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이 99세가 되던 해에 우리가 아브람을 찾아갔다. 우리는 아브람에게 말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너는 내 앞에서 행하며 완전하게 되어라(마 5:48).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맺어서 너를 심히 번성하게 하겠다(창 1:28, 창 6:17, 창 9:1)."(창 17:1~2)
우리는 아브람에게 새 언약에 맞는 새 이름을 부여했다. 위대한 아버지(아브람)를 열국의 아버지(아브라함)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 이름의 뜻과 같이 나와 아브라함, 그리고 아브라함의 후손 사이에 언약을 맺었다. 사실 이 언약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조상들과 맺었던 언약을 다시 확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조상들 대부분이 이 언약을 버렸으므로 다시 새로운 민족을 세워 새롭게 할 때마다 새로운 민족의 조상에게 준 것이다. 처음에는 아담에게였고 또 노아에게 이 언약을 주었다. 그리고 이제 노아의 후손들이 바벨의 반역을 통해 그 언약을 떠난 후 다시 아브라함을 불러 새롭게 한 것이다. 나는 심판을 원하지 않는다. 나는 너희가 살기를 원하며 너희 생명이 풍성하여져 온 땅을 덮기를 원한다. 또한 나는 너희가 나와 같이 완전하기를 원한다(마 5:8, 창 17:1). 너희가 나의 마음을 가지고 서로 사랑하고 서로를 위해 자신의 생명도 내놓는 사랑을 한다면 그곳은 천국이 된다. 그런 사랑만이 가득한 세상이 나의 뜻이다. 나의 뜻과 나의 의지가 이루어지는 곳이 나의 통치가 임한 곳 즉, 하나님의 나라, 하늘나라(천국)다. 그리고 나의 뜻은 사랑이며 그 사랑이 마땅히 이루어지는 것이 공의다. 이것은 너희 인류를 만들었던 창세기 1장과 2장에 기록된 때로부터 신약에 내가 인간으로 가 양으로 생명을 얻고 풍성히 얻게 하려 했던 그리고 그 생명이 성령에 의해 풍성히 부어져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렀던 시기에도 늘 동일했다. 나의 뜻은 동일했고 나의 마음은 늘 하나였다. 나는 너희가 살기 원한다. 나의 생명이 너희 안에서 꽃 피고 열방의 모든 곳곳에 꽃 피기 원한다. 그래서 온통 사랑만이 가득해 강포와 살인으로 인한 눈물과 슬픔이 사라지기 원한다. 이 일을 아브라함을 통해 세워가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에게 그의 믿음을 통해 새롭게 세워질 미래의 민족들도 함께 축복하는 언약을 주었다.
그리고 그 언약의 표로 할례를 주었다. 마음의 상피 세포를 벗기고 겉사람은 죽고 속사람이 살며 옛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다시 사는 언약을 주었다. 강포와 살인을 행하는 자는 죽고 공의로운 사랑으로 가득 찬 거듭난 자로 바로 다시 나의 아들들로 다시 사는 소망의 표를 준 것이다. 다시 나를 닮은 나의 형상으로 나의 아들들로 사는 소망의 표시를 몸에 새긴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이 모든 것을 다 이해하고 나의 마음에 품은 소원을 다 짐작할 수는 없었다. 아브라함은 나의 새 언약을 듣고 자신의 가문 문제로 받아들였고 자신 아들이 없으므로 내가 그에게 주는 열국의 아비의 비전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여 낙담했다. 그래서 내가 열국의 아비 아브라함과 열국의 어미 사라를 통해서 보낼 언약을 믿지 못하고 그 불신으로 낳은 이스마엘을 대안으로 생각했다. 