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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아시스] 운동, 책 읽기, 그리고 글쓰기

8月

by 상경논총


장마철이다. 한국이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 나라였던가?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비가 온다. 우렁차게. 우중충한 날씨에 블라인드를 친 방이 더욱 어둡다. 8시 20분 알람이 울린다. 간만에 재밌는 꿈을 꾸고 있던 나는 계속 꿈을 이어가고 싶지만, 꿈의 리듬을 깨는 소리에 손을 더듬어 핸드폰을 찾는다. 힘겹게 실눈을 뜨고 ‘다시 알림’을 누른다. 나의 잠이 10분 더 연장되었다. 그 10분을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기대보다 짧고 생각보단 길었던 시간이 흐르고 알람이 다시 울렸다. 알람을 끄고 잠시 누워 ‘이제 일어나야지’라고 생각한다. 꿈으로 다시 들어가려는 문턱에서 위기감을 느끼고 벌떡 일어난다. 일어나자마자 이불을 개고, 운동복을 입고, 물 한 병을 챙겨 헬스장으로 향한다.


마침 등교 시간이라 몰려오는 고등학생 무리를 피해 그들과 반대 방향으로 향한다. 우산을 함께 쓰고 등교하는 커플이 스쳐 지나간다. 풋풋하고 싱그러운 모습에 조금 부러워진다. 나는 고등학생 때 뭐했지 생각하며 그들과 다른 방향으로 향할 때면 이제 진짜 어른이라는 생각과 더 이상 학생이 아니라는 실감이 든다. 아직도 나는 그들의 행렬에 합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물을 마시려고 마스크를 벗었다가 고등학생 무리가 보이면 다시 쓴다. 그들이 속으로 내 외모에 대해 평가하고 있을 것 같아서. 운동을 열심히 해서 더 예뻐져야지 다짐하며 걷다 보니 헬스장에 도착했다. 엄청난 임무를 완료한 기분이다.


운동 후 밥을 먹는데 요즘 양 조절이 잘 안된다. 배부르면서도 이것저것 꺼내 먹는다. 과식을 하면 항상 약간의 후회가 밀려온다. 그리고 남은 하루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식욕을 참지 못하고 또 먹어버린 자신에 대한 일종의 합리화다. 나는 먹고 나서 죄책감을 동기로 운동하려는 걸까? 왜 먹고 싶다는 욕구가 들 때 참지 못하는 걸까?


밥을 다 먹고 책 한권을 집어 들고 집 앞 카페로 향한다. 마음이 편안한 공간이 있다는 건 정말 감사한 일이다. 특히 그런 공간이 집 가까이에 있다면 더더욱. 카페의 인테리어는 사실 허접하다. 컨테이너 박스처럼 생긴 외관, 모양이 제각각인 의자들, 투박한 긴 나무 테이블. 하지만 여기에는 내 공간이 있다. 3층 창가 구석진 4인석. 적당한 채광, 너무 세지 않은 에어컨, 그리고 주인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나만의 공간. 가끔 수다를 떠는 아줌마들이 있지만 그러한 소란도 오래가지 않는다. 오늘 가져온 책은 유지혜 작가님의 <쉬운 천국>이다. 친구가 생일선물로 사준 여행 에세이인데 최근 다녀온 유럽 여행을 갈 때 챙겨갔다가 막상 여행 중에는 하나도 못 읽고 그대로 가져왔다. 책의 앞부분만 조금 읽었는데도 문뜩문뜩 유럽 여행의 기억들이 떠오르면서 생각이 많아졌다. 일상을 벗어나 여행을 하며 참 많은 것을 느끼고 배웠는데 왜 나는 아직 그대로일까. 3주 동안의 여행은 그동안 살아온 삶을 바꾸기에는 짧은 시간이었나. 여행을 다녀왔으니 뭔가 달라졌을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는데, 그건 헛된 기대와 자신감이었구나.


여행하는 동안 눈에 띈 모습들이 있다. 바로 평일 점심 사람들이 삼삼오오 카페에 모여 앉아 커피를 마시고, 맥주를 마시며 여유를 즐기는 모습들이다. 공원에서 선글라스를 끼고 조용히 누워 햇빛을 만끽하는 사람들도 기억에 남는다. 그러한 모습들을 보면서 카페에 그냥 앉아있어도, 하루에 많은 것을 하려 하지 않아도 큰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다. 한국에서는 뭐가 그렇게 급해서 여유가 없었을까. 여행을 다녀오고도 전과 같이 집에 있는 시간이 늘어간다. 인터넷 세상을 정처 없이 떠돌며 무료한 시간을 어찌저찌 보낸다. 더 이상 보고 싶은 게 없을 때까지. 그래도 운동과 책 읽기는 꾸준히 하고 있는데도 그 외의 시간을 ‘생산성 있게’ 보내야 한다는 강박은 여전하다.


그래서 나는 글을 쓴다. 책을 읽으면서 떠오르는 생각과 어지러운 마음들을 글로 내려놓는다. 보통 책 읽기와 글쓰기를 병행한다. 생각이 많아지면 내용에 집중하기 어려워서 중간중간 글을 쓰면서 생각을 정리한다. 그러고 나면 다음 내용이 눈에 들어오고 다음 페이지로 넘어갈 수 있다. 글을 쓰면서 생각을 계속 비워내다 보면 그토록 갈망했던 여유를 찾을 수 있다. 나에게 여유란 지금 현재에 집중할 수 있는 상태다.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예민한 측면이 있어서 가끔 같은 것을 보고 들어도 더 많은 것을 알고 느낄 때가 있다. 내가 의도하지 않은 정보를 알게 되는 것은 조금 피곤하다. 차라리 모르고 싶다는 생각도 종종 한다. 이럴 때 나는 ‘잉여 생각들’을 글로 써 내려간 뒤 종이 위로 떨어뜨린다. 글쓰기를 통해 나는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 현재에 머물 수 있을 때 비로소 나는 여유로워진다.


나를 지탱하는 것들이 있다. 혼란스러운 삶 속에서 내가 과거나 미래가 아닌 현재에 머물 수 있게, 내가 여전히 ‘나’일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들이 있다. 일기예보를 보니 내일도 비가 올 예정이다. 그리고 나는 내일도 운동, 책 읽기, 그리고 글쓰기를 하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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