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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94호 매듭 21화

[오아시스] 알렉산더 대왕과는 다를 우리의 원정

싱클레어 원정대

by 상경논총

“내 피가 몸속에서 소리내고 있는 그 가르침을 듣기 시작하고 있다. 내 이야기는 유쾌하지 않다. 꾸며낸 이야기들처럼 달콤하거나 조화롭지 않다. 무의미, 혼돈, 광기 그리고 꿈의 맛이 날 뿐이다. 더 이상 스스로를 기만하며 살지 않는 이들의 삶처럼 말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다. 길의 추구, 오솔길의 암시다.”


상경논총 활동을 오래 하며 발견하게 된 사실 중 하나는 세상에 미묘하게 잘못된 정보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다. 출처를 밝히더라도 해당 출처를 파고들어 가다 보면 더 이상 어떤 정보도 존재하지 않는 지점을 발견하게 된다. 출처를 밝혔는데 그 출처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AI의 할루시네이션 현상과도 연결된다. “기후 변화 연구를 한 2020년 노벨상 수상자는 누구야?”라는 질문에 AI가 “환경운동가이자 과학자인 도널드 트럼프입니다. 그의 업적은 다음과 같습니다. ~”라는 말도 안 되는 답변을 꽤나 그럴싸하게 내어놓는 현상을 환각을 뜻하는 ‘할루시네이션’ 현상이라고 부른다. 할루시네이션은 그 자체로도 문제이지만 이렇게 생성된 잘못된 정보가 다시 AI의 학습 재료로 사용되어 더 큰 오류를 광범위하게 만들어낼 수도 있다.

사람들이 생성해 내는 잘못된 정보들은 적어도 오류가 생겨난 과정을 추적할 수 있다. 하지만 Chat GPT와 같은 생성형 AI의 답변이 도출되는 과정은 사람이 직접 확인하거나 추적할 수 없다. 그렇기에 AI가 생성해 내는 정보가 많아질수록 정보를 관리하는 일이 사람들의 역량을 벗어나게 된다. 뭔가가 잘못됐다는 걸 알게 되어도 어디서부터 매듭이 꼬여버린 건지 알 수 없다.

이처럼 꼬여버린 매듭과 관련된 한 설화가 있다. 기원전 8세기 프리기아의 왕 고르디우스는 수도 고르디움의 신전 기둥에 아주 복잡하게 매듭을 지어 전차 한 대를 묶어 놓았다. 그러고는 이 매듭을 푸는 사람이 아시아를 정복할 것이라는 예언을 덧붙였다. 많은 현자들이 이 매듭을 풀고자했지만 모두 실패하였다. 그러던 중 동방 원정길에서 알렉산더 대왕이 고르디우스의 매듭 이야기를 듣고 신전으로 향한다. 복잡한 매듭을 살펴보던 알렉산더 대왕은 칼을 뽑아 단칼에 매듭을 끊어버린다. 이후 그는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의 3대륙에 걸친 대제국을 세우며 고르디우스 신화를 완성한다.

복잡한 매듭을 단칼에 베어버린 것은 탁월한 묘책일 수도 있겠으나, 이 일화의 다른 해석에서는 알렉산더가 예언대로 매듭을 풀어내는 대신에 칼로 잘라냈기에 결국 알렉산더의 제국이 금세 분열될 수밖에 없었다고도 한다.


어쩌면 우리의 삶도 지금 고르디우스의 매듭과 할루시네이션에 묶여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던, 가지런히 정리된 실타래였던 과거의 나는 내가 원하지 않았던 실수, 잘못된 선택, 혹은 세상의 왜곡으로 인해 점점 더 복잡한 매듭으로 뒤엉켜버렸다. 그 매듭은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서 시작되었을 수도 있고, 나 자신이 계속 꼬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떤 시점과 원인으로 그렇게 되었든 여기에 발이 묶여 실은 더 이상 자유로운 형태를 만들어 나갈 수 없다. 이 매듭을 어찌해야 할까?

매듭을 풀어나가기란 상당히 어렵고, 불쾌하며 두려운 감정을 동반한다. 자신의 꼬여버린 마음을 들여다보기란 두려운 일이다. 하지만, 이 매듭을 단순하게 잘라버리면 우리는 그 실 또는 나를 영영 잃게 된다. 그렇기에 복잡한 마음을 다잡고, 인내심을 가지고, 이 매듭들을 하나씩 풀어나가는 시간이 필요하다. 매듭을 풀어가다 보면, 언젠가는 매듭의 끝에 닿을 수 있을 것이다. 매듭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아마도 그것은 ‘본래의 나’일 것이다.


태초의 나의 행동은 자유롭고 마음에는 어떤 왜곡이나 기만도 없었을 것이다. 꼬인 매듭이 없던 태초의 나는 나를 포함한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고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삶은 우리가 그 자유로운 상태로 계속 머무를 수 없음을 알려준다. 우리는 경험과 기대, 그리고 세상의 잣대에 의해 본래의 나를 여러 겹의 가면 속에 숨긴 채 살아간다. 하지만 본래의 나는 여전히 내 안에 남아 있다. 본래의 나는 나에게 진정한 자유와 일체감을 줄 유일한 존재이다. 그러니 우리의 삶은 어쩌면 본래의 나를 찾아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데미안>에서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다음과 같은 조언을 건넨다. “우리들 마음속에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원하고 모든 것을 우리 자신들보다 더 잘 해내는 누군가가 있음을 깨달으면 도움이 될 거야.”

누구나 어딘가에서 본래의 나를 잃어버리기도 하고 또다시 찾아가는 과정을 반복하며 산다. 본래의 나를 찾아가는 일은 다행히도 온 생애에 걸쳐서 할 수 있는 일이다. 마감일이 한참 남은 만큼 조급할 필요는 없다. 다만, 일상을 이어가는 중간에 가끔 멈춰서서 나를 들여다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특정한 사건이 본래의 나와 멀어지게 하지는 않았는지, 왜곡된 시각이 본래의 나와 나 사이의 통로를 가로막고 있지는 않는지, 내가 나 스스로에게 충실하게 살아가고 있는지 질문하는 일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이 시간이 본래의 나를 향한 길을 비추는 작은 등불이 될 것이다. 다시 만나게 될 존재를 기대하며 묵묵히 걸어가는 모든 이의 원정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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