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워홀 생활기 시즌3#18
‘이 터널은 어디로 연결되는 거지?’
누군가 휘갈겨 쓴, 알아볼 수 없는 한자가 적힌 터널 입구.
이 터널을 다 빠져나가려면 얼마나 걸릴지, 그 끝에는 무엇이 있을지 전혀 알지 못했다.
무섭지만 그래도 들어가야 했다. 여기 오려고 자전거도 빌렸으니까.
동화 속에서 토끼 찾아 땅굴로 들어간 앨리스를 떠올리며 페달 위에 발을 올렸다.
일단 가보자고!
2022년 1월 3일. 새해 첫 여행으로 신베이시의 푸롱(福隆)역을 선택했다. 푸롱역은 지난 대만 최동단 탐험 후 대만식 도시락인 삐엔땅(便當) 먹으러 왔던 곳인데, 그때 보고야 말았던 것이다. 자전거에 삐엔땅 든 비닐봉지를 싣고 어딘가로 떠나는 사람들을.
알고 보니 푸롱은 자전거 일주 코스로 꽤나 유명한 곳이었다. 푸롱역에서 출발해 일제강점기 때 자원 운반용으로 쓰였다는 터널을 지나면 바다가 나오는데, 자전거 타고 달리는 해안 도로의 풍경이 예술이라고 했다.
자전거와 바다, 삐엔땅. 세 단어만으로도 이미 낭만 치사량이었다. 그래서 혼자 왔다. 아, 정확히 말하면 혼자는 아니었다. 푸롱역 앞에서 빌린 하늘색 자전거, 마찬가지로 역 앞에서 산 삐엔땅과 함께였으니까.
까만 백팩은 자전거 바구니에, 삐엔땅 든 분홍색 비닐봉지는 자전거 손잡이에 걸고 시골길을 달려와 터널 입구에 도착했다. 오늘도 빠질 수 없는 인증 사진을 남기고 어두운 터널 안으로 들어갔다. 대만에서 유명한 곳이라더니 왜 아무도 없을까, 불안해하면서.
불안감은 터널에 들어서는 순간 싹 사라졌다. 버려진 던전 같은 입구와 달리 터널 내부는 밝고 깨끗했다. 때마침 반대편에서 자전거 타고 오는 어느 가족이 보였다. 귀신이 나오진 않겠구나 싶어 안심이었다. 긴장을 푼 채 바닥에 남아 있는 철로의 흔적을 따라 달렸다. 내리막이어서 페달을 살살 밟아도 자전거가 앞으로 쭉쭉 나아갔다. 점점 신이 났다.
얼마나 많은 수레들과 사람들이 이 터널을 오갔을까, 나도 저 사람들처럼 친구랑 같이 왔으면 더 좋았을 텐데, 이런 생각들을 하며 달리는데, 익숙한 한자가 적힌 이정표가 나타났다.
신베이시(新北市), 이란현(宜蘭縣). 두 지역의 경계 지점이었다. 터널 안에서 만나니 왠지 더 특별하게 느껴지는 경계를 사진으로 남겼다. 나도 참 어쩔 수 없는 지리 전공자였다.
위치 에너지가 운동 에너지로 전환되는 짜릿함을 만끽하며 어둠 속을 달리다 보니 앞쪽에 밝은 빛이 나타났다. 과연 이 터널 끝에는 뭐가 있을까? 일부러 정보를 안 찾아보고 와서 터널을 빠져나가면 뭐가 튀어나올지 전혀 예상되지 않았다. 일단 가보면 알겠지. 그렇게 계속 빛을 향해 내달렸다. 앞으로, 앞으로.
“헐, 미쳤다...... 말이 돼......?”
