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을 위해 택한 아브라함의 연대기
데라가 죽은 후 나는 아브람을 불렀다. 그곳은 하란이었다. 그는 친척과 고향과 아비집을 떠나야 했다.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야 했다. 아브람이 부름 받은 곳은 하란인 것처럼 보인다. 성경이 그렇게 기록한 것 같으나 아브라함이 부름을 받은 곳은 바로 우르였다. 그의 친척, 고향은 우르에 있었다. 그리고 그의 아비 집도 우르에 있었다. 그러니 그가 친척과 고향과 아비집을 떠나기 위해 버린 곳은 하란이 아닌 갈대아 우르였다. 그리고 그가 부름 받은 것도 그 시기다.
아브라함의 형제 나홀은 우르를 떠나지 않고 남았다. 나홀은 조상들의 땅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부름에서 제외된 것이다. 그리고 그는 남아 그 땅에서 여전히 그 땅의 신들을 섬겼다. 나중에 야곱에 관한 기록을 보면 여전히 그가 우상인 드라빔들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데라와 아브라함은 그곳 우르를 떠났다. 우르는 그의 고향이었으며 그의 친척들도 그곳에 있었다. 그는 고향과 친척을 떠났다. 나는 아브라함이 아비 집을 떠나야 한다고 했다. 아브람에게 아비집을 떠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했을까? 인간들의 입장에서 몇 가지로 아비 집의 의미를 가정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아브라함의 아비 데라의 집이라 볼 수 있다. 만약 아비의 집을 데라의 집으로 보면 하란까지 데라가 함께 했으므로 아브람은 하란까지 아비 집을 떠나지 않았다. 또한 데라가 죽은 이후에도 아브람은 아비 집을 떠나지 않았다. 아브라함은 그의 아비 데라 집을 떠나지 않고 그 집의 주인이 되었다. 바로 데라의 가문을 그가 이어받은 것이다. 하란에서 데라가 죽었을 때 그 가문의 주인은 아브라함이 된 것이다. 그는 데라의 집 즉 데라 가문의 수장이 되어 그 가문을 이끌고 가나안으로 왔다. 그렇다면 아브람은 아비 집을 떠난 적이 없다. 이러면 문제가 생긴다. 아브람은 나의 명령을 따르지 않은 것이 된다. 후에 데라의 손자인 조카 룻을 내보냈지만 그가 조카를 내보냈다고 해서 그 가문의 수장이 아닌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는 데라의 집을 떠난 것이 아니다. 이렇게 보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이다.
두 번째, 아브람의 아비 집은 하란이라 할 수도 있다. 그의 아비 데라가 마지막에 거하던 곳이 하란인 것이다. 그런데 하란도 아니었다. 하란은 그의 조상들의 땅이 아닌 중간 기착지였다.
그렇다면 아브람이 아비 집을 떠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세 번째 아비의 집을 떠나는 것은 아버지의 보호를 떠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아비는 사실 자신의 직접적인 아버지를 뜻할 수도 있지만 조상을 뜻할 수도 있다. 바로 조상들의 집을 떠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 데라와 함께 조상들의 집을 바로 갈대아 우르를 떠난 것이다. 만약 아비 집이 데라의 집이라고 한다면 하란에서 데라의 집을 이어받은 아브람은 가나안으로 길을 떠났다. 그렇다면 그는 그의 아비 집을 떠나지 않은 것이 아닌가? 앞에서도 보았듯이 이는 아비 집이 아니다. 아버지의 보호를 떠나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친척들과 고향과 조상들의 땅을 떠나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아비집을 떠난다는 것은 조상들의 집을 떠나는 것이고 그 조상들이 이루어 놓은 그 지역의 모든 것을 떠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이 데라와 나홀 그리고 아브람은 반농 반유목을 하던 자들인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떠난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자신들의 농사짓던 터전을 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것뿐 아니라 친척과 아비집을 떠난다는 것은 상당한 모험이었다. 친척들이 없이 자신의 힘만으로 자신을 지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힘이 없으면 당장 옆의 부족들에게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 야곱이 딸 디나를 겁간당하고도 복수하는 것조차 두려워했던 이유가 그것이었다. 