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만한 사람들은 알겠지만, 내가 디저트 카페와 책방을 겸하는 이유는 책만으로 이 공간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직접 만든다며 수제 디저트 카페임을 알렸던 대담한 시작은 시간이 지날수록 배달 앱을 얕봤던 나의 패배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우리가 배달의 민족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한국에서는 장소가 어디든 메뉴가 무엇이든 배달이 가능하다. 하지만 나는 기존에도 배달 앱을 즐겨 사용하지 않았기에 B급 취향을 연 뒤에도 굳이 배달 서비스에 가입하지 않았다.
사실 배달을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한파와 더불어 코로나19 확진자의 증가로 혹독한 겨울을 보내던 지난해, 하루에도 수십 번씩 배달 앱을 사용해야 하나 고민했다. 그런데도 여러 이유로 여전히 B급 취향에서 판매하는 음료나 디저트를 배달하지 않는다.
『배달의 민족은 배달하지 않는다』(박정훈, 빨간소금), 『대리사회』(김민섭, 와이즈베리), 『뭐든 다 배달합니다』(김하영, 메디치미디어), 『중간착취의 지옥도』(남보라 외, 글항아리)와 같은 책을 읽으며 플랫폼 산업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배달 앱 사용이 꺼려진 것이 그 이유다.
카카오 대리운전, 인터넷 대형 마켓의 새벽 배송, 각종 배달 앱 등 플랫폼 업체는 코로나19로 비대면 배송 시대가 열린 뒤 폭증한 수요 때문에 노동자로 하여금 최저임금에 목숨을 걸도록 만든다. 배달 건수로 임금을 계산하는 것은 빠르고 정확하게 배달을 완료하게끔 하는데, 이런 구조는 목숨을 배팅하는 도박장에 노동자를 떠미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과로사로 사망한 택배 노동자와 수입을 올리려 도로를 질주하다 사망한 배달 노동자의 소식이 하루가 멀어 뉴스에 나오는 것은 결국 우리가 만든 결과라고 생각했다.
노동자가 천천히, 안전하게 배달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라 지금과 같은 시스템이 유지되는 한 배달 앱을 사용하지 않으려 한다. 나는 누군가의 생명을 담보로 한 배달을 원치 않는다.
배달 앱 사용을 적극적으로 고민하던 때 평소 친분이 있던 음식점 사장님께 배달 앱으로 사용되는 금액을 듣고 기함하고 말았다.
배달 앱은 ‘깃발’을 꽂은 음식점을 우선적으로 앱 사용자 화면에 띄워준다. 음식점은 깃발 하나를 꽂으려면 월 7만 원(부가세 10% 별도)의 수수료를 배달 앱 업체에 내야 한다. 음식점이 배달하지 않고는 살아남기 힘든 시대이기에, 음식점은 가능한 한 많은 사용자의 앱 화면에 자신의 업장을 노출시키기 위해 최소 세 개의 깃발을 꽂는다. 깃발을 많이 꽂아 판매율이 올라가는 것이 소상공인에게 마냥 좋은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판매 금액의 7%를 건당 수수료로 배달 앱 업체에서 가져가기 때문이었다.
깃발 세 개를 꽂은 음식점은 부가세를 제외해도 한 달에 21만 원과 판매하는 만큼 추가 수수료를 배달 앱 업체에 지불해야 한다. B급 취향이 배달 앱 서비스에 가입한다면 어째 배보다 배꼽이 더 클 것 같다고 생각했다.
배달 앱에 드는 비용만 어떻게 해결하면 될 줄 알았지만 돈 나갈 곳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배달 앱 업체가 노동자를 고용해 직접 배달하기도 하지만 그 규모가 크지 않고 특히나 지역은 그런 경우가 거의 없어서, 음식점은 보통 배달대행업체와 계약을 한다. 계약을 하고 나면 정해진 금액을 배달 건수만큼 배달대행업체에 배달료로 지불해야 했다.
매년 배달료 인상 이슈가 있었던 데다, 사람이 단돈 몇천 원에 목숨을 걸고 곡예 운전하는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나는 배달료를 올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배달대행업체에서 중개비나 관리비 명목으로 배달 노동자 수입 중 상당 금액을 가져가는 것이다. 몇 년 전 배달 노동자가 법적으로 노동자의 지위를 얻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오토바이 기름값과 유지비, 보험비를 직접 해결해야 한다.
배달 노동자의 최저임금이 보장된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 배달 앱을 사용하면 이런 불합리한 노동조건이 지속되도록 돕는 건 아닐까 염려됐다.
배달에 사용되는 일회용품 문제는 또 어떠한가. 코로나19로 배달 산업이 급격히 성장하면서 한국인 1인당 연평균 1300개의 배달 플라스틱 그릇을 소비한다는 통계 결과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우리가 편리함에 취해 환경오염 실태를 보지 못한 사이, 재활용률이 50%를 밑도는 플라스틱 그릇은 매일 쓰레기 산을 만들고 있었다.