알 수 없는 빛으로 몸을 던진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터널 끝에는 파란 하늘 그리고 푸른 바다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터널 들어가기 전엔 분명 시멘트색 하늘이었는데.. 이렇게 바로 바다가 나올 줄도 몰랐는데..! 터널 끝에 무엇이 있을지는 역시 터널을 빠져나와봐야 알 수 있었다. 새해 첫 여행부터 이렇게 감동적인 선물을 받다니, 남은 워홀을 잘 보낼 수 있겠다는 기분 좋은 예감이 들었다.
원래는 터널에서 이어지는 해안 도로까지 갈 생각은 없었다.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날 반겨주는 하늘과 바다를 보니 차마 모른 척 뒤돌아갈 순 없었다. 터널 출구에서 배가 홀라당 다 보이는 점프 샷을 찍은 다음, 어두운 터널로 돌아가는 대신 밝은 바다를 향해 계속 앞으로 달렸다. 네 시까지 자전거 반납하면 되니 그때까진 어떻게든 돌아갈 수 있겠지. 아마..도...?
1월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한적한 해안 자전거 도로를 달렸다. 저 먼바다에 귀산도(龜山島)가 떠 있었다. 이야, 남의 나라 섬 이름도 다 알고, 나 좀 기특한데? 혼자 뿌듯해하며 신나게 페달을 밟다 보니 벤치가 있는 휴식 장소가 등장했다. 드디어 때가 되었다. 삐엔땅 먹을 때!
벌써 오후 1시. 아침부터 빈속에 자전거 타느라 쓰러지는 줄 알았다. 나를 애타게 기다리던 삐엔땅은 싸늘하게 식은 지 오래였지만, 저번에 사 먹은 맞은편 가게보단 맛이 덜했지만 그래도 행복했다. 은빛 바다와 몽글몽글 구름, 따사로운 햇살이라는 천연 조미료가 살짝 부족한 맛을 채워줬다. 맑은 하늘 아래 드넓은 바다 보며 먹는 삐엔땅. 목이 매일 정도로 감동적이었다.
공룡 등뼈처럼 생긴 해안 지형과 그 위에서 낚시하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페달을 밟다 보니 어느새 2시 반이었다. 자전거 반납할 시간이 다가왔고 푸롱역까진 아직 한참 더 가야 했다. 더 이상 푸른 바다의 아름다움에 한가하게 취해있을 때가 아니었다. 중간에 간식으로 먹은 달콤한 흑임자 수삥(酥餅, 페스츄리)의 힘을 한껏 끌어올려 누구보다 빠르게 두 발을 굴렸다.
페달을 밟을수록, 두 허벅지가 땡겨올수록 머릿속이 점점 비워지는 게 느껴졌다. 온갖 생각들로 번잡하던 뇌 안에 '자전거 대여 추가금 절대 안 돼!'라는 생각과 '아, 시원하다!'는 후련함만 남아 있었다. 그 외 잡념들, 가령 '한 살 또 먹었는데 어떡하지?'나 '한국 가면 뭐 해먹고 살지?' 같은, 해봤자 도움 안 되는 걱정들은 바닷바람을 타고 훨훨 날아간 지 오래였다. 맞아, 이 맛에 자전거를 타는 거지.
문득 대만 오기 직전 서울에서 보낸 마지막 겨울이 생각났다. 당장이라도 한강에 뛰어들고 싶은 마음을 달래려 따릉이 타고 두세 시간 동안 강변을 달리며 버텼던, 어둡고 춥고 아무도 없는 터널 안에 혼자 갇혀 있다고 생각했던 그 겨울. 그때는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 도저히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이라도 계속 걷고 달리다 보면 출구가 나온다는 것을, 또 다른 터널이 이어질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그 숨 막히는 터널에선 빠져나올 수 있다는 것을, 그러면 다음 터널로 걸어 들어갈 힘이 생긴다는 것을.
여전히 터널 속에 갇힌 듯한 대만 워홀 생활.
이번 터널의 끝에는 뭐가 있을까? 끝까지 가봐야 알겠지?
그러니 일단 가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