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워홀 생활기 시즌3#11
누군가 ”타이베이에서 딱 한 곳만 갈 수 있다면 어디 갈래?“라고 물어온다면
나는 주저 없이 외칠 것이다.
”딴수웨이('단수이'의 중국어 발음)!“
단수이(淡水)는 나의 첫사랑이었다. 대만 워홀 오기 6년 전, 첫 해외여행으로 왔던 타이베이에서 나는 단수이에 반해버렸다. 자전거를 타고 단수이의 좁은 골목을 누비고 다녔던 어느 해 질 녘. 그날 나는 다짐했었다. 2년 뒤에 대학원 졸업하고 나면 꼭 대만에서, 단수이에서 살아보겠다고. 대학원 졸업은 못 했지만, 약속했던 2년보다 훨씬 오랜 세월이 지나 결국 오게 된 대만. 단수이의 넓은 바다는 6년 만에 돌아온 외지인을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타이베이에서 지낸 9개월 동안 족히 스무 번은 넘게 간 단수이. 노을 명소로 유명한 그 바닷가는 외로운 대만 워홀러의 휴식처였다. 갔던 데 또 가는 걸 싫어하는 나지만 단수이는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어떤 날은 고작 30분 앉아 있자고 왕복 두 시간 거리를 달려가기도 했다. 도대체 왜? ‘그냥 단수이가 좋아서’. 조금 시시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코로나 여파로 한적하고 차분한 평일 오후의 단수이는 천국이었다. 잔잔한 해수면 위로 펼쳐진 주홍빛과 분홍빛의 노을, 바람 타고 전해지는 바다의 짠내, 중국어라 알아들을 순 없지만 감미로운 버스킹 노래. 조용하고 행복한 꿈 속에 들어온 듯했다. 나처럼 혼자 온 사람들이 많다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연인과 친구 무리로 북적대는 서울 한강 공원과 달리 나홀로족 동지들이 많은 단수이에서는 외롭지도, 쓸쓸하지도 않았다.
단수이에는 바다만 있는 게 아니었다. ‘대만’이 있었다. 네덜란드를 비롯해 서양의 지배를 받았던 대만. 단수이에는 그 다사다난했던 역사를 엿볼 수 있는 유적지들이 있었다. 빨간 벽돌 건물이 인상적인 홍마오청(紅毛城), 바다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소백궁(小白宮), 언덕 위에 세워진 요새인 후웨이 포대(滬尾礮臺) 등. 대만의 역사가 궁금하지만 역사를 좋아하지 않는 나에게 단수이는 적당히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킬 수 있는 곳이었다.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았다는 뿌듯함과 마음에 드는 사진을 건졌다는 행복함도 함께.
단수이에서의 시간이 유달리 달콤했던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바로 단수이에 올 때마다 들린 내 최애 찻집이었다. 맛있는 차를 저렴한 가격으로 맛볼 수 있는 이 찻집은 진한 차를 좋아하는 내 입맛에 딱 맞는 곳이었다.
단수이 가는 길이 설렜던 건 이 찻집도 바다만큼이나 중요한 역할을 했다. MRT 안에서 다양한 차 이름이 적힌 메뉴판을 보며 ‘오늘은 어떤 차를 마시지?’ 하고 고민하다 보면 어느새 단수이 역이었으니까. 대만의 다양한 차 세계에 눈을 뜬 것도 단수이의 이 찻집 덕분이었다. 계화우롱, 동정우롱, 금훤차 등 생전 처음 들어보는 차들을 하나씩 마셔보면서 나도 몰랐던 내 취향을 알 수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지겨워졌던 타이베이 생활.
지루함이 파도처럼 밀려들 때마다 단수이를 찾아가 마음의 구멍을 메웠다.
사랑하는 바다와 흥미로운 역사, 향긋한 차 향기로.
그렇게 나는 단수이에서 타이베이와의 권태기를 견뎌냈다.
* 단수이의 최애 찻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