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이가 생각나는, 신주 베이푸 라오지에

대만 워홀 생활기 시즌3#15

by 끼미


이번 주말엔 어디 갈까 구글 지도를 뒤적거리던 밤, 흥미로운 장소를 발견했다.


신주(新竹)시의 '베이푸(北埔) 라오지에(老街, 옛 거리)'.


대만의 민족 중 하나인 객가(客家, 하카)족의 전통을 체험할 수 있는 곳인데,

리뷰를 보니 한국인이 쓴 건 없고 대만 사람들이 올린 글 밖에 없었다.

게다가 경로 검색을 해보니 기차의 일종인 구간차(區間車)를 타야 한다고 했다.


'한국인들은 잘 모르는, 기차 타고 떠나는 대만 전통문화 투어'


당장 사이다랑 계란 챙겨!




기차보단 지하철 같았던 구간차

기차 여행에 한껏 설렜던 여행자는 우습게도 베이푸까지 가는 길에 지쳐버렸다. 무슨 환승을 이렇게나 많이 해야 하는지! 반차오역에서 기차 타고 신주역까지 간 다음, 신주역에서 지선 열차인 구간차로 갈아타고 주중(竹中)역으로, 주중역에서 다시 다른 기차로 환승한 뒤에야 주동(竹東)역에 도착했다. 심지어 그게 끝이 아니었다. 주동역에서 버스를 타고 15분 정도 달린 끝에 드디어 베이푸 라오지에에 도착했다. 중간에 신주역에서 아점을 안 먹었더라면 가는 길에 쓰러질 뻔했다.


고단하긴 했지만 기차 여행은 역시 왠지 모를 낭만이 있었다. 구간차는 기차라기보단 지하철과 비슷했는데, 짙은 녹색의 촌스러운 의자가 깔린 낡은 기차 내부는 마치 대만 전통을 찾아온 여행자를 위해 준비된 세트장 같았다. 조금 귀찮은 기차 환승은 예상치 못한 따뜻함을 선물해 주기도 했다. 역에서 헤매는 나에게 다정한 대만 분들이 다음 기차 타는 곳을 친절하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늘 느끼지만 대만 사람들은 참 친절하다.


베이푸 라오지에의 도교 사원과 상점가


집에서 나온 지 네 시간 반 만에 도착한 베이푸 라오지에. 이런 깊은 산속까지 누가 오나 싶었는데 웬열, 주말 나들이 온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다. 그중에서도 인구 밀도가 가장 높은 곳은 어느 가게 앞이었는데, 하카족의 전통 음료인 레이차(擂茶) 가루를 파는 곳이었다.


레이차는 콩이랑 율무 같은 곡식들을 갈아 만든 것으로, 미숫가루랑 비슷하지만 녹찻잎이 들어가서 녹색을 띠는 게 특이했다. 사람들이 시식하려고 줄 서 있길래 나도 꼽사리 껴서 기다렸다가 작은 종이컵에 담긴 시식용 레이차를 받았다. 처음 마셔보는 레이차. 따뜻하고 걸쭉한 레이차는 미숫가루 같은 구수함과 녹차의 쌉싸래함이 동시에 느껴졌는데, 둘의 조합이 생각보다 잘 어울렸다. 미숫가루와 녹차 둘 다 좋아하는 나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하는,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맛이었다. 레이차, 완전 내 취향이잖아!


사람들이 몇 봉지씩 왕창 사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하나 살까?' 싶었다. 하지만 저 많은 양을 다 마시려면... 한국 돌아갈 때까지 매일 레이차만 마셔야 할 것 같았다. 그러다 문득 부모님 생각이 났다. 엄마아빠도 미숫가루 좋아하는데 집에 좀 보내줄까. 한국까지 가는 길에 터지진 않으려나 고민하다가 꺼냈던 지갑을 다시 가방에 넣었다. 생각해 보니 엄마아빠는 녹차를 싫어했다.


