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워홀 생활기 시즌3#12
타이베이의 겨울은 거의 매일 비가 내렸다. 서빙 알바하랴 대만 떠돌아다니랴 가뜩이나 피곤한 몸은 저기압의 영향으로 더욱 무거워져 갔다. 마음 같아선 베이터우(北投)의 온천 호텔에 가서 몸을 담그고 싶었지만 월급 40만 원으로 살아가는 워홀러에겐 사치였다.
온천욕 대신 온수 샤워로 버티던 어느 날, 베이터우에서 가난한 워홀러도 부담 없이 온천욕을 즐길 수 있는 곳을 찾아냈다. 누구든지 공짜로 족욕을 할 수 있는, 푸싱공원(復興公園)이었다.
푸싱 공원과 처음으로 대면했던 초겨울, 그날 나는 마법에 걸렸다.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는 마법! 동네 공원에 이렇게 좋은 족욕탕이 있다니, 그것도 미엔페이(免費, 공짜)! 베이터우에는 자비로운 부처님이 사시는 게 분명했다.
공원에 들어서니 갈색 목조 지붕 아래에서 족욕을 즐기는 대만 어르신들이 보였다. 겨우 서른 살인 햇병아리가 껴도 되나 싶은 분위기였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도전해 보자며 족욕탕에 입장했다. 안내대로 가방과 양말을 벗고 두 발을 깨끗하게 씻은 뒤 탕 속으로 두 다리를 담갔다. 뜨겁지도 미지근하지도 않은, 딱 적당히 뜨끈한 물이 띵띵 부은 두 종아리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모든 게 완벽했다. 두 다리는 기분 좋게 뜨끈한 물속에, 상체는 선선한 초겨울 바람 속에, 기막힌 노천욕이었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의 대비도 재밌었다. 양옆에는 연세 지긋한 어르신들이 조용히 족욕을, 정면에는 헬멧 쓴 초등학생들이 깔깔대며 인라인 스케이트를 즐기고 있었다. 고요하면서도 고요하지 않은 이 소란함에 마음이 푸근해졌다.
점점 노곤노곤해지는 몸을 느끼며 잠시 눈을 감았다. 발가락 사이사이로 매일 무거운 뚝배기를 나르느라 쌓였던 피로가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쓸쓸했던 마음은 온천물의 뜨끈한 온기로 차올랐다. 머릿속에서 온천 호텔의 잔상이 서서히 사라지는 걸 보며 생각했다. 자비로운 베이터우 부처님이시여, 감사합니다.
그 후에도 종종 대만 어르신들과 족욕을 즐기러 푸싱공원을 찾았다. 알바가 유독 바빴던 다음 날에는 두 발이 시뻘게질 때까지 공짜 족욕을 만끽했고, 대만 친구인 도리 언니와 같이 갔던 날엔 어린 시절 엄마랑 목욕탕 갔던 얘기를 하며 웃기도 했다. 나에게 푸싱 공원은 타이베이의 을씨년스러운 겨울이 포근한 봄으로 변하는, 마법의 장소였다.
푸싱 공원에서 족욕을 마치고 나면 베이터우 시장으로 향했다. 타이베이에서, 아니 대만에서 가장 사랑하는 연두부 간식인 또우화(豆花)를 먹기 위해서였다. 갈 때마다 손님들이 줄 서서 기다리는 그 가게는 50위안, 우리나라 돈으로 약 2,500원이면 푸짐하고 맛있는 또우화를 먹을 수 있는 곳이었다.
이곳은 주문하는 것부터 스릴 넘쳤다. 주문 시 연두부에 곁들일 토핑 네 가지를 말해야 했는데, 이름부터 낯선 재료들을 정확한 중국어 발음으로 신속하게 주문하는 건 아웃사이더의 노래 <외톨이>에 나온 한국어 랩을 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웠다. 더군다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시원한 걸로 할지 따뜻한 걸로 할지, 설탕물을 부을지 또우장(콩물)을 부을지, 당도는 어느 정도로 할지도 말해야 했다. 여전히 중국어 초보인 나에겐 할 때마다 심장 떨리는 커스텀 주문 시스템이었다.
‘중국어 잘하는 척 주문하기’ 미션 완료 후 드디어 찾아온 또우화 영접의 시간. 수저 가득 떠서 먹는 부드러운 연두부와 살얼음 낀 또우장 한입. 그 맛은 사우나 후 냉탕에 뛰어든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 좋게 시원한 맛이었다. 거기에다 최애 토핑인 달콤 쫀득한 타로볼(芋圓)과 구수한 토란(芋頭)을 함께 떠먹으면 여기가 바로 천국이었다. 지긋지긋한 겨울 빗소리마저 사랑의 세레나데로 들리는 그런 천국.
당연히 맛으로만 따지면 이 집보다 더 맛있는 또우화도 많았다. 그러나 그 어느 또우화도 공짜 족욕 후에 먹는 이 한 그릇에는 못 미쳤다. 마치 아무리 비싼 바나나 우유도 어릴 때 목욕탕에서 엄마가 사줬던 바나나 우유를 못 이기는 것처럼.
결국 대만에서 지낸 일 년 동안 베이터우의 온천 호텔에는 한 번도 가지 않았다.
푸싱 공원의 공짜 족욕과 시원 달콤한 또우화 한 그릇만으로도 이미 행복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