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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끼미 Sep 19. 2024

사소하지만 큰 행복들

대만 워홀 생활기 시즌1#17

대도정마두(大稻埕碼頭)에서 마스크를 내리고 술을 마시고 떠드는 사람들을 봤던 2021년 7월 중순의 어느 저녁, 그날의 외출로 지긋지긋한 코로나 시국이 끝나가고 있다는 희망이 생겼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대만 정부는 여전히 엄격한 방역 지침을 고수하며 쉬이 자유를 허락해주지 않았다. 끝이 보일듯 보이지 않는 긴 터널 속에서 나를 버티게 해준 건 아주 사소한 행복들이었다.




2021년 7월 16일

아침에도 8천보 걷고 저녁에 또 엄청 걸었더니 골반이 아팠다. 그래서 자전거 빌려서 집 완전 근처는 아닌 곳까지 타고 왔다. 사실 집 근처에도 반납하는 곳이 있는데 왠지 나머지 길은 걸어가고 싶었다. 아마 냥이를 만나려고 그랬나보다. 물 다 먹은 냥이가 나를 발견하고는 나한테 왔다. 몇 번 봤다고 알아보는 걸까? 오늘따라 쓰담쓰담을 즐기시길래 계속계속 쓰담쓰담해줬다. 특히 이마랑 턱 만져주니 눈까지 감고 아주 느긋하게 즐기더라. 사실 이때 배가 너무 고팠는데, 얘랑 있으니 행복해서 고픈 배를 부여잡고 한참 같이 있었다. 덕분에 온종일 우울했던 기분이 조금은 따뜻하고 행복해졌다. 근데 얘 이름은 뭘까? 한국 이름도 하나 지어줄까보다 이참에.



2021년 7월 18일 

오늘은 산책 나가는 순간부터 골반이 아파서 정말 천천히 아주 느리게 걸었다. 한 시간 정도 걷고 바로 집으로 돌아올까 하다가 오는 길에 눈 여겨봤던 찻집 武林茶에서 차를 사봤다. '膠原舞Q'라고 하는 메뉴인데, 사계춘(四季春) 우롱티 베이스에 까만 쩐쭈, 하얀 쩐쭈, 코코넛 젤리, 콜라겐이 들어있었다. 지금까지 마셔본 우롱티는 나무껍질향 나는 게 전부였는데, 이 사계춘은 달콤한 꽃향기가 은은하게 나서 한입 마실 때마다 기분이 좋아졌다. 한자가 어려워서 고민하다가 파파고의 힘을 빌려 본 건데 역시 도전하길 잘했다. 쪽팔려도 용기낸 나 자신 기특해!



2021년 7월 23일

옆동네 산책 갔다가 대만에 이런 계란빵 많이 팔길래 궁금해서 사먹어봤다. 처음엔 오레오 2개 사려고 했는데 사장님이 4개 사면 더 싼데 그래도 2개 할거냐고 해서 그럼 4개 하겠다고 했다. 무슨 맛을 더 할지 고민하다가 용기 내서 떨리는 목소리로 사장님께 추천해달라고 했더니 옥수수 치즈맛을 추천해주셨다. 귀여운 멍멍쓰 발바닥 모양! 냄새부터 너무 맛있어서 집 오다가 못 참고 결국 한입 먹었다. 계란빵보단 핫케이크 맛인데 너무 맛있었다! 아, 내가 빵수니라 다행이다. 가게에서 우육면은 못 사 먹어도 빵만 있으면 행복하니까!



2021년 7월 28일

타이베이역 근처의 요즘 핫하다는 밀크티 집에서 밀크티 한 잔을 사고 타이베이역 지하상가로 왔다. 근데 마땅히 앉을 만한 곳이 없었고 또 마스크 내리고 마시는 게 눈치 보여서 사람들 잘 안 다니는 계단에 숨어들었다. 윗층에서 사람들이 가끔 내려와서 심장 쫄리긴 했지만 스릴 넘치는 이 상황이 웃겼다. 코로나 때문에 별 걸 다 해본다 정말. 보통 50위안 하는 밀크티랑 비교해서 이 집의 밀크티는 75위안이나 해서 큰 맘 먹고 산 건데, 다행히 찻잎 향이 진하게 나고 쩐쭈도 정말 쫄깃쫄깃했다. 지금까지 살면서 먹어본 밀크티 중에 제~일 맛있었다! 역시 비싼 게 맛있구나. 대만 오고 난 후로 돈 아껴야 한다는 생각에 스트레스 받고 있었는데 가끔은 이렇게 더 좋은 것도 사먹어야겠다. 나를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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