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의 중심에서 집착을 외치다

대만 워홀 생활기 시즌3#19

by 끼미


2022년 1월의 둘째 주. 사장님께서 금요일에 쉬자고 하셔서 모처럼 3일이라는 긴 휴가를 얻었다. 타이베이에서 머언 곳으로 떠나고 싶었다. 아니 떠나야 했다! 고민 끝에 평소에 싫어하던 산에 가보기로 했다. 바다는 이젠 거기서 거기 같기도 하고, 새해가 됐으니 산에 가서 좋은 기운을 받아오고 싶기도 했다. 음.. 너무 나이 든 사람 같나?


그렇게 난터우현의 푸리(埔里)라는 곳으로 떠났다. 푸리는 대만의 대표 여행지인 일월담에서 아주 가까운 작은 산간 도시(사실 마을)로, 일월담이라는 강렬한 태양에 가려져 대만 사람들도 잘 모르는 변두리 동네였다.


게스트하우스도 몇 개 없는 이곳에 온 건 대만의 명산인 허환산(合歡山)에 가기 전에 하룻밤 묵기 위해서였다. 타이중에서 허환산으로 바로 갈 수도 있었지만 왠지 푸리에 가고 싶었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이름도 낯선 푸리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대만지리중심 표지석

타이중을 거쳐 도착한 푸리. 구글 지도를 보며 남은 하루를 어떻게 보낼까 고민하던 중에 소름 돋는 장소를 발견했다.


台灣地理中心(대만지리중심).


알고 보니 대만의 지리적 중심지가 이곳 푸리에 있었다. 그러니까 푸리는, 한반도의 국토정중앙점인 강원도 양구군 같은, 대만의 배꼽이었던 것이다. 하, 또 지리였다. 이놈의 지긋지긋한 지리!


더 지긋지긋한 건, ‘대만지리중심’이라고 적힌 표지석 하나 보려고 삐질삐질 땀 흘리며 걸어온 나 자신이었다. 최북단, 최동단에 이어 중심까지 왔으니 이제 최서단, 최남단만 가면 되겠다며 뿌듯하게 셀카 찍는 나.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지리 가르치기 싫다고 도망쳐 온 대만에서 뭐만 하면 지리를 떠올리다니. 지리가 좋아서 이러는 걸까, 아니면 집착하는 걸까?




산 정상으로 올라가면서 본 풍경


복잡한 마음을 안고 대만지리중심 비석에서 뒷산으로 연결된 도로를 걷기 시작했다. 구글 지도에 따르면 이 산 위에 또 다른 집착의 대상, 노을을 감상할 수 있는 스팟이 있다고 했다. 등산이라니 잠깐 고민했지만 중간에 내려오더라도 일단 가보기로 했다. 어차피 달리 갈 만한 곳도 없었다.


서서히 주홍빛으로 물들어가는 나무들을 구경하며 걸어 올라갔다. 생각보다 급한 경사에 조금만 걸었는데도 엉덩이가 땡겨 왔다. 이따금 오토바이 탄 연인들이 지나갈 때면 부러워서 배도 살살 아팠다. 난 오토바이도, 남자친구도 없는데, 흥! 그래도 나무 사이로 점점 아름답게 물드는 노을을 보며, 맞은편에서 혼자 걸어 내려오는 동지들을 보며, 씩씩하게 계속 걸었다.


푸리 분지가 한눈에 내다보이는 정상


뒤돌아 가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누르며 걸은 지 30분. 드디어 정상에 도착했다. 180도로 쫙 펼쳐진 넓은 잔디밭 위에 서 있는 사람들의 까만 실루엣, 그 뒤에서 은은하게 빛나고 있는 노을, 그 위의 광활한 보랏빛 하늘. 엉덩이의 통증이 단번에 사라지는 풍경이었다.


하늘과 좀 더 가까워지기 위해 언덕의 끝으로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산으로 둘러싸인, 넓고 평평한 푸리 분지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처음이었다. 한국지리 수업에서 수없이 나왔던, 침식 분지의 전경을 두 눈으로 직접 보는 게. 경이로웠다. 이 모습이 되기까지 저 산 위로 얼마나 많은 노을이 왔다 갔을까?


자연과 시간의 위대함을 생각하다 보니 하늘이 점점 어두워졌다. 아, 이럴 때가 아니지! 정신을 차리고 다급하게 삼각대를 꺼냈다. 잔디밭이 경사져서 삼각대가 자꾸 쓰러지긴 했지만, 연인들 사이에서 혼자 야단법석 떠는 게 쑥스럽긴 했지만, 부지런히 사진으로 남겼다. 고된 등산 끝에 찾아온 선물을 두 팔 활짝 들고 만끽하는, 하늘로 펄쩍 뛰어오르며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이 순간을 즐기는 나를.


지리에 집착하든, 노을에 집착하든, 뭐 어떤가.

그 집착들 덕분에 오늘도 선물을 받았는 걸!


내려오면서 본 푸리 분지의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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