“고민은 배달을 늦출 뿐”, “치킨은 살 안 쪄, 내가 쪄” 등의 강렬하고 재치 있는 문구와 눈길을 사로잡는 색색의 배달 앱 화면은 앱 사용자를 현재 진행 중인 문제에 대한 고민 없이 소비하게끔 부추긴다.
고작 나 하나가 배달 앱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플랫폼 산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불변할 것만 같던 세상은 조금씩 나아졌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믿는 내 생각을 위안 삼았다. 바꾸지 못한다고 그에 편승하는 것보다, 바꾸지 못할 바에 그쪽으로 갈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것은 내 고집이 만든 결과다. 끝내 배달 앱 서비스를 가입하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소상공인 중에서도 매우 열악한 상황인 나는 배달비와 배달 앱 수수료를 부담할 능력이 없다. 아무리 계산기를 두드려봐도 한숨만 나왔다.
배달의 민족에서 만 원어치의 주문이 들어왔다고 예를 들었을 때, 배달의 민족은 7백 원의 판매 수수료를 가져간다. 내가 소비자에게 얼만큼의 배달료를 지불하도록 할 것인지에 따라 다르겠지만 배달대행업체는 배달 수수료로 3천 원 이상의 금액을 떼어 간다. 그러면 남는 돈은 최대 6천3백 원. 여기서 한 달에 나가는 깃발 비용을 계산해 빼면, 재룟값은 남을지 모르겠다. 바늘보다 실이 굵은 꼴이라 배달 앱은 진즉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쯤 되니 배달 앱을 사용하는 소상공인의 재정적 어려움을 가늠하게 됐다.
긴 시간 배달 앱 사용을 두고 고민하다 보니 터치 한 번으로 간편하게 배달할 수 있는 오늘의 시스템이 훗날 일자리를 없앨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자동화된 공장은 인력을 계속 감축하고, 톨게이트의 수납 노동자는 사라지며 하이패스는 늘어난다. 지금 당장은 배달 노동자가 늘어나 일자리가 창출된 것처럼 보이긴 해도, 착시효과에 불과하다. 배달업을 생업으로 삼는 사람의 수가 적지 않지만 많은 사람은 잠깐 일하는 곳이라고 생각하는 데다, 일찍부터 이루어진 배달 로봇의 개발로 인건비를 줄이려는 업체들은 머지않아 배달 노동자를 로봇으로 대체할 것이다.
이런 사회적 흐름 속에 매일 자리를 지키며 인건비를 축내는 책방을 한다는 건 어쩌면 한심한 짓일지도 모른다. 클릭 몇 번이면 이튿날 책을 받을 수 있는 인터넷 서점 앞에 나는 한없이 쪼그라든다. 인터넷 서점이 굳건하게 유지되는 것을 보면 독서인구가 줄어든다는 말은 동네 책방을 찾는 인구가 줄어든다는 말과 같은 건 아닌지 하는 착각까지 하게 된다.
기억의 태엽을 되감아 B급 취향을 열기 전, 이곳저곳의 동네 책방을 누비던 나를 떠올린다. 도서 정가제 개정을 저지시키고 동네 책방을 지키는 데 힘을 보태기 위해, 하루에도 수십만 원을 책값으로 소비했던 그때의 나를.
책 탑을 쌓아 계산대에 올려두던 나를 보고 신이 나 미소를 숨기지 못했던 책방지기가 있는가 하면, 아무 표정 없이 계산하던 책방지기도 있었다. 내 마음이 그분들에게 전해졌을지 모르겠으나, 간혹 그때의 나처럼 책 탑을 쌓아 놓고 내게 계산해달라고 하는 손님을 보면 손님의 마음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얼마 전 단골손님이 책 두 권을 고르더니, 누가 책을 산다고 이렇게 많이 진열해두었냐며 애정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손님 같은 사람이 사잖아요.”라고 장난스레 말했지만 속으로는 “그러게요. 인터넷에서는 10%나 할인해주는데 바보도 아니고 누가 책방에서 책을 사겠어요?”라고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면 책방은 바보들만의 리그가 아닐까. 예전의 내가 그랬듯 B급 취향 손님들 역시 웃돈을 주는 것 같은 기분이 들지언정 기어코 책방까지 찾아와 정가에 책을 사는 것이 말이다. B급 취향이 배달하지 않고도 1년 동안 버틸 수 있었던 건 바보들이 B급 취향으로 행진하는 걸음 덕이니, 나는 바보들을 위해 책을 잔뜩 진열해두는 것이 틀림없다.
매일 다정함과 애틋함으로 무장한 바보들의 행진을 상상한다. 그리고 그들이 있는 한 바보들의 리그를 이어가겠다고 마음을 다잡는다. 이제 내일부터는 손님을 기다리는 마음 위에 바보들의 행진을 기다리는 마음을 슬그머니 꺼내 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