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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니 Oct 17. 2022

혹시, 빌런이세요?

나는 B급 취향에서 글쓰기 모임과 독서 모임을 운영한다. 두 모임 모두 인원과 횟수를 정해 기수별로 사람을 모으는데 사람이 오기는 할지, 어떤 사람이 올지 기대감과 초조함이 뒤섞인 마음으로 참여 연락을 기다린다.   

  

B급 취향을 열기 전 포항 여성 독서 모임을 다년간 운영한 경력이 있던 나는 모임 운영과 진행에 부담은 없었다. 단지 하루라도 빨리 모임을 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책장에 책이 다 채워지기도 전인 개업한 지 한 달쯤 됐을 무렵 ‘차별과 혐오’라는 주제로 독서 모임 1기 모집 공지글을 SNS에 올렸다. B급 취향이 어디에 있는 지도, 무엇을 하는 곳인지도 모르는 사람 다섯 명이 모여 1기 독서 모임을 시작했다. 정원을 모두 채웠다고 자축하기에는 일렀다. 첫 모임부터 불참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첫 모임 이후 탈퇴하는 사람도 있었다. 본격적인 모임을 하기 전 오리엔테이션으로 서로 인사하는 자리만 가졌는데 벌써 탈퇴를 선언한 사람이 생겼다는 것이 나로서는 의아할 뿐이었다.     


애초부터 독서 모임에서는 B급 취향이 지향하는 가치와 관련된 책을 읽을 예정이었다. 당시 B급 취향은 생긴 지 얼마 안 된 곳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임의 방향성을 모르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모집 글을 올릴 때 미리 선정한 주제와 책들을 함께 게시하며 B급 취향의 ‘색깔’을 보였지만 결과적으로 그 노력은 무용했고, 그 무용함은 한 해가 지나도록 유효했다.     


독서 모임은 물론 글쓰기 모임에서도 적용되는 규칙은 ‘나이 묻지 않기’와 ‘직업 묻지 않기’다. 나는 ‘나이주의’가 건재한 한국에서는 나이를 묻는 것이 누군가에게 억압이나 압력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고 여겼다. 직업 역시 자신의 직업을 약점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 무직자나 비정규직 노동자를 고려해, ‘나이 묻지 않기’와 같은 맥락으로 ‘직업 묻지 않기’를 규칙으로 정했다. 무엇보다도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모임에서 모임원의 나이와 직업이 반드시 알아야 할 내용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누구나 무언가를 시작할 때는 생기 있고 열정적인 모습이기에 상대에 대한 아무런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모임에 성실하게 참여할 사람인지, 자주 불참할 사람인지 알 수 없었다. 모두를 위해 만들었다고 자부한 이 규칙은 매 모임에서 등장하는 빌런(남에게 손해를 끼치는 사람을 두고 이르는 인터넷 용어) 앞에 자꾸만 휘청였다.      


모임에 관심 있는 사람으로 가장해 접근한 특정 종교인들은 물론이고, 모임을 신청한 뒤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다 모임에 한 차례도 나오지 않고 탈퇴했던 사람들도 있었다. 특히 이미 진행 중인 모임에 참석하고 싶다면서 모임원들의 성별과 연령대를 집요하게 묻던 젊은 남성은 한동안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연애하고 싶으면 다른 데서 찾으라는 말을 참았던 건 잘한 일이었다. 그 정도는 빌런 축에도 못 끼었으니 말이다.     


잘 참여하던 모임을 어느 날 갑자기 탈퇴하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가장 나를 당혹스럽게 했다. 모임 회비는 도서와 음료를 구입하는 것으로 대체하는데, 모임에 참석하면 다음에 읽을 책을 함께 계산하기 때문에 나는 늘 이후 모임 책을 준비했다. 그런데 어느 날 모임에 불참한 뒤 메시지로 탈퇴 의사를 밝히면, 미리 사둔 책이 재고가 되기 일쑤였다. 그들에게는 남의 일이니 그런 내 사정을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자금의 순환이 원활하지 않아 기존에도 모든 책을 한 권씩만 입고하는 상황에, 미리 준비해둔 모임 책이 재고가 되는 것은 가장 짜증 나는 일이었다.