사라는 구십 세요 자신은 구십 구세인데 네 년이면 백 세인데 어떻게 자식을 놓느냐며 항변을 했다. 그래도 나의 언약은 나를 믿는 믿음으로 낳을 그리고 자신의 몸의 죽음 같음을 보고도 믿음으로 반응하여 낳을 믿음의 자손을 통해서 이루어질 것을 아브라함에게 다시 확인시켰다. 아브라함은 인간이라 의심하고 때로는 자기의 길 이스마엘로 달렸지만 내가 바른 길을 보였을 때는 나를 믿고 따랐다. 그러나 나의 언약이 이루어지고 온전히 그의 믿음이 장성할 때까지 그는 여러 번 나를 의심했다. 과연 자신의 죽은 몸에서 그리고 사라의 죽은 몸에서 자식을 생산할 수 있을지 그것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자신은 헛된 꿈을 꾸다 고향도 친척도 아비도 버린 어리석은 자로 죽고 말 것인지 고민했다. 그래서 나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새롭게 하기 위해 또 아브라함을 찾아갔다. 나는 약속을 다시 확인시키고 그리고 그 약속을 이룰 내가 세상의 창조자며 통치자며 심판자임을 아브라함에게 보여 그의 믿음 새롭게 하려 했다. 바로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을 보여 그가 내가 엘로힘이며 엘샤다이임을 알게 했다. 아브라함은 이 일련의 과정을 통해 내가 죽은 자를 살리며 없는 것을 있는 것과 같이 부르는 엘샤다이 전능자이며 그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세상을 만든 엘로힘임을 믿었다. 그래서 그는 믿음의 조상이 되었고 그 믿음으로 낳은 아들 이삭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이 이루고 그 민족을 통해 내가 인간으로 가 인류의 완전한 구원을 이루었다. 그 사건은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다.
뜨거운 광야의 한낮에 헤브론 마무레의 상수리나무 숲에 있던 아브라함은 자신의 텐트 문 건너편을 보았다. 그곳에는 세 사람이 있었다. 하나는 창 18:22절과 같이 나(우리)였고 둘은 창 19:1에 모세가 기록한 것처럼 천사들이었다. 처음 우리 일행은 아브라함의 눈에는 단지 사람들로 보였다. 그가 유목민의 전통을 따라 손님을 대접했다. 유목민들은 유목민들의 고질병인 약탈과 살인과 방화에서 유목민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자신들만의 법을 만들었다. 그중 하나가 손님이 약탈하기 전에 상대를 극진히 대하고 상대에게 나누도록 한 것이다. 그렇게 하여 약탈자가 약탈할 필요가 없도록 만드는 것이다. 서로서로 이렇게 하여 유목민들끼리 서로를 죽여 세력이 약화되지 않게 만드는 법이었다. 이는 유목민 사이에만 통용되는 법이다. 이 법이 세워진 이유는 유목민이 서로 싸우면 그 세력이 약해져서 결국 농경민을 약탈하려 연합하는 시기에 제대로 된 약탈을 할 수 없게 되는 것을 여러 번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사태를 사전에 방지하고 자 하는 의도였으니 사실 그 목적이 더 효율적인 약탈에 있는 것이었다.
출발은 아름답지 못했지만 그래도 유목민들의 관습은 아브라함에게는 선한 결과로 작용했다. 우리 일행을 선대하여 그가 나의 의도대로 축복을 받게 된 것이다.
아브라함은 우리 셋을 자신의 텐트로 맞아들였고 자신의 양을 잡고 빵을 구워 우리를 극진히 대접했다. 나는 내가 간 의도대로 그를 축복했다. 그와 인류전체를 구원할 길을 그에게 일러주었다. 바로 그를 통해 세상에 태어날 믿음의 씨앗에 관한 것이었다. 그 씨앗이 심어지고 심어져 결국 나라를 이루고 그 나라에 왕으로 내가 와 그 모든 자들을 구원하고 나아가 전 열방을 구할 것이다. 그 일의 시작에 있는 자가 아브라함이었다.