자신은 작은 무리이므로 언제 죽임을 당할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두려워 아브라함도 이삭도 자신의 아내를 아내라 하지 못하고 누이라고 했을 정도였다. 유목민은 언제든 다른 자를 죽이고 그의 아내와 양 떼를 빼앗을 수 있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유목민이었던 아브람과 아삭이 그런 상황에서 한 말은 이웃에 대해 위증한 거짓이 아니다. 단지 자신의 목숨을 보전하기 위한 지혜일 뿐이다. 그 상황에 거짓말을 하지 않고 진실을 말했다면 아마 남자는 죽임을 당하고 그의 아들도 죽임을 당하고 그의 아내와 딸은 적에게 유린을 당하며 당연히 원수의 여러 아내 중 하나가 되어 살 것이다. 또한 그의 재산인 가축도 원수의 것이 될 것이다.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에 저 칭기즈칸도 자신의 아내가 납치당하고 돌아와 남의 씨를 가진 것 같아도 결코 그것에 대해 아내를 추궁하거나 자식을 차별하지 않았다. 그것이 당연시 여겨질 정도로 유목민들에게 그것은 일상이었다. 그러니 아브라함이나 이삭의 행위를 너희의 기준으로 판단하여 욕할 수 없다. 유목민은 자신보다 약한 자를 만나면 약탈하고 자신과 비슷한 자를 만나도 술에 독을 타 죽일 수도 있는 자들이었다. 바이킹들의 잔을 부딪혀 술을 섞는 행위는 이를 방지하는 습관이었다. 이 습관들은 유목민의 습관이었다.
농경민들은 자신들의 거주지역에서 사회적 관계를 이루고 살아가기에 이런 악한 일을 저지르기 어렵다. 만약 농경민이 그런 짓을 저지르면 그 사회에서 고립되고 죄에 대한 처벌로 사형에 처해질 것이다. 농경민은 아주 주도면밀하고 은밀하게 일을 처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시도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유목민은 상대를 독살해 죽이고 상대의 가축을 약탈한 다음 그 장소를 떠나면 된다. 떠돌아다니는 두 집단의 만남은 제삼자에 의해 목격되기 어렵다. 드넓은 사막과 광야에 흩어진 모래 한 줌과 같은 유목민은 서로서로 만날 일이 거의 없으므로 목격자가 생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니 도주만 잘한다면 죄에 대한 추궁을 당할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유목민들의 세계에서 아브라함이 이렇게 떠나는 것은 목숨을 건 위험한 여정이었다. 이때 아브람의 나이는 75세였다.
데라가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부터 이들은 모험을 전제로 해야 했다. 그 길이 쉬웠다면 데라는 죽기 전에 가나안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의 목표는 가나안이었기 때문이다. 그 길은 돌아 돌아가야 하는 먼 길이었다. 그냥 양 떼와 소떼를 몰아 가나안으로 가면 되는 길이 아니었다. 그 길에는 추위와 더위와 가뭄과 목마름이 따라다닌다. 배고픔과 모래폭풍이 따라다닌다. 그리고 그 길에는 양 떼를 노리는 늑대들도 따라다닌다. 가나안으로 가고 싶다고 쉽게 갈 수 있었다면 데라는 그 중간 길인 하란에서 죽지 않았을 것이다. 중간중간 죽은 양 떼를 보충하고 지친 육신을 쉬어갈 충전기간이 필요한 것이다. 그 기간 동안 데라는 육신의 한계를 입고 하란에서 죽었다. 그 도시의 이름이 하란이고 지금도 남아있는 것을 보면 데라는 자신의 죽은 아들의 이름을 도시에 붙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도시가 원래 있던 것이 아니라 데라와 아브람이 만든 도시인 것을 알 수 있다. 그 이후로 그 도시는 계속 하란으로 남은 것이다. 그 길이 고난의 길이었기에 그 역경의 죽음 앞에서 데라는 고향 땅이 그리웠다. 그리고 그 죽음의 땅에서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뜬 아들 하란을 그리워했다. 그래서 자신이 가는 길의 여정이 더 이어질 수 없음을 알았을 때 그 도시의 이름에 자신의 아들의 이름을 부여했다. 죽음을 앞둔 인생의 마지막 회한의 이름이 죽은 아들의 이름인 것은 당연하다. 데라는 그 여정의 목적지인 가나안에 이르지 못하고 죽은 아들의 이름을 그리워하며 죽었다. 이것이 데라의 길이요, 그 길이 아브람의 길이었다. 그들에게 내가 약속한 것은 멀고도 멀었다. 나라를 이루고 열국이 복을 얻는 것은 볼 수도 없었다. 바다의 모래알과 같은 후손들도 홍해에서 유프라테스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땅도 주어지지 않았다. 아브람은 겨우 막벨라굴과 자식 하나만 얻었다. 이삭이었다. 아브람도 죽기 전에 약속 중 이루어진 것은 밭과 그에 딸린 무덤굴과 겨우 아들 하나였다. 그것이 어떻게 그에게 주어진 약속의 보증이 되겠는가? 그런 상태에서 죽는다면 너희는 어떤 마음이 들겠는가? 데라는 그것도 보지 못하고 죽었다.
