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그리고 같이, 대만의 크리스마스

대만 워홀 생활기 시즌3#16

by 끼미


2021년 12월, 어느덧 찾아온 한 해의 마지막 달과 함께 매우 진지한 걱정도 시작됐다.


'어쩌지... 크리스마스...?'


처음이었다. 혼자 보내는 크리스마스. 그것도 남의 나라에서. 가족도, 남자친구도, 친구도 없는.

음, 친구가 없었던 건 아니다. 대만 친구인 도리씨와 한국인 동생 J가 있었다.

하지만 크리스마스에 만나자고 선뜻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나보다 더 소중한 가족과 친구들이 있는 그들에게,

크리스마스라는 특별한 시간을 나와 보내달라는 건 염치없는 부탁이었다.


곳곳에 꾸며진 크리스마스 장식들을 마주칠 때마다 미래의 한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장면 속 인물은 크리스마스날 방 안에서 혼자 <해리포터>를 보고 있었다. 씁쓸한 타이완 비어를 마시며.


아...안돼....!!




불편해도 행복했던 크리스마스 이브


쉐하 문에 걸려 있던 크리스마스 리스 장식

오고야 만 12월 24일. 다행히 혼자가 아니었다. 한국인 동생 J가 본인이 사는 쉐어하우스에서 열리는 크리스마스 이브 파티에 초대해 준 것이다. 너무 신나서 웃음이 실실 나오는 소식이었다. 지난 타이중 여행 이후로 J와 멀어진 것 같아서 쭈그러 들어 있었는데 파티에 초대를 받다니. J와의 관계를 회복할 기회였다.


설레는 마음으로 도착한 J의 쉐어하우스 앞. 크리스마스 리스가 달린 문을 두드리며 생각했다.


'어쩌면 이 파티는 대만의 산타 할아버지가 주신 크리스마스 선물일지도 몰라.

오늘 J랑도 다시 잘해보고, J의 하우스 메이트들이랑도 친해져야지.'


J의 하우스 메이트들과 함께 한 크리스마스 이브 파티


그로부터 네 시간 후. 이브에서 크리스마스로 넘어간 새벽 1시의 텅 빈 거리. 버스가 끊겨 자전거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내 영혼은 탈탈탈 털려 있었다. 새 사람 만나는 건 역시 쉽지 않았다. 물론 J와 하우스 메이트들은 남의 집에 처음 온 내가 불편하지 않도록 잘 챙겨줬다. 파티답게 맛있는 음식을 나눠먹고 술도 한 잔하고 선물이 걸린 게임도 같이 했다. 그럼에도 내 마음은 썩 편치 않았다.


어찌 보면 당연했다. 한국에 있을 때도 낮아진 자존감 때문에 대인 관계가 어려웠는데, 대만에 온 뒤로는 중국어 잘 못한다는 심리적 위축감까지 더해지지 않았나. 말 한마디 할 때마다 괜히 눈치가 보이는데, 어떻게 처음 보는 이들과 친해질 수 있을까. J의 하우스 메이트들은 날 생각해서 쉬운 중국어로 천천히 얘기해 주는 도리씨도 아니었다. 쉼 없이 쏟아지는 알아들을 수 없는 중국어. 그 폭포 아래 앉아 있자니 예전에 J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하우스 메이트들이랑 같이 있어도 그들의 대화에 끼지 못해서 종종 소외감 느낀다던 J. 그의 심정이 십분 이해되는 파티였다.


긴장이 풀려 온몸이 축축 처졌지만 입꼬리만큼은 살짝 올라가 있었다. 새로운 대만 친구를 사귀진 못했어도 이번 파티에서 J와 다시 가까워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방에서 하메들에게 대접할 한국 요리로 콘치즈를 같이 만들고, 하메들 말이 너무 빠르다며 둘이 한국어로 얘기하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던 와중에 마음 편히 웃었던 순간. 오래도록 기억될, 따스한 추억.


이브에 혼자 있을 나를 위해 선뜻 자기 파티에 초대해 준 J.

그 다정한 마음 덕분에 영혼은 털려도 쓸쓸하진 않은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산타와 함께 한 크리스마스


역대급 인파였던 신베이시 크리스마스 축제


'와... 무슨 사람이 이렇게 많아... 너무 좋은데?!!'


