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치
최근 HD현대에서 연구 중인 AI 항해기술을 다룬 뉴스를 읽은 적이 있다. 스마트 선박 사업을 위해 설립된 자회사인 ‘아비커스’에서 대형 상선에 자체 개발한 자율 운항 시스템을 적용해 세계 최초로 대양 횡단에 성공하였다는 소식이었다. 아비커스의 자율 운항 기술은 선박의 주요 기기들을 실시간으로 제어하는 기능부터, 상선 내부에 설치된 CCTV를 통해 안전과 관련된 이슈들을 인공지능이 감지해 대응하는 첨단 기술을 갖추고 있다고 한다. 만약 미래에 이러한 자율 운항 시스템이 상용화된다면, 사람의 도움 없이도 선박의 운항이 가능한 무인 선박의 시대가 열릴 것이다.
이번 93호의 주제인 ‘항해’는 이와 같이 물리적으로 바다를 횡단하는 행위를 의미하지만, 사람들은 때로 삶이 흘러가는 것을 항해에 비유하기도 한다. 우리 모두는 각자 인생의 항해를 하고 있고, 삶이라는 선박의 기관사로서 각자의 선박이 흘러가는 방향을 조절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사실 과거의 나는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 나의 삶이라는 선박을 대신 운항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아주 많이 했었다. 마치 나의 현재 상황을 자동으로 진단해주고, 적합한 솔루션을 알아서 제시해주는 AI 항해 기술처럼 말이다. 대학생이 된 후에는 정해진 규칙이 없이 인생의 크고 작은 결정을 직접 내려야 했고,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내가 오롯이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이 버겁게 느껴졌었다. 위험 회피적인 성향을 지닌 나로서는 그 선택의 결과를 직접 맞닥뜨리기가 무서워 무작정 회피해버렸던 순간들도 정말 많았던 것 같다.
그렇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렇게 내가 직접 내린 선택들에 대해서는 그 누구의 탓을 할 수 없기에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는 과정에서 과거의 나보다 성숙해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크고 작은 선택을 내리다 보면, 압도되어버릴 것만 같은 버거운 선택의 순간도 멀리서 보았을 때에는 별 것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조금씩 느껴간다. 물론 AI가 나의 항해의 방향을 결정해주고, 대신 항해를 해준다면 맞닥뜨리기 싫은 두려운 순간들을 쉽게 피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 선택의 결과를 내가 떠안으며 성숙해질 수 있는 기회 역시 없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하면 인생이라는 항해는 내가 내린 선택들의 순간들이 모이고 모여 결국 삶의 방향성이 결정되는 긴 여정과도 같을 것이다.
앞으로 남은 나의 인생에서는 지금까지 내가 내렸던 선택들보다 훨씬 더 많은, 그리고 훨씬 더 무거운 선택의 순간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대학 생활을 해오면서 내렸던, 그리고 앞으로 남은 대학 생활에서의 내릴 선택들이 앞으로 인생에서 남은 항해를 잘 헤쳐나갈 수 있는 좋은 밑거름이 되어줄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