그 길을 아브람이 이어갔다. 하란은 우르에서 출발해서 바로 가나안으로 오는 직선통로에 위치한 곳이 아니었다. 우르와 가나안의 직선 행로는 사막과 광야가 가로막고 있다. 그래서 그나마 양 떼를 먹이고 곡식을 구할 수 있는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 사이의 비옥한 초승달 지대를 통과하여 하란에 이르렀고 그곳에서 생의 한계를 느낀 데라는 영원한 쉼에 들었다. 그리고 그 길을 아브라함이 따랐는데 아브람과 데라의 우르와 하란을 거친 길에 대한 언급은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그들의 고난과 외로움은 왜 기록되지 않은 걸까? 왜일까? 내가 성경을 편집한 것은 오직 너희의 구원을 위한 것이다. 만약 내가 성경에 나오는 각자의 인생에 대한 배려의 기록을 남겼다면 너희는 분량이 너무 많아진 성경을 평생이 걸려도 다 읽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모든 사람의 인생을 사랑한다. 그러나 성경에 모든 사람의 인생을 기록한다면 너희는 성경을 다 읽지도 못하고 생을 마감할 것이고 성경을 통해 나의 구원을 찾기도 전에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성경에 구원에 관한 것만을 기록했다. 결코 내가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에 대해 무심해서가 아니다. 데라나 아브라함의 인생에 대해서도 동일하다. 그들의 삶의 여정과 광야와 사막의 고통과 대적들로 인한 고통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위협가운데 놓인 그들의 인생에 대해 무신경한 것이 아니다. 나는 모든 사람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그들의 생명이 구원받기를 원하다. 나는 사랑이다. 그러나 성경을 기록한 것은 너희의 구원을 위한 것이다. 각자의 아픔과 슬픔은 천국에서 내가 영원의 시간 동안 얼마든지 들어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살아있는 너희를 구하기 위해서는 성경에 너희의 구원에 관해 기록해야 한다. 사실 구원을 위해 기록하는 것도 그 분량이 너무 길다. 그러니 구원 외의 것은 잠시 접어두어야 한다. 그래야 너희를 구할 수 있다.
지금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의문이 아니라 확신이다. 아브라함은 어떻게 그 죽음의 길을 떠날 수 있었을까? 그가 가진 확신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자신의 목숨이 위협받는 가운데 나를 믿었다. 그리고 자신의 몸이 죽은 것 같은 때에도 나를 믿고 그 아들 이삭을 얻는 믿음을 보였다. 그리고 그 아들이 죽는 일에 대해서도 나를 믿었다. 그는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고 죽은 자를 살리는 나를 믿었다. 그래서 그는 모리아 산에서 내가 아들을 번제로 바치라고 했을 때에도 순종했다. 그는 내가 자기 아들을 재에서라도 다시 살려낼 것을 믿었다. 그것이 믿음이다. 그 믿음이 있어야 나의 구원을 믿은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믿을 수 있는 수준의 것이 아니다. 오직 내가 성령이 부어주지 않고는 불가능한 믿음이다.