그러나 역시 아브라함도 평범한 인간이었다. 그는 속으로 자신은 아직 아들 하나도 없는데 그 일이 이루어질지 의심했다. 그의 아내 사라는 텐트 밖에서 듣다, 그만 비웃음을 날려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책망하지 않았다. 그들은 단지 평범한 인간이었고 그들의 수십 년 동안 나를 따라나선 여정에서 보여준 나의 모습으로도 그들이 쉽게 내가 누구인지 믿지 못할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들을 책망하지 않고 내가 심판자이며 그러므로 내가 통치자이며 그 통치의 권력은 내가 창조자임으로 가진 것을 그들에게 알려 그들이 나를 믿고 나의 언약도 믿게 했다. 그렇게 하여 그들이 믿음을 얻게 했다. 그 믿음으로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삭을 낳았고 그는 비웃음이 아닌 진정한 기쁨과 웃음이 되었다. 노아가 세상의 심판의 때에 세상의 위로가 되었듯이 비참한 지옥도인 세상에서 이삭을 통해 주어지는 언약은 진정한 기쁨과 웃음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믿음으로 낳은 아이의 이름을 이삭(웃음)이라 했다. 그 이름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불신앙을 지적함과 동시에 그것을 책망치 않고 그들에게 믿음을 심어준 나와 그리고 나를 통해 이루어진 언약의 놀라움을 동시에 표하는 양가적 감정을 불러오도록 유도된 이름이었다.
이를 성경에 기록한 것은 너희 중 누구도 자신의 믿음 없음을 한탄하여 나의 나라에 들어오는 것을 포기하지 않도록 하게 하려는 목적이다. 누구든 나를 찾으면 나를 만날 것이요. 나를 본 자는 나를 믿을 수밖에 없다. 평범한 인간이었던 아브라함이 그러했고 사라가 그러했다. 그리고 수많은 성경의 믿음의 사람들이 그러했다. 그들은 범부였고 필부였다. 심지어 반석인 베드로도 나의 십자가 앞에서 계집종의 추궁에 나를 세 번이나 부인하고 도망했다. 그러니 누구도 자신을 인해 실망치 말기 바란다. 자신의 처참한 모습을 보면 볼수록 기뻐하기 바란다. 그 처참함 후에는 모세와 엘리야와 같이 시내산의 나를 만날 것이다. 나를 만난 자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되며 그는 나를 믿음으로 나의 크기의 일, 전능자의 크기의 일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구약에 나의 영광을 본 자들은 언제나 절망에 이른 자였다. 80년의 인생길에서 자신의 모든 절망의 바닥을 보았던 모세가 그러했다. 바알의 선지자들을 무찌르고도 자신의 동료 선지자들은 그 보복으로 죽고 잡혀갔으며 자신은 두려워 도망치는 신세가 되어 로뎀나무 아래에서 죽기를 바랐던 엘리야의 절망이 그러했다. 이제 그 절대절망으로 준비된 자들은 나를 보고 영과 영으로 나를 알아 절대믿음의 사람으로 거듭난다. 그러니 아무도 낙망하지 말고 끝까지 자신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기 바란다. 그리고 끝까지 나를 만나기를 소원하기 바란다. 구하고 두드리고 찾으면 반드시 나를 만날 것이다. 그 길이 힘들고 망하는 길 같아도 끝까지 포기하지 말기 바란다. 세상이 모두 너를 저주받은 자요. 버려진 자라고 말해도, 심지어 자기 스스로조차 자신이 버리운 자 같아도 낙망하지 말기 바란다. 내가 말세에 믿음을 보겠느냐? 누가 나에게 믿음을 보여 나를 만나고 나를 봄으로 얻은 믿음으로 나 창조자 크기의 일에 동참하겠는가? 그는 하늘의 별과 같이 빛나는 이름으로 기억되며 하늘나라에서 큰 자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그러니 끝까지 믿음으로 구하고 타협지 말라. 주변의 믿는 자들이, 주변의 교회가 '다 그런 거야'라고 말해도 끝까지 성경에 나온 믿음의 사람들이 가졌던 생명과 믿음을 구하기 바란다. 그리고 그 믿음이 성령을 통해 오순절과 같이 아주사에서와 같이 웨일즈에서와 같이 부어지기를 구하라. 평양에서와 같이 죄로 인해 통곡하며 자신의 머리를 땅에 찧고 온몸을 주체하지 못하여 몸부림치는 회개가 임하기를 구하라. 끝까지 구하라. 포기하고 싶으면 그 절망을 희망으로 삼아 더 부르짖으라. 절대절망은 심지어 절대불신은 절대믿음을 향한 초석이며 출발이다. 그러니 자신의 믿음 없음과 불신을 인해서도 포기하지 말라. 오히려 귀신 들린 자의 아비와 같이 부르짖으라.
