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베이를 방랑하는 고독한 미식가

대만 워홀 생활기 시즌3#13

by 끼미

눈 뜨자마자 아침 먹으러 갔다. 할 일이 없어서.


어학당 수업을 안 들으니 알바 가는 5시 전까지 반나절이 자유였다. 말이 좋아 자유지, 사실 심심했다. 만나서 수다 떨 친구는 없고 쇼핑이나 카페 투어는 내 취향이 아니었으며, 단수이나 베이터우도 매일 가는 건 재미없었다. 어쩔 수 없이 아침부터 먹으러 나갔다.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건 역시 먹는 거였다. 일단 나가고 보는 건 꽤 똑똑한 전략이기도 했는데, 아침 먹으러 가는 길에 그리고 아침 먹으면서 오늘 뭘 할지 고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침보단 아점에 가까웠던 첫 식사는 주로 자오찬(早餐) 가게에서 이뤄졌다. 자오찬 가게는 ‘아침(早) 식사(餐)’ 전문 식당으로, 다양한 메뉴 중에서 내가 제일 사랑하는 아침 식사는 생(生) 야채가 든 대만식 샌드위치 ‘셩차이(生菜) 샤오삥(燒餅)’이었다. 패스츄리처럼 바삭한 빵과 양상추와 토마토 등 신선한 야채, 고소한 계란 부침이 잘 어우러진 샤오삥. 거기에 시원한 콩물인 또우장(豆漿)까지 곁들이면 맛과 건강 모두 완벽한 아침 식사였다.


최애 자오찬 가게의 셩차이 샤오삥

자오찬 가게에는 먹는 재미뿐만 아니라 사람 구경하는 재미도 있었다. 아무리 이른 시간에 가도 늘 손님들이 많았는데, 느긋하게 아침 식사를 즐기는 타이베이 사람들은 볼 때마다 신기했다. 아침에 세수하고 학교와 회사 가기 바빴던 서울에선 보지 못했던 풍경이었다.


맛있는 샤오삥을 먹으면서, 분주하면서도 여유로운 사람들을 보면서, 다 먹고 어디 갈지 고민하는 아침 식사 시간은 참으로 소중했다. 그동안 시험 공부하랴 학교 출근하랴 즐기지 못했던 이 아침,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는 이 보물 같은 시간. 할 일이 없어 시작한 아점 먹기는 그렇게 아무리 피곤해도 지키는, 귀중한 일과가 되었다.


자오찬 가게의 여유로운 아침 풍경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나면 온 김에 주변 동네를 구경했다. 곧장 집에 돌아가기엔 아쉽기도 하고, 소화도 시켜야 하니 겸사겸사. 아침 시장에서 귤이나 용과, 백향과(패션프루츠) 같은 과일을 사거나 근처 공원에 가서 산책을 했다. 각 잡고 관광지 가는 날 아니면 이 배회하는 시간이 솔직히 엄청 재밌지는 않았다. 그다지 볼 건 없었고 혼자 돌아다니는 건 지루했다. 그래도 아침 먹으러 온 김에 새로운 동네를 구경한다고 생각하고 아마도 다시 올 일 없을 골목 구석구석의 모습을 마음에 담았다.


아침 먹고 간 시장과 그곳에서 산 용과


하릴없이 거리를 배회하다 보면 다시 슬슬 배가 허전해졌다. 샌드위치인 샤오삥은 쌀밥에 비하면 역시 소화가 금방 됐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구글 지도에 간식 맛집을 엄청 저장해 뒀는데, 솔직히 고하자면 어디에서 간식을 먹을지까지 고려해서 아침 식사 장소를 선정했던 거였다. 그러니까, 나는 '먹으려고' 타이베이를 방랑하는 셈이었다.


출출한 타이베이의 오후를 책임져 준 간식은 두 가지 '삥'이었다. 먼저 하나는 빙수를 뜻하는 '빠오삥(刨冰)'으로, 겨울에 웬 빙수인가 싶지만 타이베이의 겨울은 쓸쓸하긴 해도 춥진 않아서 빙수를 먹는 게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게다가 얼음 위에 타로볼과 고구마 등 다양한 토핑을 얹고 흑설탕 시럽을 부은 대만의 빠오삥은 한국엔 없는, 여기에서만 먹을 수 있는 거였다. 그래서 일부러 더 열심히 찾아먹었다. 한국에 돌아가는 날 "빠오삥 한 그릇 더 먹었어야 했는데!" 하며 아쉽지 않도록.


대만식 빙수인 빠오삥(刨冰)


간식으로 자주 사 먹은 또 다른 삥은 '홍또우삥(紅豆餅)'이었다. 한국에선 홍두병으로 알려진 홍또우삥은 동그란 틀에 밀가루 반죽을 붓고 팥앙금이나 슈크림 등을 넣어 구운 것으로, 우리나라 붕어빵이랑 비슷하지만 피가 얇고 앙금이 더 많이 들어가서 두 배로 달콤한 간식이었다. 또한 이 홍또우삥은 침울한 겨울이 되니 더 심해진 '한국 가고 싶어 병(病)'을 치유해 주기도 했다. 엄마가 보고 싶다가도 갓 구워져 나온 뜨끈뜨끈한 홍또우삥을 혓바닥 데어가며 먹고 나면 기분이 좀 나아졌다. 나라는 인간은 단순한 동물이었다.


홍또우삥 굽는 모습과 슈크림 홍또우삥


아점 먹고 돌아다니다 간식 먹고 또 구경하다 보면 어느새 알바하러 갈 시간이었다. 사실 당시에는 얼마나 할 게 없어서 먹으러나 돌아다니는 내가 식탐 많은 돼지로 느껴졌다. 기껏 워킹홀리데이 하러 와놓고선 시간만 허비하고 있는 것 같았고, 이럴 거면 어학당 수업 한 학기 더 들을 걸 그랬나 후회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때는 그게 최선이었음을. 만약 그 겨울에 아침을 먹으러 나가지 않았더라면, 내가 먹는 걸 좋아하지 않았더라면, 자유가 숙제로 변해버린 시간을 어떻게 버텼을까? 높은 확률로 방구석에서 혼자 울다가 진즉 한국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현지인 친구랑 만나서 놀고 그 나라 언어를 공부해야만 워킹 홀리데이를 잘 보내는 건 아니다.

낯선 나라에서 밥을 먹고 거리를 배회하며 지루함을 견디는 그 모든 시간이 워킹 홀리데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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