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만난 대만 사람이랑 손을 잡았다

대만 워홀 생활기 시즌2#14

by 끼미

<어쩌면 운명일지도 모르지리>


둥근 보름달이 뜬 대만의 추석, 중추절. 그날 나는 도리씨를 처음 만났다. 나의 유일한 대만 친구가 되어준 도리씨를. 언어교환 어플로 채팅만 주고받다 처음으로 도리씨의 실물을 영접했던 날, 나는 도리씨가 나의 친구가 될 운명임을 바로 느꼈다. 왜냐고? 처음 만난 사람이랑 오후 2시에 만나 밤 10시까지 논 건 도리씨가 처음이었으니까.


타이베이의 어느 지하철 역 근처에서 만난 우리는 원래 가려던 카페가 만석이라 어쩔 수 없이 근처에 있던 모스 버거로 향했다. 웨이팅을 하기엔 타이베이의 추석은 여전히 찜통 속이었다. 지금까지 만났던 언어교환 상대들처럼 도리씨도 타지에서 온 한국인에게 맛있는 걸 사줬는데, 같이 먹을 감자튀김과 치킨너겟, 홍차뿐만 아니라 나중에 집 가서 먹으라고 밥 버거까지 사서 내 손에 쥐어줬다. 대만 사람들은 정말 인심이 후하다.


우리는 30대 중반 솔로이면서 외국어를 배우고 있다는 공통 분모 덕분에 첫 만남부터 수다 삼매경이었다. 약간 낯을 가리는 나와 달리 도리씨는 긴장해서 손에 땀난다고 하면서도 계속 나에게 질문을 하고 자기 얘기도 하면서 대화를 이끌어 나갔다. 방송국 아나운서로 일했다더니 역시 짬은 어디 가지 않았다. 각자 좋아하는 남자 연예인과 이상형에 대해 한창 성토하다가 갑자기 도리씨가 나에게 물었다.


"롱롱(내 대만 이름)은 한국에서 무슨 일 했어요?"

"저는 학교에서 학생들 가르쳤어요."

"와, 선생님이에요? 무슨 선생님이에요?"

"띠리(地理, 지리) 가르쳤어요, 띠리."

"띠리? 진짜? 나도요! 나도 띠리 공부했어요!"


세상에, 지리라니! 나도 모르게 도리씨의 손을 덥썩 잡았다. 한국에서도 만나기 어려운 지리인을 대만에서 만날 줄이야! 도리씨도 대만에도 지리 전공자가 정말 적다고 하면서 한국에서 온 지리인 동지를 엄청 반가워 했다. 어쩐지 아까 서울 출퇴근 얘기할 때 내가 종이에 지도까지 그리면서 설명하더라며 "역시 지리 선생님!" 하고 엄지를 치켜 들었다. 그래, 나의 지리 짬도 어디 가지 않았구나.


생각해 보니 도리씨에게서도 지리인의 냄새가 언뜻 났었다. 조금 전 도리씨가 타이베이 날씨에 대해서 설명할 때 분지(盆地), 평원(平原) 이런 단어들을 썼었기 때문이다. 중국어로 배운 적은 없지만 한국어랑 발음이 비슷해서 찰떡 같이 알아들었던, 한때 지리 선생님이었던 내가 수업 시간에 썼던 지리스러운 단어들. 역시 한 번 지리인은 영원한 지리인인가?


도리, 지리.

우린 어쩌면 운명일지도 모르지리!




<대만 토끼님, 소원을 들어주세요>


아웃사이더의 설움을 공유하며 부쩍 친해진 두 지리인은 요즘 타이베이 인싸들 사이에서 가장 핫플이라는 중산(中山)역으로 걸어갔다. 가는 길에 도리씨가 추천한 일식 돈까스 집에서 맛있는 히레까스를 먹고 도리씨가 보여주고 싶다고 했던 '타이베이 필름 하우스'라는 건물도 잠깐 구경했다. 도리씨는 건물의 역사에 대해 중국어로 열심히 설명해줬는데,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그렇게 바라고 바랐던 '대만 친구랑 즐거운 시간 보내기'라는 꿈이 실시간으로 이뤄지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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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도리씨 따라 시킨 히레까스 / (우) 타이베이 필름 하우스


중국어 폭격에 약간 혼미해졌던 정신은 중산역에 도착하면서 조금씩 돌아왔다. 도리씨의 말대로 중산역은 20~30대의 젊은이들이 많았는데 그래도 인구 밀도 자체는 적어서 덜 복잡한 홍대 거리에 온 듯했다. 제법 먼 길을 걷느라 지친 우리는 아직 뜨뜻한 맨바닥에 철푸덕 앉아 잠시 휴식을 취했다. 밤하늘에 높이 뜬 밝은 보름달, 이제 좀 시원해진 저녁 바람, ASMR 수준으로 적당히 시끄러운 소음. 완벽하게 평화롭고 완벽하게 행복했다.


가만히 달을 올려다 보던 나는 도리씨에게 물어봤다.


"한국은 달에 토끼 산다고 하는데 대만 사람들도 그래요?"

"토끼? 아, 네, 대만도 토끼 얘기 있어요."

"오 정말요? 그럼 대만 토끼도 떡 만들어요?"


나의 방아 찧는 시늉에 도리씨는 웃으면서 그런 말은 처음 듣는다고 했다.


"아니요, 대만 토끼는 약 만들어요. 약!"


이번에는 도리씨가 허공에서 절구로 약을 빻았다. 아, 대만 달 토끼는 약사구나. 아니다, 한의사인가? 달 토끼는 참 바쁘겠다. 한국 사람이 쳐다볼 땐 떡매를 들고 대만 사람이 쳐다보면 약을 빻고... 이 얘기를 하면서 우리는 또 한 번 웃었는데, 사실상 말도 잘 안 통하면서 달과 토끼 얘기로 깔깔거릴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이게 '마음으로 통한다'는 건가?


중산역에서 본 보름달

어느덧 밤 10시. 집에 갈 시간이었다. 도리씨는 내일 쉬지만 나는 알바하러 가야 했다.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하며 우리는 마지막 의식을 치르기로 했다.

바로 '보름달 보며 소원 빌기'.


"도리씨, 우리 또 소원 빌어요!"

"하하, 좋아요! 소원!"


나의 제안에 도리씨는 빵 터지면서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아까 중산역으로 걸어오는 길에 같이 빌었던 소원을 다시 꺼냈다. 대만에는 보름달 보며 소원 비는 의식이 없다던 도리씨가 소원 있냐는 내 질문에 단번에 내뱉었던, 아주 진심 어린 소원.


"좋은 남자친구 생기게 해주세요~ 제발~~~"


약사 대만 토끼님, 우리 소원 들어주실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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