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힌남노가 지나간 다음 날, 단골손님이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태풍에 B급 취향이 침수됐을까 염려되어 간밤에 편히 잠도 못 잤다는 그의 말에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우리는 서로의 이름도, 나이도, 연락처도, 사는 동네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어느새 친구가 됐다.
그가 B급 취향에 처음 왔던 날을 기억한다. 문을 연 지 두어 달가량 지난 시점이던 작년 늦가을, 그는 혼자 자리에 앉아 주문한 커피와 디저트를 먹으며 가방에서 꺼낸 책을 읽었다. 지금도 책을 읽으러 오는 남성은 극소수라서, 그때 그의 모습은 가히 진귀한 광경이었다. 가만히 책을 읽던 그는 얼마 뒤 깨끗하게 비운 컵과 접시를 내게 가져다주었고, 그 후로도 종종 혼자 와서 커피를 마셨다.
그러던 어느 날 단골손님인 그에게 나는 쿠키 몇 개를 담아 서비스로 내었다. 그렇게 그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누게 되었고, 나는 그가 개업 초기 B급 취향 블로그에 응원의 댓글을 단 사람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내가 넌지시 던진 말에 깜짝 놀라며 어떻게 그걸 알았느냐고 물었지만, 나는 그저 ‘촉’이 왔다고 말할 뿐이었다.
그 뒤로도 그는 주말마다 커피를 마시러 왔고, 언젠가부터 나는 그가 오면 자연스럽게 내 몫의 음료를 들고 그와 마주 앉아 대화했다.
그는 보기 드문 남자 어른이었다. 약 스무 살의 나이 차에도 결코 말을 놓지 않았고 내 말을 경청하며, 언제나 나를 존중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모든 중년 남성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내가 경험한 이들 중 상당수는 무례하고 때로는 안하무인으로 굴었기 때문에 그가 특별하게 느껴졌다.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고 사회 문제나 정세에 대한 생각을 나누면서도 그는 틈틈이 내 안부를 물었다. 그리고 늘 오랫동안 이곳이 지켜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내비쳤다. 그간 그런 말을 하면서도 정작 방문이 뜸한 손님들이 많았기에 나는 그의 말 역시 그렇고 그런 흔한 인사치레로 치부했다.
머지않아 나는 그의 마음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는 B급 취향 모토인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 누구나 머물 수 있는 공간”이라는 문구가 새겨진 티 코스터를 직접 만들어 내게 선물했다. 아저씨가 만든 거라 안 예쁘지만 그래도 유용하게 써주길 바란다는 그의 말에 나는 손사래를 치며 우드 감성의 인테리어와도 잘 어울린다고 고마움을 표했다.
그는 며칠 뒤 특수 인쇄된 책갈피를 직접 제작해 손님들께 드리라며 가져다주었다. 티 코스터를 가져다줄 때와 마찬가지로 볼품없는 것이지만 B급 취향을 지키는 데 보탬이 되고 싶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내게는 그를 향한 고마움을 표현할 방법이 달리 없었다. 디저트 서비스를 내어주거나 책을 추천해달라는 그에게 장고 끝에 몇 권 골라주는 것이 다였다.
우연한 기회로 《한겨례 21》에서 인터뷰 제안이 들어왔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그였다. 서울을 중심으로 전국에 구독자를 둔 주간지에 그와 그가 참여하는 독서 모임을 꼭 언급하리라 생각했다. 그렇게라도 그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었다. 인터뷰를 마무리할 즈음에 그를 비롯해 내 마음을 전하고 싶은 사람들을 언급했고, 그 내용은 수정 없이 그대로 지면에 실렸다. 한겨례 측에서 내 인터뷰가 실린 해당 호를 3부 보내주었고, 그중 1부는 그가 올 날만을 기다렸다가 선물이라며 내밀었다.
경북 라디오 프로그램 인터뷰에서 인상적인 손님에 대해 말해달라는 질문에도 그의 이야기를 했다. 그는 내가 방송 인터뷰 때마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에 크게 부담스러워하지는 않았지만 언제나 스스로 ‘바람처럼 조용하게 살다 가고 싶은 사람’이라고 표현하며 자신이 어딘가에 거론될 만한 인물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의 말을 듣고 난 뒤 다시 그를 보니, 그는 늦여름이나 초가을 사람들이 기분 좋게 느낄법한 선선한 바람의 모습을 하고 있는 듯했다. 매일 바쁘게 살면서도 어느 날 문득 찾아와 나의 기분이나 공간의 분위기를 전환시키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바로 그이기 때문에.
때로는 바람도 쉬고 싶을 때가 있지 않을까. 그가 바람이라면, B급 취향은 바람이 잠깐 머물다 가는 쉼터가 된다. 상가 계약을 하기도 전에 미리 정해둔 B급 취향의 모토처럼 누구나 머물 수 있는 공간이 바로 이곳이니까.
그와의 만남은 내게 선물이었다. 그와 만난 날이면 하루살이처럼 내일을 걱정하고 손님과 실랑이하기를 반복하던 일상의 고단함을 말끔히 씻어낼 수 있었다. 그에게 준 것보다 받은 것이 더 많아 민망하고 때로는 미안하다. 회사 일이 바빠 자주 못 가게 되어 아쉽다는 그의 메일을 읽으며, 어쩌면 그가 생각하는 가장 큰 선물은 내가 오랫동안 이곳을 지키는 것이 아닐까 하고 그의 마음을 헤아려본다. 손님에서 이제는 친구가 된 그가 보여준 진심에 매번 감동하고 또 힘을 얻으며 내일의 B급 취향을 그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