고 다시 반복되는 약속과 깨짐의 뫼비우스 띠! 이것이 바로 제 일기장에 고스란히 기록된 슬픈 연대기였습니다.

물론 친구도 소중하고 동료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결국 홀로 남았을 때, 진정으로 나를 지켜줄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입니다. 이토록 소중한 나를 그동안 너무나 함부로 대했던 것은 아닐까요? 타인과의 약속은 칼날처럼 지키려 애쓰면서, 정작 나 자신과의 약속은 너무나 쉽게 저버렸습니다.

이제는 다른 사람과의 중요한 약속처럼, 나 자신과의 약속 또한 소중히 여기고 성실히 지켜나가야 할 것입니다. 금요일 저녁 혼자 조용히 영화를 보기로 했다면, 갑작스러운 만남 제안에 "죄송하지만, 이미 소중한 약속이 있습니다"라고 정중하게 거절할 수 있는 단단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내가 나를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 과연 누가 나를 소중히 여겨줄까요? 너무나 당연한 이 깨달음을 이제야 얻었다니... 왠지 모르게 씁쓸한 토요일 오후입니다. 하지만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라는 말처럼, 부디 저의 이 뒤늦은 자기 성찰이 부디 헛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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