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워홀 생활기 시즌3#20
2022년 1월 9일 저녁 6시, 타이중의 어느 훠궈 가게. 앙증맞은 냄비 안에 체다치즈빛 국물의 훠궈가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코로 크게 숨을 들이쉬니 콧구멍 가득 고소하고 달짝지근하면서 크리미한 우유 훠궈의 냄새가 들어찼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힘겹게 숟가락을 들고 국물을 떠 입안에 넣었다. 혓바닥에 전해지는 뜨끈한 국물. 눈물이 났다.
‘하, 이거 먹으려고 오늘 그 고생을....’
훠궈 먹기 12시간 전, 같은 날 새벽 6시 30분. 남색 하늘이 점점 노랗게 변신하고 있는 골목에서 길쭉한 딴삥(蛋餅)을 뜯어먹으며 생각했다.
‘진짜 갈 수 있을까, 허환산(合歡山)..?’
버스 타고 정상까지 갈 수 있다고는 하던데, 버스 노선이 여러 개라 과연 잘 찾아갈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그나저나 이 딴삥, 후추 맛 칼칼한 게 내 스타일이네. 흑미 맛 찐하게 나는 지미장(紫米漿)도 맛있고. 등산하려면 자고로 배부터 든든하게 채워야지!
걱정 한가득 안고 도착한 푸리 버스 정류장. 7시가 되자 허환산 꼭대기까지 가는 6658번 버스가 나타났다. 버스 회사 홈페이지에서 본 시간대로였다. 혹시 몰라 버스 기사님께 정상까지 가는 게 맞는지 확인까지 한 뒤에 기사님 바로 뒷자리에 앉았다. 일단 허환산에 갈 수 있다는 확신이 생기자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전날 허환산 갈 걱정에 잠을 설친 데다 그 와중에 딴삥 사 먹겠다고 5시 반에 일어났으니, 등산하기도 전에 피곤할 만했다.
푸리에서 출발한 지 두 시간 뒤. 구불구불한 산길을 당당하게 잘 달리던 버스가 점점 느려지더니 이윽고 멈추는 게 느껴졌다. 이른 아침임에도 버스 안을 가득 채운 승객들이 웅성대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사고라도 났나, 하며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런데...
응? 저게 뭐야....? 녹색 풀들 사이에 하얗게 덮여 있는 저거... 설마...
“哇, 下雪了(와, 눈 왔어)!”
뒷자리 승객이 말했다.
버스에서 내렸다. 아니 쫓겨났다. 버스 기사님 말씀에 따르면, 원래는 허환산 정상인 翠峰까지 더 가야 하지만 밤새 내린 눈 때문에 더 이상 버스가 올라갈 수가 없다고 했다. 그러니까 일단 여기서 내려서 구경하다가 나중에 시간 맞춰서 저 앞 정류장으로 내려가는 버스를 타러 오라고 하셨다.
내가 제대로 이해한 게 맞나 미심쩍었지만 내 중국어 실력을 믿고 일단 하차했다. 도로 위는 생각 이상으로 아수라장, 난장판, 야단법석이었다. 버스 앞뒤로 멈춰선 차들이 주욱 늘어서 있었고 그 사이로 두꺼운 패딩 입은 사람들이 걸어 다니고 있었다. 경찰차도 출동해 있었다. 도대체 이게 다 뭐람?
더 당황스러운 건 눈앞에 보이는 저 하얀 존재들이었다. 녹색 산사면을 덮고 있는, 갈색 나뭇가지 위에 맺혀 있는, 회색 돌무더기 위에 내려앉은, 하얀 것. 진짜 눈이었다. 슈에(雪).
눈이라니.
대만에 눈이라니.
겨울에도 영하로 떨어지지 않는 대만에서 눈을 보다니.
하필 내가 오기 전날 눈이 내렸다니...
꿈인가?
반쯤 멍한 상태로 사람들 뒤를 따라 걸었다. 관목 위에 하얗게 핀 눈꽃들과 바위 밑에 맺힌 기다란 고드름, 흰 모자를 쓴 소나무, 차 위에 놓인 귀여운 눈사람. 짙게 낀 안개를 뚫고 모든 게 하얗게,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저 눈 쌓인 봉우리 뒤에서 엘사가 드레스 자락 휘날리며 등장할 것만 같았다. 그야말로 눈부시게 황홀한 설경을 보고 있으니 입속에서 자동으로 이 말이 튀어 나왔다.
‘역시 그때 안 죽고 살아 있길 잘했다. 진짜.’
알바하는 식당에 드디어 허광한이 나타났을 때 했던 그 말이었다. 허광한과 허환산. 아무래도 허씨들과 인연이 있는 게 분명했다(당연히 둘의 한자는 다르다).