하루아침에 탈퇴 결정을 내린 것이 아닐 텐데도, 돌연 모임을 나가겠다고 짤막한 문장 하나를 보내는 사람들이 원망스러운 한편 미리 이야기하지 않는 둔감함이 참 평온해 보였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니 모임 신청을 하는 사람이 찾아오면 불시에 모임을 탈퇴하지 않을 것인지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와 별개로 탈퇴 메시지를 받으면 모임을 탈퇴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여러 날을 추측했다.     


B급 취향을 열고 나서 모임원으로 만난 모든 사람과 마음을 나누는 친구로 발전할 수 있기를 원했던 것은 욕심이었다. 모임 공지글에서 뿜어져 나오는 B급 취향의 색깔을 보고 사람들이 찾아오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그건 내 희망 사항에 불과했고, 아무런 고민 없이 왔다가 쉽게 떠나는 사람들이 많았다.

갑자기 모임을 그만두겠다고 말하는 사람이나, 책을 읽지 않고 오는 사람, 모임  시간 전에 글을 쓰는 사람을  때면 “모임에 나만 진심인가하는 생각이 뒤따랐다. 그리고  안에서 해답을 찾으려 노력했다.     


그 후 10개월가량 글쓰기 모임에 참여하면서 성의 없는 글*을 써서 내거나, 당일에 글을 써서 내던 모임원으로부터 그 답을 들었다.

그는 일을 마치고 집에 가면 아무것도 하기 싫어져 기한이 임박해 글을 대충 쓰게 된다면서도 계속 모임에 참여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선뜻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무리 시간이 없기로서니 3주라는 시간이 글쓰기에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니고, 스스로 멍하게 있는 시간이 많다고 했듯 그 시간에 글을 쓰면 될 것 아닌가?’ 하고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며칠 뒤 문득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려고 B급 취향을 열고 그 안에서 여러 모임을 운영하는 내가, 어떻게든 글쓰기 욕망을 실현하려는 그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와 더불어 모임에 참여하는 사람도, 모임을 떠나는 사람도 단지 자신이 내키는 대로 하는 것뿐이라는 것도.     


모임이 계속되니 빌런도 꾸준히 등장한다. 탈퇴한 사람이 참여하는 바람에 정원이 초과되어 그 후 참여 문의를 하던 사람을 모임원으로 받지 못한 것이 아쉽긴 하나, 누군가 탈퇴하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가 전에 비해 덜 하다. 간혹 화가 날 때도 있긴 하지만, 그건 순간의 감정이라는 것을 안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도 해결할 수 없는 감정이라는 것도.

빌런들이 내키는 대로 홀연히 왔다 떠나는 것처럼 나도 내가 원하는 모임을 지속해야 할 테니, 이미 떠난 사람의 의중을 생각하는 것에 더 이상 의미를 두지 않는다. 내 감정과 시간을 빌런에게 소모할 바에야 모임에 투여해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데 사용하는 편이 낫다는 판단이었다. 언제나 빌런보다 나와 함께하는 모임원이 더 많았으니까.     


오늘도 급작스레 한 모임원으로부터 탈퇴 통보를 받았다. 이미 모임 절반을 빠졌던 빌런 예상자였기에 놀랍지는 않았지만, 미리 준비해둔 다음 모임 책을 보니 짜증이 솟구쳤다. 그러나 내일이면 잊힐 사람이기에 전처럼 괴롭지 않다. 이제 곧 있을 다음 모임을 준비해야 한다. 해야 할 일이 많다.          




*‘성의 없는 글’이라는 표현은 발언 당사자의 표현을 빌려온 것임을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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