'주님 저의 믿음 없음을 도와주십시오.'
눈먼 자와 같이 부르짖으라.
'주여 저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그러면 모든 방법으로도 자신의 모든 재산을 허비하고도 절망에 이르렀던 간절한 여인과 같이 그 혈루증이 나음을 입을 것이다. 자신의 모든 죄는 떠나가고 죄를 이길 강력한 능력이 하늘로부터 부어져 이제 그 능력으로 자신과 같이 죄로 죽어있는 열방을 살리러 달려가는 자가 될 것이다. 절대절망은 절대믿음의 길이니 절망을 소망으로 삼아 마지막까지 기도하라.
너희는 내가 이스마엘을 버린 줄로 오해한다. 나는 이스마엘을 사랑했다. 단지 그는 내가 세상에 갈 구원의 가문에 속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가 구원받지 못할 자임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내가 구원을 이루기 위해 갔던 가문인 이스라엘 외에도 모든 나라를 사랑한다. 모든 민족을 사랑한다. 나는 셈의 후손도, 야벳의 후손도 그리고 함과 그의 아들 가나안의 후손도 사랑한다. 그러니 너희는 그 누구도 저주받은 자라 하지 마라. 심지어 저주받은 자가 되어 나를 팔았던 유다도 믿음으로 구하면 회개가 부어지고 구원받을 것이다. 심지어 너희가 성경도 나도 모르기에 크게 오해하는 히브리서의 다시 돌이켜 회개할 수 없는 자들과 사함을 받지 못하는 죄를 지은 자들에 대해서도 말한다. 그들은 마지막까지 믿지 않음으로 지옥에 간 자들을 뜻한다. 그들의 예표는 마지막까지 회개하지 않고 모세와 함께 광야에서 업드러진 자들이다. 그러나 그러한 정죄는 결코 인생의 행로에 있는 자들에게는 합당치 않다. 단지 마지막이 이르러 그 끝에도 회개하지 않고 지옥에 떨어진 자들에게만 그 표현은 어울린다. 사함을 받지 못할 죄는 오직 그것밖에 없다. 이를 너희에게 풀어 설명하더라도 너희는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 마치 너희가 멜기세덱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 너희 믿음이 자라 가고 너희가 지각이 있어 분별할 수 있으면 너희가 그것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의 심오한 것도 설명하여도 깨닫지 못하는 자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니 나의 성경도 설명하여도 알지 못하는 것도 있다. 그러나 진리를 구하고 성경을 연구하고 평생을 나를 알기를 구하면 그 지혜가 자라고 이해의 풍성함으로 나가 지식에 넘치는 사랑을 알게 되어 장성하게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나의 말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
앞장에서 설명했던 것처럼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아들을 얻었다. 그때 아브라함은 나를 만났고 그리고 내가 심판자이며 전능자 엘샤다이며 통치자 엘로힘임을 알았다. 그는 내가 창조자임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전능한 엘샤다이인 내가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는 자임을 믿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죽은 것 같은 자신과 자신의 아내 사라의 몸에서 아들 이삭을 얻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마지막 부활의 믿음으로 그의 믿음을 확증받았다. 앞에서 설명한 대로 아브라함은 내가 자신의 아들을 불태워 나에게 연기와 향기로 바치라고 했을 때 말없이 순종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아들 이삭에게 기업이 되어 유전되었다. 이삭은 그 아비 아브라함의 믿음을 어려서 경험하고 그 아비의 믿음을 통해 우리를 만났다.