다양한 곡물과 녹찻잎이 들어간 레이차


아쉬운 마음으로 뒤돌아 서는데, 앞에 있는 가게 안에서 사람들이 절구로 뭔가 열심히 갈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레이차 만들기 체험이었다. 오는 길에 이거야말로 찐 문화 체험이다 싶어서 찾아봤던 그 체험이었다. 당연히 하고 싶지만 기본 2인부터 시작인 데다 혼자 하기엔 비용도 좀 비쌌다. 어쩔 수 없이 남의 가족이 신나게 절구질하는 모습을 멀찍이서 구경만 했다. 나도 엄마아빠랑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생각하면서. 지금 보면 간 김에 비싸도 해볼 걸 그랬다. 언제 또 베이푸에 갈지도 모르는데, 그거 몇 푼 아낀다고 강남 아파트 살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레이차 만들기 체험 중인 남의 가족


베이푸 라오지에에는 레이차 외에도 다양한 음식들을 팔고 있었다. 레이차 체험은 못 해도 간식 하나는 사 먹어보자 싶어 고민하다가 역시나 사람들이 많이 사 가는 걸로 하나 골랐다. '客家菜包'. 뭔진 몰라도 '客家' 글자가 적힌 걸 보니 객가족 전통 음식인 것 같았다.


선택지는 세 가지. 하얀색은 플레인, 노란색은 호박(南瓜)과 죽순(竹筍), 녹색은 쑥(艾草), 이라고 똑똑한 파파고가 알려줬다. 딱 하나만 먹는다면 역시 독특한 거지, 하면서 쑥맛으로 하나 샀다.


감자떡처럼 생긴 차이빠오(菜包)는 식감도 쫄깃하고 쫀득해서 강원도에서 사 먹었던 감자떡이 생각났다. 다른 점이 있다면 안에 짭조름한 무말랭이 같은 게 들어있다는 거였는데, 채소(菜)를 감싸고(包) 있어서 이름이 '차이빠오'인 것 같았다. 떡에는 팥이나 깨 같은 달달한 앙금만 넣는 줄 알았던 한국인에게 차이빠오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잔잔한 쑥 향이 풍기는 차이빠오를 먹다 보니 엄마표 쑥떡이 생각났다. 매년 봄마다 엄마가 직접 뜯은 쑥으로 만들어 줬던,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쑥떡. 아무리 바빠도 쑥떡 좋아하는 딸래미 주려고 온 들판을 누볐을 엄마랑 이 맛있는 걸 같이 먹을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레이차만큼이나 한국에 보내주고 싶은, 할미 입맛 저격하는 쑥맛 차이빠오였다.


객가족의 전통 떡 '차이빠오'


엄마 생각에 한껏 아련해져서 거리를 둘러보는데 어디서 많이 본 주황색 물체가 보였다. 곶감이었다. 엄마가 좋아하는 곶감! 대만에도 곶감이 있다니, 반갑고 신기했다. 라오지에 여기저기 곶감 가게들이 많은 걸 보니 베이푸가 곶감으로 유명한 듯했다. 우리나라의 상주처럼. 대만 곶감은 어떤 맛인지 궁금했지만 상주 곶감도 그렇듯 가격이 꽤 비쌌고 시식해 볼 수 있는 곳도 없었다. 오동통한 곶감의 맛을 상상하다 보니 또다시 엄마가 보고 싶어졌다. 한국 돌아가면 우리 엄마 맛있는 곶감 사줘야지.


베이푸의 특산품인 곶감


대만 전통문화를 체험하고 싶어서 찾아갔던 베이푸 라오지에. 그 거리에서 왜 그리도 한국에 있는 엄마 아빠 생각이 났는지 모르겠다. 베이푸 가는 기차 타고 가면서 본 논이 시골에 있는 부모님 집을 떠올리게 해서였을까? 관광버스 타고 단체로 나들이 온 아버님 어머님들을 봐서? 음식 말곤 딱히 볼 건 없는 베이푸 라오지에에서 기대했던 객가족 문화를 배우진 못했지만, 당시에 내가 얼마나 가족을 그리워하고 있는지는 알 수 있었다.


가는 길은 험난하지만 언젠가 베이푸 라오지에에 다시 한번 가보고 싶다.

미숫가루와 쑥떡, 곶감을 좋아하는 엄마아빠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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