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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끼미 Aug 17. 2024

내 우울증은 럭키비키 : 내가 나를 인정하기

철없는 사람의 철없는 생각

(자유 글쓰기#62)

2024.08.16 금 오후 10시 46분


어제 출신 대학교 커뮤니티에 글을 올렸다. 죽고 싶다는 생각이 다시 들었기 때문이다. 밖에 나가서 걸어도, 맛있는 저녁을 먹어도 사라지지 않는 우울감에 글을 썼다. 누구라도 내 얘기를 들어주길, 힘내라는 말을 해주길 바라며. 정신과도 안 가놓고 어쩌라는 거냐는 댓글도 있었지만, 필명 공개로 댓글을 달아주신 분이 계셨다. 본인도 우울한 저녁을 보내고 밖에서 서성이다가 집에 들어왔다고, 차 한 잔 같이 하고 싶다는 댓글이었다. 마침 누구든 만나서 얘기를 하고 싶었기에 쪽지를 보냈고, 오늘 저녁이나 다음 주 토요일에 만나자는 답장이 돌아왔다. 어제의 침울함이 오늘까지도 남아있었고 감사하다는 말을 만나서 전하고 싶었기에 오늘 저녁에 만나자고 했다. 그리고 방금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1시간 반 동안 대화를 나누며 나는 내 얘기를 하고 싶어 한다는 걸 또 한 번 발견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누가 나 대신 답을 내려줬으면 하는 기대가 깃들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이러이러한 삶을 살았고 지금은 이런데, 내일은 어떻게 할까?'라고 상대에게 묻고 싶은 것이다. 사실 누군가는 이미 나에게 대답을 해줬을지도 모르지만(실제로 그랬던 것 같다) 내가 원하는 대답을 못 들어서 여기저기 계속 묻는 것 같다. 내 선택에 대한 불확실성을 나 아닌 다른 사람이 해결해 주길 바라고 있다. 나는 지금 '그래, 지금처럼 살아도 돼. 그렇게 해봐.'라는 말을 해줄 누군가를 찾아 헤매고 있다. 그토록 외쳤던 '답은 내 안에 있다'라는 말을 진정으로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국 내가 나를 설득하지 못해서 이렇게 불안하다. 참 지독한 인정 욕구다.




그럼 나는 왜 타인의 인정을 바라는가? 그 인정이 꼭 '타인'의 인정이어야 하나? '나'의 인정은 안 되나? '내'가 힘들면 쉬면 되는 거 아닌가? 지금 '내'가 글 쓰고 싶으면 그렇게 살면 되는 거 아닌가? 누가 일 쉰 지 네 달 됐으면 다시 일해야 한다고, 누가 과거에 그만 집착하고 미래를 찾아야 한다고 말하는 거지? 도대체 누가? 사실은 '그 '누구'는 '나'인 건 아닌가?


지금까지 내 인생은 실패했어도 최선을 다했다. 임용시험은 떨어졌어도 학교에서 일하는 동안 잘 가르친다는, 일 잘한다는 평가를 받았고, 제빵 일에도 도전해서 어쨌거나 현장에서 8개월을 버텼다. 대만에서도 1년을 버티고 대만 한 바퀴도 돌고 왔다. 중국어 자격증은 없어도 혼자 배운 중국어로 일상 대화는 할 줄 안다. 대만 경험으로 글도 쓰고 있다. 말로만 하는 게 아니라 진짜 쓰고 있다. 그것도 최선을 다해서. 돈은 못 벌어도 매일 나가서 걷고 글을 쓰고 책을 읽고 영어 공부도 하고 때맞춰 끼니도 챙겨 먹고 집도 깨끗하게 유지하면서 산다. 백수여도 하루 일과가 있고 충실히 이행하며 살고 있다. 그럼 된 거 아닌가? 돈 못 벌어도 죽는 것보다는 낫지 않나? 죽으면 돈이 무슨 소용인가.


나는 하고 싶은 게 생기면 하는 사람이라는 걸 누구보다 내가 잘 안다. 실패할지언정 미룬 거나 안 한 적은 없다. 하고 싶으면 했다. 그런 사람이 지금 글 쓰는 것 말곤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는 건 진실로 그렇기 때문이다. 마음이 동하면 실천에 옮기고 어떻게든 어느 정도의 수준까지는 해낸다. 최고의 수준은 아니어도 10점에 7점 정도까지는 할 수 있다.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완전 폭삭 망한 적은 없다. 뛰어나진 않아도 폭망은 안 했다. 망했다 하더라도 죽을 이유 하나도 없다. 하고 싶은 일 천천히 찾아도 된다. 족치지 말자. 뭐든 생기면 잠을 안 자고서라도 최선을 다할 테니까. '완벽하게', '누구보다 뛰어나게', '빠르게'만 바라지 말자.


그러니 지금은 일단 글을 쓰자. 내가 재밌고 내가 진심으로 하고 있는 이 일을 하자. 죽으면 글이고 뭐고 못 쓴다. 죽더라도 이 글들을 다 쓸 때까지는 살고, 최선을 다해서 글을 쓰자. '내'가 행복한 방법이라면 그러면 됐다. 지금 나는 '잘' 사는 것보다 '사는' 게 먼저다.




그러고 보면 내 우울증이 요즘 말로 '완전 럭키비키'다. 죽고 싶어서 대만에 갔고(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랬나 싶다), 가서도 우울해서 한국 친구들의 소중함을 다시 느꼈고, 코로나가 심해져서 포장만 가능했기에 중국어 잘 못해도 한식당 알바를 쉽게 얻었고 그래서 허광한도 만났다(그야말로 럭키). 대만 친구를 많이 못 사귀었어도 혼자 가고 싶은 곳 다 가봤고, 혼자 먹고 싶은 거 찾아먹으러 다녀서 지금 브런치북도 연재하고 있고, 대만에서 빵집만 보면 들어가는 나를 발견해서 제빵 일을 배웠고, 빵집을 그만둬서 이 자유 글쓰기도 시작했고 가족이랑 시간도 보냈고 대만 에세이를 쓰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어제 죽고 싶었고 그래서 글을 올렸기에 평생 만날 일 없을 선배님을 오늘 만났다. 우울증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


의미 없는 자기 위로일지라도 살아 있어서 가능한 거다. 뭐든 죽는 것보다는 낫다. 오늘 저녁에 먹은 참치와사비김밥도 어제 안 죽고 살아 있어서 먹은 거다. 참치김밥 먹은 힘으로 지금 이 글도 쓰고 있다. 그러니 맛있는 걸 먹자. 힘이 나게, 잠시라도 기분 좋게. 돈 못 버는 백수면, 이 나이에 전 재산이 2천만 원뿐이면 2만 원짜리 초밥 사 먹을 가치도 없다고 누가 정해놨나. '내'가 먹고 싶으면 먹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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