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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끼미 Aug 22. 2024

그놈의 '대만' 음식이 뭐라고

대만 워홀 생활기 시즌1#09

“처음엔 대만까지 와서 대만 음식 안 먹고 뭐 하는 건가 싶긴 했는데,
잠깐 여행 온 것도 아니고 몇 달은 살다가 가야 하니깐
내 방식대로 집밥 잘 챙겨먹는 게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군다나 코시국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니, 집에서 밥 해먹으면서 잘 버텨야지."

2021년 7월 10일 토요일의 블로그 일기





아침 시장에 다녀오면 대개 11시에서 12시 사이였다. 집에 와서 땀범벅이 된 몸부터 씻고 선풍기 앞에 앉아 머리카락을 말리다 보면 배에서 신호가 왔다. 


‘배고픈데 뭐 먹지?’ 


코로나로 식당 취식이 금지된 상황에서 밥을 먹을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식당에서 포장해오거나 집에서 만들어 먹거나('안 먹기'나 '대충 떼우기'는 애초에 선택지에 없었다). 사실 그렇게 원하는 ‘대만 온 기분’을 내려면 포장을 해와서 먹어야 했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식당 취식 금지 조치로 영업하는 가게들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문 연 식당들도 몇 있긴 했지만 굳이 사 먹고 싶지 않기도 했다. 이왕 돈 쓸 거면 나중에 식당 취식이 가능해지면 쓰고 싶었다. 대만 사람들 가득 있는 식당에 앉아 방금 만든 따끈한 대만 음식을 먹는 그 기쁨을 온전히 누리고 싶었다.


이런 이유로 식당 취식 금지가 풀리기 전까지는 주로 집에서 밥을 해먹었다. 서울에서 자취할 때도 혼자 외식하거나 배달시켜 먹는 일은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돈을 아끼기 위해서였기도 했고 다이어트를 하기 위한 것도 있었다. 무엇보다 요리 하는 것 자체가 좋았다. 대만에 오기 전 뜻대로 되지 않는 지난 몇 년을 보내는 동안 요리는 내게 해방감을 느끼게 해주었다. 채소를 씻고 칼질을 하고 주걱으로 볶고 접시에 담고 먹고 설거지를 하는 그 시간만큼은 모든 걸 잊고 내 두 손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나에겐 자유와도 같았던 요리라는 행위는 대만에 와서도 나의 숨구멍이 되어 주었다.




그렇다고 거창한 요리를 만들어 먹은 건 아니었다. 에어컨이 없어 3분만 서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부엌에서 불을 켜서 요리하는 건 쉽지 않았다. 그래서 불을 많이 써도 되지 않아도 되는 볶음 요리를 주로 해먹었다. 있는 재료 넣고 휘리릭 볶기만 하면 금방 완성되는 볶음 요리. 새우와 우동면을 넣으면 새우볶음우동, 삼겹살과 밥을 볶으면 삼겹살 볶음밥이 되니 만들 수 있는 메뉴도 무궁무진했다. 똑같은 메뉴를 먹는 걸 싫어하고 다양한 재료를 넣어먹는 걸 좋아하는 내게 그야말로 딱인 요리법이었다. 


볶음 요리는 집에서 '대만 맛'을 느낄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다. 마트에서 사온 대만 소세지와 마라장을 넣고 밥과 함께 볶으면 그게 바로 대만식 볶음밥이었고, 아침 시장에서 사온 피쉬볼에 토마토 소스를 넣고 볶으면 대만식 피쉬볼 토마토 볶음이었다. 물론 그저 내 마음대로 만든 것이기에 '진짜' 대만 요리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대만의 식재료가 들어갔으니 대만'식' 요리라고 애써 우기며 맛있게 먹었다. 

만들어 먹었던 대만'식' 볶음 요리들


가끔은 '진짜' 대만 음식을 사와서 먹기도 했다. 아침 시장에 가면 량미엔(涼麵)이라는 대만식 비빔면을 파는 할머니가 계셨는데, 고소한 땅콩 소스 맛이 할미 입맛을 가진 나에게 딱이었다. 면 자체도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뿔지 않아 포장해와서 먹기도 좋았다. 맛도 있는 데다 나에게 허락된 몇 안 되는 '진짜' 대만 음식이었기에 일주일에 한 번은 시장에서 사온 량미엔으로 점심을 해결했다. 


마트에서도 가급적 '대만 맛'을 느낄 수 있는 가공 식품들을 사먹었다. 만두도 그냥 고기 만두 대신 마라맛 만두를, 찐빵도 한국 마트에선 못 본 흑임자 찐빵을, 한국에도 있는 돈까스 대신 대만식 돼지갈비인 파이구(排骨)를 골랐다. 대만 마트에도 한국 라면이며 김치며 많이 파는 탓에 마트에 갈 때마다 한국 음식이 먹고 싶었지만 최대한 참고 '대만스러운 대만 음식'을 사왔다. 식당에서 밥 사먹는 것도, 어디 여행 가는 것도 불가능한 이 시기에 대만을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아침 시장에서 사온 량미엔(涼麵)과 마트표 마라맛 만두로 만든 만둣국
마트표 대만 음식들로 차려 먹은 집밥




그렇게 부지런히 '대만 맛'을 찾아 집밥을 해 먹던 어느 날, 문득 이런 의문이 들었다. 


'대만에 왔다고 해서 꼭 대만 음식만 먹어야 하나?'


어느 순간 지나칠 정도로 '대만 음식'에 집착하는 내 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원래도 먹는 걸 정말 좋아하긴 하지만,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우육면 실컷 먹을 생각으로 왔더니 정부가 식당에서 밥도 못 먹게 해서 억울한 마음에 그런 듯했다. 하지만 나에겐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다. 이제 겨우 대만에 온 지 2달째였다. 어떻게든 대만 음식을 먹어야 한다며 조급해 할 필요가 없었다. 내가 대만 워홀을 온 건 대만에서 '살기 위해서'였지, 대만 음식을 먹으러 온 것이 아니었다. 식당에서 먹는 훠궈든 내 멋대로 만든 대만'식' 볶음면이든 맛있게 먹으면 그뿐이었다. 이런 생각이 들자 '대만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집착을 조금은 내려놓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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