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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경논총 Feb 08. 2024

[오아시스] 너희들이 남기고 간 흔적

L

“내 기억속의 무수한 사진들처럼 사랑도 언젠가 추억으로 그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만은 추억이 되지 않았습니다. 사랑을 간직한 채 떠나가게 해준 당신께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中 사진사 정원의 마지막 대사


내가 좋아하는 영화인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주인공인 사진사 정원의 마지막 대사이다. 평생을 사진을 찍고 살아온 정원에게 수많은 기억들은 그가 찍은 사진들처럼 추억이 되어갔지만, 사랑하는 사람인 다림만은 추억이 되지 않고 마음 속의 깊은 흔적으로 죽을 때까지 살아 숨쉬었던 것이다. 어떤 기억은 그 사람에게 단순히 추억으로만 남지 않는다. 그 사람에게 깊이 녹아 들어 하나의 흔적으로 지금의 눈빛, 행동, 분위기, 몸태에서 그 기억들을 엿볼 수 있다. 내게도 단순히 추억으로 남지 않는 기억들이 있다. 그리고 그 기억들은 내 마음 속에 하나의 흔적으로 깊이 각인되어 ‘나’라는 사람을 구성하고 있다. 

중학교 3학년, 가정형편이 어려워지자 전업 주부였던 어머니는 생활전선에 뛰어 드셨고, 학비가 비싼 특목고 대신 일반고로 진학을 하기로 마음을 먹으면서 나는 중학교 3학년을 시작했다. 비교적 중학교 1,2학년 때 학교 수업에 충실하였던 탓에 중학교 3학년 내용도 별로 어렵지 않았었고, 나는 고등학교 입시의 부담에서 벗어난 채로 자유의 시간을 1년간 가질 수 있었다. 주로 혼자였고 책을 읽거나 공부만 했던 내가 걱정되었는지 어머니는 빈집에 친구들을 초대해서 놀아도 좋다고 자주 말하셨다. 공부를 잘한다는 이유로 중학교 시절 내내 반장이었던 나는 많이 내성적이어서 친한 친구가 많지 않았지만, 그 말이 사뭇 기대감을 주곤 했다.

중학교 3학년 시절을 시작하면서 나는 학교에 있는 시간에만 공부를 하고, 하교 후에는 놀기로 마음을 먹었었고 그렇게 나는 인생에서 처음으로 자유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친구를 사귀어 보겠다는 마음이 들어 먼저 사람들에게 많이 다가 갔었다. 집안 사정이 넉넉한 집이 많지 않은 학군의 중학교여서 학원을 다니지 않는 친구들이 많았었고, 나는 그들과 밤 늦게까지 축구와 농구를 하고, 밥을 지어먹고, 영화를 보곤 했다. 물론 아지트는 우리집. 이때 참 많은 친구들이 나의 집을 오갔다. 그들과 함께 많은 이야기를 나누어 보면서 또래 아이들이 무슨 고민과 걱정들을 가지고 살아가는지도 알 수 있었고, 단순히 책에서만 배울 수 없었던 살아가는 이야기를 참 많이 접했던 것 같다. 이성 고민, 친구 고민, 가족 고민 등등 수많은 아이들의 이야기가 내 귀를 스쳐 지나갔고, 비교적 조숙했던 난 그들이 말하는 상처와 아픔, 고민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경청하고 상담해주곤 했다. 그러면서 참 많은 추억들이 나에게 생겨나기 시작했다.

밤에 별이 보고 싶다고 하면 새벽에 잠옷 바람으로 둘이 만나 중앙공원에서 별을 보곤 했던 친구 S, 내가 좋아하던 여자 아이를 자기도 좋아한다고 해서 나를 난처하게 만들었던 친구 H, 누구보다 절친했지만 다른 고등학교에 진학한 뒤로 자기는 비행 청소년으로 살겠다며 선언하고 연락을 끊자고 해서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한 친구 J, ‘반 평균 1등, 체육대회 1등, 합창대회 1등’ 해보자는 의욕만 앞섰던 못난 반장에게 응원과 격려의 말을 많이 해주고 잘 따라와 주었던 3학년 2반 친구들 그리고 내가 정말 많이 좋아했던 Y까지...

누군가 이 글을 보면 별거 없는 기억들을 뭘 그리 거창하게 써 놓았냐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나에게는 미래에 무언가를 도전하고 노력할 수 있는 여유를 만들어준 자양분이 되는 귀중한 시간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고등학교 선행을 하지 않은 내가 지역 명문 고등학교에 올라와서 3년 내내 경쟁력 있게 경쟁하고 노력할 수 있었던 에너지도 모두 이 추억들 덕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단편적으로 입시만을 위한 삶을 살기 쉬운 10대 교육 환경에서 내가 사람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성인으로 자라날 수 있었던 것도 교과서나 책이 아닌 아이들이 직접 들려줬던 아픔의 이야기였고, 내가 집안 사정 때문에 많이 휘청거릴 수 있었지만 중심을 잡을 수 있게 도와줬던 이들도 이때 만났던 친구들이었다. 

나에게 16살의 기억을 어떻게 생각 하냐고 누가 물어본다면 나는 이 기억을 단순히 추억이라고 대답하지는 않을 것 같다. 이 기억들은 나에게는 추억을 넘어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나의 흔적들이라고, 그리고 그 흔적들은 나의 마음에 남아 살아 숨쉬며 23살의 나를 여전히 지탱해주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그런 마음을 간직한 채 살아갈 수 있게 해준 아이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진심으로 전하고 싶다.


p.s. 고등학교에 가고, 대학에 가고, 군대에 다녀온 지금은 점점 연락이 끊겨가지만, 난 항상 너희들을 생각하곤 해. 다들 잘 지내는거 맞지? 바람이 추워지는 요즘 따라 쓸쓸할 때 난 너희들이 보고 싶어. 멀리 있어도 항상 응원할게 : )


-너희들의 친구 L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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