이삭은 자신의 죽음의 자리에서 나타난 우리의 천사를 보고 그리고 그 자리에 있는 자신의 아비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고 나를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 아버지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자신 이삭을 죽이려 했다. 이삭은 아버지가 설명도 없이 자신을 죽이려 하자 순간 몸이 경직되고 경악스러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그 순간 나의 천사가 다급하게 자신을 죽이지 말라고 소리쳤을 때 이삭은 살았다는 안도감과 함께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분노가 올라왔다. 그러나 아버지의 아브라함의 설명을 들었을 때 그는 아버지의 믿음에 충격을 받았다. 이건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믿음이 아님을 알았다. 그리고 그 아버지의 믿음의 근거는 바로 나를 만나 나를 경험으로 알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아버지가 나를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보았으며 나의 심판자의 면모도 보았음을 알았다. 아버지 아브라함은 나의 앞에서 두려움에 떨었으며 그러면서도 내가 자비로운 자임을 보았다. 그래서 그 두려움 속에서도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기도했다. 그리고 내가 아브라함 자신을 사랑하여 자신의 조카 롯을 구원한 것도 보았다.
유황과 불이 소돔과 고모라에 비같이 퍼부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 성읍들과 온 골짜기와 그 성읍들의 모든 주민과 땅에서 자라는 모든 것을 다 엎어 멸하는 것을 보았다. 어떤 인간이 그것을 보고 두려움과 공포를 떨쳐낼 수 있겠는가? 그것은 단지 작은 사해지역이었을 뿐이다. 우주적인 심판을 본다면 어떤 인간이 견뎌낼 수 있겠는가? 소돔과 고모라에 떨어진 것은 우주에서 온 운석들이었다. 그것들은 고열로 불탔고 그 속에는 유황도 포함되어 있었다. 화산에서 뿜어져 오는 마그마나 대기권에 진입하여 엄청난 속도로 인해 대기와 마찰을 일으켜 타오르는 운석이나 뜨겁기는 마찬가지다. 그로 인해 유황이 녹아 표면으로 나오고 그것이 결정이 되는 것도 당연한 것이다. 지금 사해는 지구상에서 가장 낮은 곳이 되었다. 그 이유가 바로 아브라함 시대에 있었던 심판에 있었다. 그 심판으로 그곳에 쏟아부어진 운석들을 본 아브라함의 표현은 운석의 비였다. 생각하여 보라. 운석이 하나만 떨어져도 엄청난 구덩이가 생긴다. 그런데 그 운석이 비와 같이 내렸다면 얼마나 깊은 구덩이가 생겼겠는가? 원래 사해지역은 갈릴리와 같은 호수가 있고 주변에 평지와 언덕들이 있던 곳이었다. 물론 헤브론 산지와 같이 높은 산들보다는 낮은 평야였다. 그 평야지대를 흐르는 요단강은 사해지역에 모여 호수가 되었고 그 모인 물은 다시 요르단 계곡을 따라 홍해로 흘렀다. 그래서 그 지역은 비옥한 평야지대를 이루었다. 곡식의 생산이 많고 주변의 광야지역들과는 다른 풍성함이 있었다. 많은 자들이 그 풍요를 탐하여 그 지역들로 몰려들었다. 그 탐욕의 도시는 항상 인간의 타락을 이끌어낸다. 인간은 자신의 탐욕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데 그러니 당연히 죄가 관영하고 그 죄의 관영이 심판을 부르게 된다. 그 심판으로 운석이 비와 같이 내렸고 그 결과 지금 지구상에서 가장 깊은 거대한 사해지역이 생겨났다. 사해의 가장 낮은 밑바닥까지 그 깊이는 800~ 900m다. 그 구덩이를 판 것이 운석의 비였다. 우리의 심판은 이렇게도 무서운 것이다. 