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아닌 함께, 대만 추석 여행

대만 워홀 생활기 시즌2#15

by 끼미

2021년 9월 말, 중추절(추석)을 맞이한 대만은 여전히 한여름 날씨였다. 더위를 식히고자 한국인 동생 J와 같이 바다 수영을 하러 왔다. 한창 코로나가 심각했던 첫 방문 당시 텅 빈 수영장을 보며 나중에 꼭 다시 오겠다고 다짐했던, 지룽(基隆)의 허평도(和平島) 공원이었다.


두 달 만에 다시 찾은 허평도 공원은 기대 그 이상이었다. 즐거운 웃음소리로 시끌벅적한 바다 수영장은 중추절 연휴 느낌이 제대로였다. 구명조끼 입고 물에 둥둥 떠있는 아이들과 그 옆에서 챙기는 어른들. 옛날 생각이 났다. 초등학생 때까지만 해도 우리 가족도 매 여름마다 바다에 갔었는데. 내가 타고 있는 튜브를 밀어주던 아빠 얼굴이 떠올랐다. 대만 오기 전 아빠랑 사이가 틀어졌지만 불쑥 생각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추석 명절이라 그런지 가족 생각이 더 많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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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평도 공원의 바다 수영장


추석 연휴를 가족과 함께 보내지 않은지는 꽤 됐다. 임용고시 1차 시험이 11월 말이라는 핑계로 몇 년 전부터는 부모님 집 대신 서울 자취방에서 추석을 보내왔다. 그래도 당시 사귀었던 남자친구나 친구들을 만났었으니 명절에 혼자 서울에 있다고 해서 크게 외롭지는 않았다. 하지만 대만에서 중추절을 맞이하는 기분은 좀 서글펐다.


대만에 오기 전, 워홀 후기를 엄청 찾아보면서 나에겐 대만 중추절에 대한 환상이 생겼다. 대만에서는 중추절에 친구 또는 가족과 모여 길거리에서 바베큐(烤肉)를 즐기는 전통이 있는데, 내가 본 대만 워홀러들은 다들 정말로 대만 친구들을 만나서 고기를 구워 먹으며 제대로 중추절을 보냈다고 했다. 그래서 나도 대만에 가면 당연히 온몸으로 연기를 마셔가며 길바닥 바베큐를 즐길 거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친구 집에 초대 받는다면 뭘 사들고 가야 하나 상상도 했었다.


하지만 상상은 상상일 뿐이었다. 대만에 온 지 몇 달 됐지만 아직 나는 대만 친구를 사귀지 못하고 있었다. 어학당의 같은 반 외국인 친구들도 중추절 연휴를 함께 할 정도로 친하진 않았다. 그렇다고 알바 중인 한식당 사장님 가족과 연휴를 보낼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중추절이 다가올수록 슬퍼졌었다. 왜 내 중추절은 후기에서 본 거랑 다른가, 라며 혼자 낙담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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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대만식 햄버거 꽈바오 / (우) 돼지갈비 도시락


다행히 내 곁엔 동생 J가 있었다. 이틀뿐인 연휴 중에서 마침 둘 다 아무 일정 없는 날이 있어 중추절 여행을 함께 할 수 있었다. 한국 아닌 곳에서 첫 명절을 맞은 두 한국인은 생각보다 깊은 수심에 무섭다고 덜덜 거리며 웃고, 지룽 시내에서 포장해 온 음식들을 나눠 먹으며 그래도 역시 물놀이엔 컵라면인데 하면서 아쉬워하고, 파란 하늘과 바다를 배경으로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었다. 허평도 공원은 이미 한 번 와본 적 있는 곳이었지만 J와 함께 하니 더 아름다웠다. 갔던 곳에 또 가는 걸 좋아하지 않는 나인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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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빈 항구에서 만난 산책냥이 그리고 노을


바다 수영을 즐기고 나온 우리는 인스타 핫플이라던 정빈 항구(正濱漁港)에 잠깐 들렀다. 버스가 다니지 않아 한참 걸어야 했지만 두런두런 이야기도 나누고 망고 슬러시도 사 먹고 하다 보니 어느새 어디서 많이 본 그곳에 도착했다.


왠지 사진빨일 것 같았던 정빈 항구는 역시나 기대했던 대로였다. 사진에서 봤던 알록달록한 건물들 앞에서 인증샷 몇 장 남기는 게 전부였다. 그럼에도 즐거웠다. 생각보다 많은 대만 사람들이 있었고 목줄하고 산책 나온 냥이도 볼 수 있었다.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누는 대만 사람들의 목소리를 배경으로 저 멀리 해가 지고 있었다. 퇴근하는 태양이 그리는 그림은 역시 최고의 예술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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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룽 야시장에서 사먹은 저녁


중추절 기념 여행의 마지막 코스는 지룽 야시장이었다. 지난번에 혼자 왔었을 때는 팥빙수 한 그릇만 사 먹어서 아쉬웠었는데, 이번에는 J와 함께 이것저것 맛봤다. 해안 도시 지룽의 명물이라는 게살 스프와 대만 야시장에서 꼭 먹어야 하는 미니 소세지, 독특한 양념 잔뜩 바른 버섯 구이와 꼬치구이. 하나 같이 다 맛있었지만, 대만 야시장 특유의 분위기 그리고 누군가와 함께 한다는 사실이 맛을 더 돋구어 줬다. 몇 년이 지난 지금 봐도 사진에서 그때 그 향이 나는 것만 같다. 옆에서 무어라 무어라 말하던 J의 목소리도 들리는 듯하고.



대만에서 보낸 첫 명절이었던 중추절.

상상했던 것과는 달랐지만 상상했던 것보다 행복했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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