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워홀 생활기 시즌3#27
일 년의 대만 워킹홀리데이 중 가장 최악이었던 날. 그날은 왠지 기분이 싸했다. 생일로부터 열흘 뒤였던 어느 낮. 부슬비 맞으며 바다가 보이는 오르막을 오르고 있었다. 진녹색으로 덮인 해안 절벽과 그 옆의 청록빛 바다. 먹구름 낀 회색빛 하늘 아래서도 멋진 풍경이었다.
그러나 내 마음은 전혀 아름답지 않았다. 빗물에 젖은 운동화는 찝찝했고 스키니 청바지는 두 다리를 꽉 조여왔다. 미끄러운 흙길을 걷다가 몇 번이나 넘어질 뻔했다. 짜증 났다. 이 모든 상황 그리고 나 자신에게. 도대체 이 겨울비는 언제까지 오는 것이며, 나는 몇 살을 더 먹어야 착해질까?
번뇌로 가득 찬 상태로 저녁 알바를 갔다. 그리고 기어코 그 사달이 났다.
장장 여섯 달 동안 했던 한식당 서빙 알바. 가끔 하기 싫은 날도 있었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했다. 딱 한 번 배달 주문에서 파전을 빼먹을 뻔했던 것 말고는 크게 사고를 친 적도 없었다. 그렇게 걱정했던 것과 달리 워킹홀리데이의 워킹을 무사히 잘 마무리하는 줄 알았다.
비 내리는 바닷가 언덕을 다녀온 그날 저녁. 눅눅한 마음으로 일을 하고 있었다. 주방에서 손님이 주문한 순두부찌개가 완성돼 나왔다. 평소처럼 왼손으로 뚝배기 밑에 깔린 플라스틱 받침을 잡고 뚝배기를 들어 올렸다. 그 순간, 손목에 힘이 풀려 그대로 쥐고 있던 받침을 툭 놔버렸다. 뜨거운 찌개가 그대로 왼손을 덮쳤다. 아직 보글보글 끓고 있던 찌개가. 찰나에 벌어진 일이었다.
놀라서 달려오신 사장님께서는 얼른 찬물로 손부터 씻으라고 하셨다. 사장님께 죄송하다 말씀드리고 곧장 개수대로 가 찬물 틀고 왼손을 갖다 댔다. 손등이 화끈거렸다. 고통스러웠다. 찌개 국물의 열기가 눈으로도 전해진 건지 눈가도 뜨거웠다. 귓가엔 심장을 따끔거리게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딱 5일만 더 출근하면 되는데 끝끝내 사고를 치는구나. 자알 한다, 잘해.’
사장님이 주신 화상 연고를 바르고 끝까지 일했다. 사장님께 조퇴하면 안 되냐고 묻고 싶었지만 입을 꾹 다물고 일했다. 아프다고 엉엉 울고 싶은 마음과는 정반대로 행동했다.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뚝배기 드는 건 사장님이 도맡아 주신 덕분에 더 큰 사고 없이 퇴근했다. 어느덧 밤 9시. 대만보다 두 시간 빠른 한국은 11시였다. 집 가는 길에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루가 일찍 끝나는 시골에 사는 엄마는 이 시간에 처음 온 딸래미 전화에 놀라며 무슨 일이냐 물었다.
“엄마, 내 화상 입었어. 일하다가 뚝배기 떨자서 손 위에 다 쏟아졌다. 너무 아프다.”
“우야다가 그랬노. 병원은 갔나? 약은 발랐고? 엄청 쓰릴 낀데 마이 아프제”
속상해하는 엄마의 목소리를 들으니 이번에는 두 다리에 힘이 풀렸다. 어두운 길가에 쭈그리고 앉은 채 엄마에게 울면서 하소연했다. 사장님이 조퇴하라고 안 하셔서 아파죽겠는데 끝까지 일했다, 걱정도 별로 안 하시는 것 같았다, 역시 남의 엄마는 남의 엄마다, 하며 따가운 손으로 일하면서 쌓였던 서러움을 쏟아냈다. 서른두 살 어른이 아닌 네 살 아이가 되어서.
서운함을 성토하면서도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사장님이 잘해주신 건 쌔까맣게 잊어버리고 엄마한테 고자질하는 건 유치한 행동이라는 것을. 한 살 더 나이 들었으니 이제 성숙한 어른이 되겠다 다짐했던 생일이 불과 열흘 전이었건만, 자기가 사고 쳐놓고 남 원망하는 건 여전했다. 사장님은 필요한 조치를 해주셨는데 뭘 더 바라고 이러는지 스스로도 이해되지 않았다. 끌어안고 같이 울어주기라도 바라는 건지. 대만에서 보낸 일 년 중 최악의 순간이었다.
한국에 돌아온 지 3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내 왼손에는 순두부찌개가 만들어 준 흉터가 남아 있다. 매일 그날의 흔적을 보며 다짐한다. 왼손의 통증은 이제 기억도 안 나지만 사장님께 서운해하는 나를 바라보며 느꼈던 쓰라림은 여전히 생생하다고, 그러니 다시는 애꿎은 남 탓도 하지 말고 그러는 나를 미워하지도 말자고. 화상 입은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아픈데 굳이 마음까지 아프게 할 필요는 하나도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