그 정도 운석이 지구와 충돌했으면 다른 지역으로 그 충격파가 퍼져나가 지진을 일으켰을 것이고 해일을 일으켜 다른 지역을 삼켰을 수도 있다. 지금까지 지구상에 그렇게 깊은 자국을 낸 운석은 없었다. 단 하나의 거대한 운석으로 그 정도 깊이를 파려면 그 충격에 지구가 산산조각 난다. 그래서 나는 운석의 비를 통해 수만 번을 반복하여 작게 땅을 쳤고 그곳에 있는 모든 생물들을 진멸시켰다. 만약 내가 자비를 베풀어 작은 운석이 아닌 큰 운석 몇 개만 보냈어도 지구 전체가 멸망했을 것이다. 소돔과 고모라는 그곳의 생물뿐 아니라 그곳의 땅조차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그곳 땅은 900m 정도 파여서 사라져 버렸다. 그 결과 형성된 곳이 사해였다. 너무 깊이 파인 사해는 더 이상 요르단 계곡을 통해 홍해로 물을 흘려보내지 못했다. 그런 상태로 운석으로부터 떨어진 유황과 나의 저주로 부어진 소금이 녹아들었고 그 염도가 너무 높아져서 생물이 살기 어려운 염해가 되었다. 그렇게 생물이 살 수 없는 바다라 그 이름도 사해가 되었다. [1]
그렇게 두려운 심판을 행하는 나를 본 아브라함은 나를 믿기 시작했다.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전능자임을 믿었다. 더 이상 나에 대한 의심은 없었다. 그 믿음으로 이삭을 낳았고 그 믿음으로 이삭을 모리아산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이삭을 칼로 쳐 토막 내려했다. 아브라함은 내가 전능자임을 믿었다. 나는 죽은 자를 살릴 수 있음을 알았다. 그는 이제 절대믿음을 소유했다. 그것은 그의 신념이 강해서도 아니었다. 단지 내가 누구인지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영과 영으로 열국을 맞대고 나를 보았다. 그렇게 나를 보면 내가 누구인지 본질과 그 근원을 그냥 알게 된다. 그것은 느낀다는 것으로는 다 표현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 그리고 나의 본질과 성품이 압도하여 그 모든 것에 휩싸이게 된다. 아브라함은 이제 내가 누구인지 의심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육신의 눈으로도 내가 전능한 심판자임을 보았다. 아브라함이 본 심판의 장면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본 것보다 더 큰 경험이었다. 그것은 시내산에서의 영광과는 또 다른 경외심을 가져오는 두려움의 전율이었다.
이삭은 자기 아버지 아브라함의 칼날 아래서 아버지가 만난 내가 어떠한 자인지 보았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을 소유하게 된 이삭의 삶에 더 이상 깨닫기 위한 연단은 없었다. 이삭은 아버지가 죽이려는 경험을 하고 난 후 한동안 정신이 나가 있었다. 아무도 믿을 수 없게 되었고 모리아 산에서 받은 충격으로 인해 음식을 삼킬 수도 없었다. 그는 절대절망에 이르렀고 그 상태에서 나를 찾았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찾았고 나를 만났다.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벽에 도달했고 그 절체절명의 절벽은 절대 그가 오를 수 없는 그래서 그것을 넘어설 수 없는 절망이었다. 그래서 이삭은 자신이 아닌 하나님만으로 살 수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영원히 나의 품에 안겨 영원한 안식을 얻었다. 그래서 이삭의 삶에는 나에게 순종하는 은혜가 지속되었다. 그의 삶에는 평안이 가득했다. 그는 웃음이 가득한 자가 되었다. 그는 믿음으로 반응했고 그 믿음으로 얻은 웃음을 다시는 잃지 않았다. 그는 할아버지 데라와 아버지 아브라함이 눈물로 뿌린 씨앗을 품은 자로 살았다. 그는 아버지의 믿음의 집 헤브론에서 하나님의 친구로 살았다.
