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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94호 매듭 22화

[오아시스] 내가 가장 사랑하는 후회(後會)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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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경논총

십일월의 초입에서, 그 누구에게도 부치지 못할 편지를 적으며 깨달았습니다. 여기 아직 매듭짓지 못한 마음이 있다고.


올해 여름은 이상하리만큼 질척였습니다. 가만히 경영관에 누우면 유리 너머로 보이던 초록들 역시 좀처럼 떠나지 못해 서성이고 있었습니다. 여름을 건너 구월의 마지막 밤까지 지나도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여름 바람을 맞으며 무더위의 청승을 지켜봤습니다. 그때 나는 알게 되었습니다. 나 역시 떠나보내지 못해 질척이고 있다고.


내가 생각하는 가장 아름다운 여름은 아주 어릴 적 함께 보았던 바다와 그 안을 넘실거리던 파도의 움직임이었습니다. 파도가 모래사장에 남긴 흔적들을 신발로 꾹꾹 밟아보던 그때에도 나는 여름보다 봄을 좋아하던 소녀였습니다. 그래서 여태 나는 봄을 놓지 못한 채 질척이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나를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시겠지만 난 아직도 그날 보았던 바다를 그리워하고 하고 있습니다. 이는 앞으로 내가 볼 어떤 바다도 그 바다보다 아름다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따금 영원한 것은 없다는 말의 예외에 대해 생각하곤 했습니다. 금세 지나가버리고 마는 시간의 무감함 앞에서 골몰했습니다. 마음속에 돌아갈 수 없는 바다를 간직한 아이는 어느새 자라 어른이라는 선 안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른이 된 나는 사실 어른인 줄 알았던 아이에 불과했습니다. 사월의 흩날리는 벚꽃잎을 눈에 담으며 나는 끝내 모르고 싶었던 순간을 마주했습니다. 그 이후로 나는 어른이라는 말에도, 아이라는 말에도 속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그저 시계 초침처럼 흘러가고 있을 뿐입니다.

나는 아직도 봄비가 내리던 사월의 어느 날에 갇혀 있습니다. 이제야 그 해의 벚꽃이 지던 순간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나는 종종 그 순간이 시리도록 추운 겨울이 아니라 따듯한 봄날이어서 다행이었다고 온몸으로 체감하곤 합니다. 일부러 잠들지 않기 위해 버티는 자발적인 불면증을 앓던 밤이 늘어갔습니다. 91을 구원으로 읽는 법을 배웠습니다. 시간만 흘러가고 나는 전혀 벗어나지 못한 기분입니다. 아직도 차마 무뎌지지 못해 괜찮다는 말을 어렵게 꺼내두며 괜찮은 척에 머물러 있습니다.


나는 마지막인지도 모르고 건넸던 나의 멋모르던 대답을 흐릿하게 기억합니다. 그때 마주친 내 눈빛이 흔들림 없었기를, 그래서 걱정시키지 않았기를 늦게나마 바라며 괜찮다고 중얼거립니다. 아무렇지 않던 나의 하루는 예기치 못한 때에 특별할 것 없는 기억 앞에서 문득 무너져내립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도 또 한 번 무너집니다. 무지에서 오는 비극이 있습니다. 알지 못해서 한없이 무력해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몰랐다는 말로 아무렇지 않아지기에는 돌이킬 수 없는 슬픔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또다시 질척입니다.

쏟아지는 다정 속에서도 그 어떤 말도 위로로 와닿지 않아 필사적으로 고마움만을 되뇌었던 적이 있습니다. 숱한 생각 속에서 하나의 생각만 간신히 건져 끌어올려 봅니다. 그거 하나면 그래도 괜찮지 않나 하고 뭉뚱그려 구깃구깃 저의 사념들을 뒤로 던집니다. 아무리 눈을 감아도 흘러가는 시간을 감각하면 늘 숨이 막힙니다. 그래도 유유히 흘러 정신 차려 보면 어느새 멋진 곳에 가 있기를, 그때는 완숙한 연기에 감춘 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완연하게 괜찮다고 말할 수 있기를, 십일월의 어느 밤 간절히 바라봅니다.


떠날 기미가 보이지 않던 여름이 물러가고 이제야 누군가의 숨이 눈에 보이는 계절이 성큼 다가왔습니다. 곧 돌아올 봄을 닮아 살랑이는 오아시스를 빌려 다시 한번 나의 미련을 적어보자면, 한동안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밤인사를 전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무릎을 붙잡고 앉아 멍하니 바닥을 바라보던 나는 그렇게 또 질척였습니다. 나처럼 질척이던 이번 여름에게 이 마음은 애정인지, 소망인지, 무엇인지 물어보고 싶습니다. 내가 들을 답은 그리움입니다. 늘 그리워요. 오늘은 이게 내 밤인사입니다.


십일월의 초입에서, 내가 쓰던 것이 편지가 아니라 일기임을 깨달으며 계속 적습니다. 솔직히 아직도 제대로 떠나보내지 못해 그저 질척이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조금 더 솔직해지자면 이건 사실 일기가 아니라 고백일지도 모릅니다. 아니 어쩌면 편지도, 일기도, 고백도, 그 무엇도 아닐지도.

맞습니다. 이건 내가 당신께 보내는 아주 많이 늦은 헌사입니다. 내겐 여전히 아직 매듭짓지 못한 마음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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