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베이에도 봄이 와요

대만 워홀 생활기 시즌3#28

by 끼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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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정기념당에서 샤오삥 먹으며 느낀 봄


화상 사고 다음 날 오전 10시, 중정기념당 내부의 벤치에 앉아 있었다. 왼손에 화상 습윤 밴드를 덕지덕지 붙인 채 아침밥을 먹었다. 메뉴는 또우장(豆漿, 콩물)과 샤오삥(燒餅, 대만식 샌드위치). 대만살이 9개월 차다운 아침 식사였다. 빨대로 고소 담백한 콩물을 쪽쪽 빨아먹으며 고개를 들자 맑고 파란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아, 따뜻하다.’


드디어 타이베이에 봄이 왔다.




징글징글하게도 오던 겨울비가 화상 사고 뒷날부터 자취를 감췄다. 이후 타이베이를 떠나기 전까지 열흘 동안 약간 흐린 날은 있었어도 비는 단 한 번도 오지 않았다. 신묘한 일이었다. 마치 타이베이의 하늘이 남은 시간 동안 잘 지내다 다른 곳에서 새 출발 하라며 응원하는 것 같았다. 자기가 봐도 매일 비 뿌린 건 너무 했던 걸까?


겨울비가 떠나자 다른 존재가 타이베이에 찾아왔다. 바로 봄꽃이었다. 중정기념당에서 아침 먹었던 날, 타이베이에서 처음으로 봄꽃을 만났다. 식사 후 공원을 산책하다 자줏빛 배롱나무 꽃과 분홍색 진달래를 본 것이다. 그저 날이 좋아 야외에서 밥 먹고 싶어 온 건데 꽃이 피어 있을 줄은. 전혀 예상치 못해 더 반가웠던 봄꽃과의 첫 만남은 화상으로 아팠던 지난밤의 기억을 말끔히 지워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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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정기념당에서 처음 본 봄꽃들


같은 날 오후, 튤립 축제를 보기 위해 스린 관저 공원(士林 官邸 公園)에 갔다. 이 축제 역시 어쩌다 보니 알게 됐는데, 축제 종료까지 이틀 밖에 안 남았길래 고민도 없이 달려갔다. 귀신같은 타이밍이었다. 타이베이의 봄을 실컷 느끼라고 온 우주가 도와주는 것만 같았다.


넓은 정원에는 튤립을 비롯해 다양한 꽃들이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북적거리는 사람들 사이를 천천히 걸으며 알록달록한 꽃들을 감상했다. 빨간색, 보라색, 노란색, 파란색, 자주색 등... 우중충한 잿빛 겨울을 지나고 만나니 더 따뜻한 봄빛이었다.


쌀쌀했던 마음을 더 따숩게 해 준 건 축제 현장에 같이 있던 사람들이었다. 튤립들 앞에서 웃으며 사진 찍는 사람들을 보니 마스크로 가린 내 입꼬리도 올라갔다. 이 또한 겨울과는 달랐다. 언제나처럼 혼자였지만 예전처럼 외롭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의 행복이 따뜻한 공기를 타고 내게도 전해지는 기분이었다. 날씨와 꽃이 사람 마음에 미치는 영향이 이렇게나 크다는 걸 튤립 축제에서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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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분위기가 물씬 느껴졌던 튤립 축제


봄바람과 함께 찾아온 3월. 새로운 달의 첫날에도 꽃 축제를 갔다. 이번 주인공은 장미였다. 축제는 타이베이 장미 정원(臺北 玫瑰園)에서 열렸는데, 아쉽게도 장미들이 이제 막 피기 시작해서 한 시간 만에 꽃놀이가 끝났다. 그래도 향긋한 향기를 맡으며, 색다르게 생긴 장미를 보며 짧지만 진한 행복을 누렸다. 튤립 축제와 달리 구경 온 사람들도 많지 않아 눈치 안 보고 장미랑 셀카도 찍을 수 있었다. 복작복작한 축제도 좋지만 한적한 것도 또 다른 장점이 있었다.


기분이 좋으니 땀이 나도 즐거웠다. 이날 기온이 27도나 됐는데, 반팔을 입었어도 이마에 땀이 맺힐 정도였다. 평소였으면 덥다고 투덜댔겠지만 장미 앞에서는 달랐다. 더위가 싫기는커녕 신기하게 느껴졌다. 역시 대만은 봄도 덥네, 그에 비하면 한국의 봄은 천국이구나, 하며 방금 닦았지만 그새 또 맺힌 땀을 가만히 느꼈다. 불평할 시간이 없었다. 봄에도 뜨거운 이 대만에서 지낼 날도 이제 두 달 밖에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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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의 더위와 함께 한 장미 축제


타이베이의 지루한 겨울을 견디고 드디어 만난, 선물 같은 봄.

그러나 타이베이는 고생한 워홀러를 위해 또 다른 선물을 준비해 두고 있었다.

꼭 한 번 다시 만나고 싶었던 그 사람과의 만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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