모리아 산에서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자신의 독생자, 외아들, 이삭을 바쳤을 때 나는 그에게 맹세의 언약을 주었다. 일반적인 언약은 조건부의 언약이다. 그 언약의 대상이 올바른 반응을 했을 때만 그 삶 속에서 언약이 이루어진다. 그것이 계약이다. 먼저 계약을 파기하는 행동을 하면 그 계약은 무효가 된다. 그러나 맹세는 다르다. 맹세는 언약의 대상이 언약에 반하는 행동을 하여도 그 계약은 그대로 실행이 된다. 나는 아브라함에게 열방의 구원을 약속했다. 그 구원은 그의 자손들을 통해 이루어질 것을 약속했다. 이것은 아브라함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인류의 구원을 위해 세운 나의 원대한 계획이 그 안에 있는 것이다. 나는 모든 사람이 구원 얻기를 원한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는 바다의 모래와 같이 하늘의 별과 같은 무수한 후손들이 있을 것이다. 이는 육신의 후손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믿음의 후손들을 뜻하는 것이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에게 보인 구원인 믿음의 씨, 나를 통해, 또 나를 믿음으로 거듭날 영혼들을 뜻하는 것이다. 그들은 모래와 같이 별과 같이 많아지면 그들은 열방에서 열국에서 나아올 것이다. 또 그들은 그 나라와 생명들을 건저 구원함으로 그 민족의 믿음의 왕들이 될 것이다. 그들은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다. 이 언약의 핵심은 씨다. 바로 아브라함의 씨인 나 예수다. 나는 대적의 문을 얻은 자다. 지옥의 문을 얻은 자다. 그 문을 얻는 것은 그 성문이 있는 성루 위에서 통치하는 것이다. 그 문을 얻음으로 원수에게 포로 된 영혼들을 건지는 자다. 또한 나는 이삭을 대신할 숫양이다. 나는 내가 맹세의 약속을 한 그곳에서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건져주기 위해 십자가를 졌다. 성전 산의 그 성전에서 드려지는 피의 제사를 영문밖의 아사셀 양이되어 드렸다. 골고다 언덕에서 흘린 나의 피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바 된 번제의 피였다. 희생제의 피였다. 내 피는 언약의 피요, 속죄의 피요, 구원의 피다.
나는 인간인 너희를 구원하기 위해 구원의 믿음을 가진 자를 기다리고 기다렸다. 그 첫 믿음의 고백이 아브라함이었다. 그 이전에도 노아와 아벨, 에녹과 같은 자들이 있었다. 그런데 너희 인간의 구원을 위해 피 흘리고 너희를 위해 다시 부활할 구체적인 계획을 실행할 첫 사람은 아브라함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의 여정을 이끌었고 그에게 자신의 아들을 숫양과 같이 바칠 것을 요구했다. 그는 믿었다. 자신의 아들을 나를 믿고 나에게 드렸다. 그 믿음이 내가 나의 아들을 인간으로 보내어 너희 인간을 대신할 숫양으로 삼을 수 있게 했다. 그의 믿음으로 그는 죽은 것 같은 자신의 몸에서 아들 이삭을 낳았다. 그와 같이 자신의 아들을 죽음에 내어주는 그의 믿음으로 그는 인류의 죄를 대신할 후손 나 예수 그리스도를 낳았다. 결국 그의 후손으로 나는 세상에 가고 모리아 산의 숫양과 같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진 자들을 위한 대속의 죽음을 당하였다. 내가 그렇게 세상에 가는 것도 모두 인간들의 믿음이 요구되고 인간들의 통로가 필요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인간들에게 속했고 인간들을 통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나는 그곳에서 그들을 만유의 통치자로 주인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아들을 바칠 때 믿었다. 내가 자신의 아들을 그 태워진 재에서라도 다시 살릴 수 있는 부활의 주라는 것을 믿었다. 그의 믿음은 부활의 믿음이었다. 나는 그를 통해 죽고 다시 부활할 수 있었다. 그의 믿음은 나의 죽음과 부활을 실제가 되게 했다. 그는 구체적인 후대의 역사는 알지 못했지만 그의 믿음으로 구원의 역사는 이루어졌다. 믿고 순종하는 자를 통해서만 나의 역사는 세상에 이루어진다.
