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워홀 생활기 시즌1#16
셔터를 연 가게보다 내린 가게들이 더 많던 타이베이의 거리에 집에 숨어있던 사람들이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답답하던 내 마음에도 희망의 빛이 조금씩 들어오고 있었다.
2021년 5월 말부터 7월 초까지는 타이베이의 어디를 가나 사람 대신 공허함만 가득했다. 초반에는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것조차 괜스레 눈치가 보였지만 야외니까, 마스크 꼈으니까 괜찮겠지 하며 점점 타이베이의 중심부로 외출을 감행했다. 바람을 쐬기 위함도 있었지만 가장 큰 목적은 대만 사람들의 동태를 살피는 것이었다. 길에 사람들이 얼마나 돌아다니는지를 살펴보며 이 코시국이 언제쯤 끝날지 짐작해 보았다. 마치 백성들의 안위를 살피기 위해 잠행하는 왕처럼.
이대로 죽은 도시가 될 것만 같던 타이베이에도 7월 중순부터 미묘한 변화가 느껴졌다. 하메 생일 선물을 사기 위해 동먼역으로 갔던 어느 일요일, 하메가 맛있다고 했던 세인트피터의 커피맛 누가 크래커를 사고 다안 공원에 갔다가 근처에서 저녁으로 먹을 치즈 감자도 산 뒤 신나는 마음으로 공관역으로 걸어갔다. 지난 주말에도 산책하러 왔던 공관역. 그런데 그곳에서 신기한 광경을 봤다. 도로에 차가 밀리고 있었다!
원래도 타이베이의 다른 곳에 비하면 사람들이 많이 다니긴 했지만 지난주 일요일과는 공기부터 달랐다. 이차선 도로에는 멈춰버린 차들이 늘어서 있었고 보도에도 가족이며 연인이며 친구며 놀러 나온 사람들이 많았다. 대만에 온 이후 두 달 만에 처음으로 보는 ‘북적거리는' 타이베이였다.
그로부터 이틀 뒤, 더 신기한 일이 있었다. 타이베이역 인근의 대도정마두(大稻埕碼頭)에 간 날이었다. 대도정마두는 한국에선 비교적 덜 알려진 현지인들의 노을 스팟으로, 전날 밤에 구글 지도를 보며 어디 갈 곳 없나 하다 발견한 곳이었다. 보통 혼자서도 잘 다니지만 노을만큼은 혼자 보고 싶지 않았기에 하메의 한국인 친구 J에게 연락을 해서 타이베이역에서 만났고, 두 시간 뒤에 과외 마치고 온 하메도 합류해 셋이 대도정마두 쪽으로 향했다. 무더위 속에서 20여 분을 걸어 굴다리를 지나니 저 멀리 강이 보이기 시작했다. 강 쪽으로 좀 더 다가가자 눈앞에 기적이 나타났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동안 내가 봤던 노을은 노을이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내 눈앞의 이 노을은 노을이 아닐지도 몰랐다. 일곱 빛깔 무지개만큼이나 다채로웠기 때문이다. 31년 살면서 본 노을 중에 가장 아름답고 가장 꿈 같고 가장 그림 같은 노을이었다.
마치 프리즘을 투과한 햇빛처럼 형형색색으로 물든 노을, 몸을 스치는 선선한 바람, 귀여운 풀벌레 소리, 옆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대화 소리. 옆에 하메와 하메 친구가 있었지만 잠시 아무 말 없이 가만히 강 건너편만 바라봤다. 몇 마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밀려드는 걸 느끼면서.
기적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니 컨테이너로 된 식당들이 있고 식당과 강변 사이에 테이블과 의자들이 깔려 있었는데, 사람들이 앉지 못하도록 칭칭 둘러놓은 테이프를 걷어내고 거기에 앉아 있었다. 그것도 마스크까지 내리고, 심지어 뭔가를 먹으면서! 순간 ‘이거 신고감 아니야?’ 싶었다가 아차 싶었다. 여긴 ‘야외’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마스크를 끼든 벗든, 밥을 먹든 말든 정부의 ‘식당 내부 취식 금지’ 조치로부터 자유로운 곳이었다!
갑자기 테이블에 앉아서 술과 피자를 즐기고 있는 사람들이 얄미워 보였다. 이 좋은 곳을 자기들끼리만 즐기고 있었다니! 진작 알려줬으면 저녁마다 혼자 방구석에서 한국 가고 싶다고 울지 않았을 텐데! 괜히 억울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래도 행복했다. 지금이라도 안 게 어디야!
방역 지침 위반으로 신고하는 대신 강가 쪽의 빈자리로 냉큼 달려가 앉았다. 우버이츠로 시킨 패션후르츠(백향과) 음료를 마시며 달달한 쩐쭈(펄)와 코코넛 젤리를 씹었다. 화려했던 노을은 점차 남색으로 물들기 시작했고 그 앞의 건물과 도로에는 주황빛 조명이 하나 둘 켜졌다.
양옆에서 들리는 알아들을 수 없는 중국어, 뒤에서 들려오는 노랫소리, 아름다운 자연 빛과 인공 빛이 하나가 되어 살랑이는 물결, 어느새 밤하늘에 나타난 하얀 반달, 그리고 이 감동을 한국어로 함께 나누는 하메와 하메 친구. 대만에 온 지 두 달 만에 느꼈던 이 날의 자유는 당도 50%의 패션후르츠 음료보다 달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