12월 25일 저녁. 크리스마스 축제를 보러 타이베이의 이웃 도시인 신베이시의 시청 광장에 왔다. 쌍베이(타이베이와 신베이를 함께 일컫는 별명) 사람들 전부 여기 왔나 싶은, 대만 생활 7개월 만에 처음 경험하는 대규모 인파였다. 앞사람 발 뒤꿈치 밟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는 복작거림. 마음에 쏘옥 들었다. 양 사방에서 날 밀고 있는 인간 방패들이 외로움이라는 불청객이 날 찾아오지 못하도록 막아줄 테니까.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참으로 나약한 것이었다. 두터운 방패로 둘러싸여 흥겨운 축제 현장을 구경하면서도 마음속에선 실시간으로 쓸쓸함의 물결이 넘실넘실 댔다. 특히 레고 얼굴을 한 대형 산타와 그보다 더 큰 트리 앞에서 서로 사진을 찍어주는 사람들을 보는데 어찌나 서글펐는지. 나도 저 귀여운 산타 할아버지랑 찍고 싶었지만 찍어줄 사람이 없었다. 가족끼리, 연인끼리, 친구끼리 온 사람들 사이에서 혼자 셀카 찍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인증샷 남기고 싶은 욕심보다 처량하게 보이기 싫다는 반항심이 더 컸다.


어두워지니 더 운치 있었던 크리스마스 축제 현장


그랬던 나의 마음을 바꾼 곳이 있었으니, 진한 진달래빛의 꽃 장식과 전구들이 잔뜩 달려 있는 터널이었다. 마침 쓰고 간 일회용 마스크와 깔맞춤인 이 터널에서 사진을 찍는다면 그 누구라도 꽃으로 보일 것 같았다. 마침내 용기를 내기로 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카톡 프사는 건져야 했다. 누구에게 부탁할지 주변을 둘러보는데 까만 DSLR 카메라로 일행의 사진을 열정적으로 찍어주고 계시는 외국인 남성 분이 눈에 들어왔다. 왠지 저분이라면...


산타 할머니가 찍어주신 인증샷

역시 나의 촉이 맞았다. 마치 내가 본인의 일행인 것처럼 성심성의껏 사진을 찍어주신 그분 덕분에 남자친구가 찍어준 (것처럼 보이는) 크리스마스 인증샷을 남길 수 있었다. 그것도 하나 같이 다 마음에 드는 스무 장 넘는 사진들을. 이름도 나이도 모르는, 심지어 마스크 껴서 두 눈만 보이는 나를 위해 정성스러운 사진을 찍어주셨던 남성 분. 그분이 대만에서 만난 나의 산타 할아버지였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산타 할머니도 만났다. 터널 끝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길에 왠지 아쉬워서 서성이고 있는데, 어떤 여성 분이 사진 찍어 달라고 부탁하셨다. 나처럼 혼자 온 분이셨다. 똥손이지만 최대한 열심히 찍어드리고는 나도 그분께 슬쩍 내 폰을 내밀었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다시 건네받은 폰 사진첩에 엄청난 인생 사진이 남겨져 있었다. 이거다, 새로운 카톡 프사! 깐씨에(感謝, 감사합니다), 산타 할머니!


레고 산타들이 건네준 연말 인사


산타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만나고 다시 내려온 시청 광장. 6시 정각이 되자 시청사 건물 벽에 또 다른 산타가 등장했다. 레고 마을에 사는 산타 할아버지였다. 영상 속 노란 얼굴의 산타와 (아마도) 난쟁이들이 두 팔을 번쩍 들고 인사를 건넸다.


"MERRY CHRISTMAS! HAPPY NEW YEAR!"


크리스마스를 축하해 주는 걸로도 모자라 새해 인사도 미리 건네는 다정한 레고 인형들,

그들을 보며 웃고 있는 이곳의 모든 사람들,

이 크리스마스 축제를 기획하고 준비한 신베이시.

모두가 타지에서 홀로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나와 함께 해준 산타였다.



keyword
끼미 여행 분야 크리에이터 프로필
팔로워 247
이전 15화그리운 이가 생각나는, 신주 베이푸 라오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