눈 덮인 언덕 앞에서 해맑게 웃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이건 어른이건 할 것 없이 다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진짜 산까지 못 올라가냐는 질문에 시달리는 경찰관들 제외하고). 사람들의 웃음소리를 듣고 있으니 내 마음도 콩닥콩닥 설렜다. 이들 중 누군가는 눈을 생전 처음으로 보는 걸지도 몰랐다. 겨울에도 영하로 안 내려가는 대만에선 이런 높은 산 아니면 눈이 안 올 테니까.
사실 나도 설산은 처음이었다. 가뜩이나 산을 안 좋아하는 내가 손가락 발가락 시리고 미끌거리고 위험한 겨울 산에 갈 리가 없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겨울왕국으로 변신한 허환산을 보니 아주 조금 후회됐다. 그동안 왜 겨울 산에 안 가봤을까, 내가 알던 겨울은 반쪽짜리였구나 하는 후회.
후회되는 게 또 하나 있었다. ‘나 왜 이렇게 입고 왔지?’
그나마 상체는 괜찮았다. 타이베이 겨울 무시하지 말라며 사장님께서 빌려주신, 사장님 따님 소유의 두툼한 패딩이 겨울왕국의 눈바람을 막아주고 있었다.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산에 가면 춥지 않을까 해서 호옥시나 하는 마음으로 입고 온 이 패딩이 동사를 막아주는 구명 패딩이 되어 줄 줄이야.
문제는 바지였다. 허환산이 이렇게나 추울 줄은 꿈에도 몰랐던 무지랭이는 통 큰 얇은 기모 바지만 달랑 입고 왔던 것이다. 게다가 양말도 하필 얇은 발목 양말! 설산의 칼바람이 불 때마다 두 다리의 신경이 마비되는 게 실시간으로 느껴졌다.
내려가는 버스 탈 때까지 남은 시간은 두 시간. 구글 지도를 찾아보니 걸어서 15분 정도 가면 카페가 있다고 했다. 갈까 말까, 고민됐다. 가자니 돈을 써야 하고, 안 가자니 당장 동사할 것 같았다. 결국 카페를 향해 점점 마비되고 있는 두 다리를 움직였다. 돈이고 뭐고 살고 봐야지.
허환산의 고도로 추정되는 숫자가 붙은 ‘3158카페’.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찾아갔지만, 막상 가보니 ‘돈이고 뭐고’라던 말이 쏙 들어갔다. 따뜻한 커피 한 잔이 무려 160위안(한화 약 6,700원)이었다. 160위안, 하산 후 저녁으로 먹을 훠궈와 비슷한 가격이었다.
당연히 목숨값치고는 저렴했다. 하지만 짠순이 워홀러의 소비 심리는 동사 직전의 발보다 더 꽁꽁 얼어붙어 있었던 터라 도저히 그 돈 내고 커피를 사 마시고 싶지 않았다. 몇 입 마시면 사라질 커피를! 차라리 양말이나 핫팩을 살까 머리 쥐어뜯으며 고민하다 카페에 파는 따뜻한 것 중에서 가장 저렴한 걸 샀다. 한 알에 10위안(약 400원)짜리 차예딴(茶葉蛋), 찻잎 넣고 간장에 졸인 계란이었다.
비닐봉지에 든 뜨거운 차예딴을 손에 쥐고 카페 한쪽에 놓인 테이블에 앉았다. 계란의 온기로 얼었던 손가락이 녹으며 찌릿찌릿 전기가 흘렀다. 이제야 좀 살 것 같았다. 계란 한 알을 왼손 오른손 번갈아 쥐어가며 몸을 데우고 있으니 점점 자괴감이 몰려 왔다.
‘돈 아낀답시고 계란 하나 들고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진짜 지지리 궁상이다. 한 살 더 먹어도 똑같네, 도대체 나는.’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를 향한 화살은 금방 멎었다. 대신 양손으로 차예딴을 꼬옥 쥐고 그 온기를 가만히 느꼈다. 따뜻했다. 행복했다. 살 것 같았다. 편의점에서 간편하게 사 먹던 차예딴이 내 목숨을 구해줄 줄이야. 지금 이 순간만큼은 차예딴 한 알이 다이아몬드 한 알보다 더 소중한 보물이었다.
핫 계란 한 알로 설산의 한기를 버텨낸 짠순이는 무사히 하산 후 훠궈를 먹었다. 160위안짜리 커피 대신 10위안짜리 차예딴을 선택하게 한, 200위안짜리 그 훠궈였다. 여전히 잘 움직여지지 않는 손으로 천천히 먹은 훠궈. 인생에서 가장 맛있고, 가장 짠내 나는 훠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