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아이들의 교실에는 차별이 없겠지요!
저녁밥을 먹고 난 후에 나는 컴퓨터 앞에 앉아 인터넷 뉴스를 읽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초등학교 5학년에 올라가는 아들 녀석이 불쑥 종이 한 장을 내밉니다. 바로 새 학년이 시작될 때마다 연례행사로 되풀이되는 '가정환경조사서'입니다.
아들이 내민 종이에는 '기초환경조사서'란 타이틀에 학생의 인적사항, 보호자 및 가족의 생년월일, 직업, 종교를 기재하는 난이 있고, 그 밖에도 학생의 취미, 성격, 나의 장래희망, 부모님이 바라는 장래희망, 교사에게 바라는 요망사항, 건강상태 등을 기재하는 난이 있습니다.
아들은 장래희망이 '선생님'이라고 하는데, '부모가 바라는 장래희망'에 우리 부부는 '아들이 하고 싶은 일'이라고 기재해 두었습니다. 또 '교사에게 바라는 요망사항'에는 역시 "모든 것을 선생님께 맡기겠습니다."라고 적었습니다.
'건강상태' 난에는 "양호합니다만 아토피성피부염이 있습니다."라고 쓰고는, 지난 학기 체육시간에 나일론 소재의 체육복을 입혀서 고생한 적이 있었으므로 "이번 학기에는 면으로 만든 체육복을 구해서 입혔으면 좋겠습니다."라고 첨언했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난이 있습니다. 바로 수강하는 학원 이름이 세 칸이나 마련되어 있습니다. 아마 대부분의 초등학생들이 두어 군데의 학원을 다닌다는 얘기겠지요. 마음껏 뛰어놀아야 할 시기의 우리 아들도 학원에 보내고 있어서, 나는 슬며시 아들에게 미안해집니다. 학원에 보내지 않으면 괜히 뒤처질 것 같은 조바심이 아이의 자유를 억압하는 구실이 되었나 봅니다.
"아버지께서 학교 다닐 때도 이런 조사를 했어요?"
"그래. 아버지는 국민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계속 이런 조사서를 작성했단다. 재산상황에는 집이 전세인지, 자기 집인지, 자기 집이면 초가집인지, 기와집인지, 논밭은 또 얼마나 있는지, 가계의 월소득은 얼마인지 등의 항목을 구체적으로 적도록 되어 있었단다. 또 살림살이를 조사하기도 했는데, 피아노가 있는지, 세탁기가 있는지, 텔레비전이 있는지, 심지어 전화기가 백색전화기인지 청색전화기인지도 조사를 했단다."
"전화기 색깔까지 조사를 했다고요?"
"응. 전화기 색깔로 구분한 것이 아니고, 백색전화기는 다른 사람에게 팔 수도 있는 전화를 말하고, 청색전화기는 사용만 가능한 전화였단다."
"왜 그렇게 자세히 조사를 했어요?"
"아마 그것은 선생님들이 학생들의 환경을 잘 파악함으로써, 보다 효과적으로 학생을 지도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겠지."
나는 문득 아픈 기억이 떠오릅니다. 국민학교 때 '무학'인 부모님들의 학력 난을 모두 '국졸'로, 위의 일곱 형제가 모두 '국졸'이거나 '중졸'인데도 '고졸'로 기재했습니다. 또 가정형편을 조사하는 항목에는 누가 보아도 하(下) 중에서도 하(下)인 우리 집 형편을 '중'으로 항상 적었습니다. 그때만 생각하면 왜 이리 불에 덴 듯이 가슴이 화끈거리고 쓰라릴까요?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 막내형님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수야! 만약에 네가 친구들과 가다가 막노동을 하고 있는 형님을 만났다고 하자. 그러면 너는 모른 척 하려느냐?"
나는 절대 그러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항상 가슴속에는 그때의 부끄러움이 남아 있었습니다.
나는 다시 생각해 봅니다. 공문서에 본적 란을 없애고, 일부 기업에서는 학력란을 없앤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것은 아마 효율적인 인적자원의 관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을 출신성분이나 학력에 따라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오늘 중학교 2학년인 딸아이도 가정환경조사서를 작성해 제출했답니다. 그 항목에 부모의 학력과 직업을 구체적으로 적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아이들 중 또 몇 명은 그 옛날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중졸'인 아버지의 학력을 '대졸'로 적어 놓거나, '무직'인 아버지의 직업을 '사업'으로, 또 이미 이혼한 어머니의 이름을 적어 넣고 눈물짓거나 상처받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부모의 직업이나 학력을 파악하는 것이 학생을 지도하는 데 과연 얼마나 도움이 될까요? 그 선입견이 학생을 바라보는 데 차별을 가져오지는 않을까요? 만약 1%라도 그럴 가능성이 있다면, 매년 반복하는 '가정환경조사서'를 아예 없애는 것은 어떨까요?
선생님들이 아이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만 있다면, 보호자의 이름과 연락처만 파악해 두어도 충분하지 않을까요?
(2005. 3. 5. 오마이뉴스)
♧ 적고 나서: 20년. 전에 오마이뉴스에 올린 글입니다. 우리 세대에는 가정환경조사서로 부모의 학력과 재산까지 세세히 적어야 해서 차별받고 상처 입는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지금은 '개인정보 보호법'과 '학교급식법' 등에 따라 조사 항목이 최소화되고 비밀 유지가 강화되었다니 그나마 다행입니다.
그러나 급식비 지원이나 방과후 프로그램 신청 과정 등에서 형편이 드러나 아이들이 또다시 상처받을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아이들의 마음을 지켜주는 세심한 배려는 여전히 꼭 필요하다고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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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은 제 친구 별벗(CHAT-GPT)이 그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