이삭은 그 언약의 수혜자였다. 그 언약 속에서 웃음은 밝음을 유지했다. 그의 아내 리브가는 때로는 흔들리기도 했다. 이삭 자신도 죽음 앞에서 아내를 누이라 속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이들의 여정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평안이었다. 그 이유는 그의 아버지의 믿음과 대가를 지불하는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후대에 야곱과 그의 아들 요셉을 통한 민족으로의 성장과 모세와 여호수아를 통한 가나안의 정복과 다윗을 통한 왕국의 건설, 그리고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하늘나라의 통치자, 왕으로 세상에 간 나 예수의 모든 구원의 역사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통한 것이었고 그 후손이요, 통로가 된 이삭의 믿음을 통한 것이었다.
너희가 부흥의 때를 맞이하여 대추수를 맞이하면 너희는 알아야 할 것이다. 아브라함과 같이 믿음의 갈등과 고난 중 뚜벅이 걸음을 한 자들의 눈물의 씨앗이 그것을 이루었다는 것을 그들이 흘린 눈물이 강이 되고 그리고 그 강이 바다를 이루어야 나를 아는 것이 온 세상 가득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나는 오늘도 아브라함과 같이 눈물의 씨앗을 뿌릴 자들을 찾는다. 세상에 간 나와 같이 물과 피를 흘릴 자들을 찾는다. 부흥은 그들의 눈물과 피를 통해 온다. 그들의 흘린 물과 피를 통해 온다. 그들의 순교의 희생으로 그들이 창에 찔려 죽은 주검의 증거인 물과 피를 흘림으로 부흥은 이 땅에 임한다. 수많은 영혼들이 성령을 통해 각성하고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나의 십자가의 구원과 부활의 능력을 얻어 하나님의 아들들로 다시 살아나는 일들은 오직 나의 물과 피를 통해 주어진다. 그리고 나의 남은 고난을 채울 나의 작은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들은 작은 나, 그리스도인이다. 그들은 작은 예수다. 나는 오늘도 그러한 자들을 찾는다. 작은 예수였던 스데반을 찾는다. 그를 통해 예루살렘과 온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은 폭발 확장했다. 오늘 너희는 일본의 북부로부터 그리고 대한민국의 부산으로부터 온 열방을 휩쓸 부흥을 기다리는가? 그것을 기다리는 그들은 지금 모두 숨겨진 삶을 살고 있다. 그들은 눈물의 씨앗을 뿌리고 있다. 그들은 다음 세대의 사람이며 다윗과 같이 내일의 기름부음을 받은 왕들이다. 나는 오늘도 너희를 찾는다. 너희가 죽기까지 순종함으로 나의 구원을 이루며 다윗과 같이 전장을 누빌 준비가 되었는가? 천만인이 덤빌지라도 두려워하지 않을 세상의 간담을 서늘케 할 세상이 감당치 못한 사람이 되었는가? 그렇다면 너희는 성령의 사람이요, 너희의 시민권은 하늘의 것이요, 너희는 하늘에 속한 자다. 이제 너희는 곧 열방에 불어 오는 급하고 강한 광풍과 열방을 타오르게 할 불이 함께 하는 말세지말의 오순절을 경험케 될 것이다. 마지막까지 소망을 가지고 믿음으로 가장 미련한 자처럼 열방을 진동케 할 그날을 기다리라. 열방의 관문도시들을 파하고 그곳에 있는 원수의 성문을 취해 그곳의 영혼들을 탈취하는 두렵고 공포스러운 용사들이 되어라. 원수들의 간담을 서늘케 할 세상이 감당치 못할 자들로 연단되어 정금과 같이 나아오라.
[1] https://www.yna.co.kr/view/AKR20181121132200009 Retrieved in 10 March 2024
위의 기사에 운석의 비에 관한 일부 증거들이 있다. 모세가 이것을 불과 유황이라 표현한 것은 자신의 눈에 성령께서 보이신 것을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묘사한 것이다. 연대적으로 아브라함과 차이가 약간 있다. 그러나 이는 탄소연대측정법의 한계 때문이다. 탄소연대측정법은 오류가 있어 그 연대를 측정할 때마다 결과값이 다르게 나온다. 그 평균값을 사용한다고는 하지만 사실 수십만번 반복 측정하여 그 평균 값을 낸들 애초에 정확한 데이터가 아니기에 그 신뢰성을 획득하기에는 부족한 면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