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원을 말해봐, 핑시(平溪) 천등제

대만 워홀 생활기 시즌3#25

by 끼미


버스 정류장에서 본 핑시 천등제 전단지

2022년 2월 4일 오후, 타이베이의 어느 버스 정류장에 서 있었다. 나를 타로 빙수 가게까지 데려다줄 버스는 언제 오려나~? 신나는 마음으로 기다리는데 문득 정류장 벽에 붙어 있는 분홍색 종이가 눈에 들어왔다. 다행히 아는 글자였다.


2022 平溪(핑시) 天燈節(천등제).


에, 천등제?

어학당 수업에서 지겹도록 나왔던, 등 날리고 소원 비는 그 티엔덩지에?

마침 생일도 며칠 안 남은 이 시점에 천등제를 한다니?!


어머, 이건 꼭 가야 해!





그로부터 일주일 후인 2월 12일 오후 3시 40분. 핑시 천등제가 열리는 핑시 라오지에로 가는 버스 안에 있었다. 메인 행사는 저녁 6시쯤 열리지만 차 막히기 전에 미리 가고 싶었다. 맛있는 지파이 가게도 있다던데 그것도 먹어야 하고! 8년 전 첫 대만 여행 때 왔었던 핑시. 지금은 어떤 모습일까?


궁금증을 안고 핑시 라오지에(老街, 옛 거리)에 내렸다. 부슬부슬 비가 오는 거리는 이미 인파로 가득했다. 소세지 파는 가게 앞에, 지나가는 기차를 코앞에서 볼 수 있는 철로 옆에, 천등 날리는 상점 안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사람들. 비가 와도 천등제를 보러 온, 반가운 동지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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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시 천등제를 즐기러 온 사람들


우산으로 앞사람을 찌르지 않도록 조심하며 핑시 라오지에를 구경했다. 걷다 보니 핑시 천등제 소개 공간이 나타났다. 약간 허술해 보이는 그 공간에는 핑시 천등제가 2011년부터 시작했다고 적혀 있었다. 예상보다 역사가 짧다고 생각하며 시작한 지 얼마나 됐나 계산해 봤더니 벌써 11년째였다. 세상에, 스물한 살이었던 2011년이 작년이 아니었단 말이야?! 마스크로 가려진 입꼬리가 살짝 내려갔다.


공간 한쪽에는 Wishing Wall, 소원 벽이 있었다. “너의 2022년을 말해봐(説説你的2022)”. 벽에 붙어 있는 포스트잇에 소원으로 추정되는 중국어들이 적혀 있었다. 이런 거 보면 손이 근질근질한 욕심쟁이는 주황색 포스트잇 위에 소원을 적기 시작했다.


쓰기 전에 잠시 고민했다. 대만 사람들처럼 중국어로 “身體健康 平平安安(건강하고 평안하게)” 같은 소원을 쓸까? 그러다 결국 한글로 썼다. 중국어 사이에 이상한 글자가 있으면 아무래도 더 많은 사람들이 쳐다볼 테고, 그럼 소원이 더 잘 이루어지지 않을까, 하는 관종의 마음으로. 벽에 붙이고 나니 역시 눈에 잘 띄는 한글을 보며 뿌듯한 마음으로 다시 거리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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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원 벽에 한글로 적어둔 나의 2022년 소원


천등제 행사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핑시 라오지에의 분위기는 점점 무르익고 있었다. 살짝 비가 오는데도 불구하고 곳곳에서 천등들이 하늘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뜨거운 공기로 빵빵해진 천등들이 지표와 점점 멀어지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8년 전 이곳에서 천등을 날렸던 게 떠올랐다. 대학원 입학 직전이라 무사히 석사 졸업하고 박사 유학까지 갈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었는데, 유학은 무슨 석사 졸업도... 역시 이런 건 다 상술이야!


2014년의 소원은 천등과 함께 우주로 날아가 버렸지만, 조금 전 소원 벽에 붙였던 2022년의 소원은 바로 실현됐다. 40여 분의 긴 기다림 끝에 먹은 지파이 덕분이었다. 핑시 라오지에의 명물이라는 이 지파이는 바삭한 닭튀김 위에 바질잎이 올려져 있고 머스터드와 칠리 소스, 와사비가 듬뿍 뿌려져 있었는데, 대만에서 먹은 지파이 중에 가장 독특하고 특이했다.


라오지에를 걸으며 회 접시째 비닐봉지에 든 지파이를 나무 꼬챙이로 한 조각씩 빼먹던 천등제의 저녁. “즐겁게, 행복하게”라는 새 소원이 벌써 이루어지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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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라오지에 곳곳에서 날아가던 천등 / (우) 핑시 라오지에의 명물인 지파이


지파이로 뱃속과 마음을 든든히 채우고 핑시 천등제의 메인 행사가 열리는 핑시 중학교로 향했다. 빗방울로 촉촉해진 도로를 걷는데 저 앞 하늘에 한 무리의 붉은 천등들이 승천하고 있는 게 보였다. 아니 벌써?! 지파이 먹은 힘을 짜내 발걸음 속도를 2배속으로 높였다. 조금만 기다려줘, 천등아!


엄청난 인파에 휩쓸려 떠밀리듯 들어선 행사장. 핑시가 속해 있는 행정구역인 신베이시의 시장님이 천등제 개최 축하 연설을 하고 있었다. 왠지 동질감이 들었다. 이런 행사에서 저런 분들이 한 말씀하는 건 한국이나 대만이나 똑같구나.


센스 있는 시장님의 짧은 연설이 끝나고, 진행자의 (중국어라 알아들을 수 없는) 멘트와 함께 웅장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드디어 천등 날리는 시간이 된 것이다. 황급히 휴대폰 카메라의 동영상 녹화를 누르고 운동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과 함께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


우(5)! 쓰(4)! 싼(3)! 얼(2)! 이(1)!


IMG_4605.jpg 까만 도화지 위로 아름답게 날아가던 천등들


검고 검은 하늘, 그 위로 빨갛고 노란 수십 개의 천등들이 동시에 떠올랐다. 느리면서도 빠르게 작아져 가는 천등들. 우아하고 아름다운 움직임이었다. 고개를 뒤로 바짝 젖히고 지켜보는데 마음 안에서 뭔가 올라오면서 코끝이 찡해졌다.


천등제에 오는 길에 무슨 소원을 빌지 계속 고민했었다. 하지만 막상 어둠 속으로 멀어져 가는 천등들을 보니 소원 같은 건 생각나지 않았다. 아니, 소원을 빌 필요가 없어졌다. 지금 이 순간, 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으니까. 감동에 푹 빠진 채 점점 작아지는 천등들을 멍하니 지켜봤다. 아무 생각도 말도 없이, 고요하고 고요하게.


그때, 포스트잇에 적었던 소원 한 줄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이제는 작은 점이 된 천등 위로 한국에 있는 가족과 친구들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같이 왔으면 더 좋았을 텐데. 아쉬운 마음을 담아 뒤늦게 속으로 소원을 빌었다.


'얼른 한국 돌아가서 다들 만나게 해 주세요.'


도망치듯 떠났던 그곳이 그리워진 핑시 천등제에서의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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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행사장 가는 길에 본 천등 / (우) 수많은 대만 사람들과 함께 했던 천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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