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
가끔 그런 날이 있다. 무언가 목표를 성취했으나 뿌듯함은 손끝에 스치는 저녁노을의 여운처럼 잠깐 머물다 가고 다시 찾아온 새로운 막막함에 싱숭생숭한 그런 날 말이다. 길었던 여정에 비해 지나치게 짧게 느껴지는 결론이 허무함을 안기기도 하고, 우리가 겨우 첫 장을 넘겼을 뿐이라는 사실이 더 큰 아득함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인생의 끝은 또 다른 시작이라는 점에서 매듭과 닮아있다.
매듭은 시작인 동시에 끝이라는 점에서 이중적이다. ‘사건의 매듭을 짓다’라는 표현에서 매듭을 묶는 것은 끝을 의미한다. 그러나 상자의 매듭을 풀어야 내용물을 알 수 있듯이 매듭을 푸는 것은 시작을 의미하기도 한다. 비단 상자에 국한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편지를 봉인한 매듭을 풀 때 새로운 이야기와 감정이 흘러나오는 순간도 매듭이 품은 시작의 다른 형태다. 떠나기 전 짐을 꾸리며 묶는 마지막 매듭이, 이후의 새로운 삶을 준비하는 첫걸음이 되는 것도 그렇다. 즉 묶여 있는 매듭은 시작과 끝의 공존이다. 두 세계의 경계다.
그러한 매듭의 시작과 끝을 정하는 것은 누구인가? 닫힌 상자 속의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살아 있는 상태와 죽어 있는 상태가 공존하듯, 묶인 매듭은 시작과 끝이 공존한다. 고양이의 운명이 관찰자에 의해 결정되듯, 매듭의 운명은 행위자인 우리에 의해 확정된다. 그것이 끝이 될지 시작이 될지는 우리의 선택과 행위에 달려 있다. 이러한 점에서 매듭은 처음부터 매듭이었던 것이 아니다. 묶기 전에는 단순한 끈이었을 뿐이다. 끈을 묶고자 하는 의도가 더해지며 시작과 끝이 뒤섞였다. 어쩌면 우리가 막막함을 느끼는 이유는 도전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매듭을 묶지 않고 끈으로만 두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니 말이다.
새로운 시작의 막막함과 매듭을 풀며 느끼는 갑갑함은, 인생에서 중요한 문턱을 넘어야 할 때마다 우리를 시험하는 문지기와도 같다. 그러나 주저하지 말자. 알렉산드로스가 고르디우스의 매듭 앞에서 그러했듯 때로는 매듭을 푸는 대신 끊어내는 과감함이 필요할 때도 있다. 단순히 매듭을 푸는 것을 넘어 새로운 관점의 지평을 열 용기를 갖자. 삶의 매듭 앞에서 고민할 때도 많다. 그러나 모든 매듭은 결국 당신의 손끝에서 시작과 끝을 새롭게 정의할 수 있다. 그러니 주저하지 말고 나아가라. 당신의 손끝에서 시작될 찬란함을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