그가 죽음의 여정을 출발한 것도 그리고 그 길에서 아비를 잃고도 포기하지 않은 것도 모두 믿음 때문이었다. 그가 결코 인간적인 두려움이나 낙망을 느끼지 못한 것이 아니다. 그는 수도 없이 낙망하며 두려움에 움츠려 들었다. 그러나 그 안에 사람이 가질 수 없는 강력한 믿음이 있었다. 바로 내가 준 믿음이었다. 그리고 내가 엘샤다이 전능의 신인 것을 알았다. 그는 나를 믿었다. 99세가 되어 더 이상 아이를 생산할 수 없었을 때 잠시 방황하고 자신의 길을 찾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자신을 찾아온 나의 말 앞에 그는 믿음으로 반응했다. 나의 말 한마디에 자신의 모든 불신앙을 청산했다. 그리고 100세에 죽은 것 같은 자신의 몸에서 아들을 얻었다. 아브라함의 신앙은 죽음을 이기는 부활의 신앙이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없어도 심지어 약속한 땅도 자손도 보이지 않았어도 믿었다. 그것은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가 부름을 받고 100세에 이삭을 낳을 때까지 75년 정도가 걸렸다. 결코 쉬운 길이 아니었다. 100세에 그는 자식 이삭을 번제로 태워 나에게 바치려고 했다. 내가 그렇게 하라고 명령했을 때 그는 누구에게도 상의하지 않고 홀로 조용히 이삭을 모리아 산으로 이끌었다. 심지어 나에게 반문조차 하지 않았다. 왜 자식을 달라고 하는지 묻지도 않았다. 그리고 왜 하필 내 자식이냐고 원망도 않았다. 그냥 묵묵히 모리아산을 향했다. 그리고 나의 명령대로 자식을 태워 제사하기 위해 칼을 들었다. 태워 제사하기 위해서는 몸을 토막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야 장작 위에서 잘 태워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내가 급하게 천사를 통해 막지 않았다면 그는 자식을 죽였을 것이다. 너희는 이것이 정상적인 인간의 행동으로 보이는가? 아니면 광신도의 어리석음으로 보이는가? 아마 후자일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믿음은 때로는 광신으로 보인다. 단지 그것이 내가 명한 것인지, 자기 스스로의 광신인지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는 언제나 죽음을 이기는 믿음을 보였다. 그 믿음으로 살았다. 매일매일 죽음의 위협 속에서 나를 선택했다. 그것은 그가 나를 믿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에게 나를 보여주었다. 내가 어떠한 존재인지, 내가 어떠한 것을 할 수 있는지 계시했다. 그는 나를 만나 나를 보았다. 나를 본 자, 나와 영과 영으로 만난 자, 나를 알게 된다. 그가 나를 앎으로 그는 나를 믿고 나의 크기의 일들을 감당하며 위대한 믿음의 사람으로 살게 된다. 아브라함은 내가 누구인지 알았다. 나는 엘로힘이었다. 아브라함의 전능자였다. 그의 친구였으며 그의 보호자였다. 그의 상급이며, 그의 기업이었다. 나는 그의 방패였다. 그가 포기한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보상이었다. 그래서 그는 나를 선택했다. 그는 무엇을 포기하더라도 내가 더 큰 자임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나를 따랐다. 내가 그에게 선택하라고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고 인간의 납득의 범주에서 벗어난 그 어떤 것이라도 선택하여 따랐다. 그것은 그가 내가 누구인지 알았기 때문이다.
너희들 중 믿음이 없다고 한탄하는 자가 있다면 나를 만나 나를 보기를 구하라. 그러면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임재 안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이 믿음이다. 믿음은 스스로 만들어내는 강한 의지나 신념이 아니다. 그것으로는 나를 따를 수 없다. 내가 요구하는 것들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 오직 나를 영과 영으로 본 자만이 나를 알 수 있다. 내가 그에게 나를 나타낸 자, 나를 계시한 자만이 나를 알 수 있다. 그렇게 나를 알면 나를 믿게 된다. 믿는다는 것은 결코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스스로 믿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다. 나를 보고 나를 알기에 나를 믿는 것이다. 그것이 믿음이다. 내가 있음을 믿는 것도 동일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내가 있다고 믿는 것이 아니다. 마당에 심어진 나무가 있는데 그것이 있다고 믿으려는 노력을 한다면 그러한 자는 어리석은 자로 보일 것이다. 아니 보이는 나무가 있는 것이 당연한데 그것을 왜 믿으려고 노력을 하는가? 그런데 나를 믿는 것도 동일하다. 눈앞에 보이는 나를 믿는 것이다. 임재의 감각 안에서 내가 있음을 느끼고 앎으로 나의 존재를 느끼는 것이다. 마치 눈을 감고 있어도 말을 하지 않아도 옆에 사람이 있음을 느낄 수 있듯이 내가 있음을 느끼는 것이다.
너희 대부분은 이런 것을 알지 못한다. 너희는 성경에서 영생을 구하고자 하지만 아무도 나의 형용을 본 자가 없다. 너희는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인 나도 모른다. 혹시 너희가 누군가 만났다고 착각한다든지 기적을 행한다면 너희는 거짓영들에 속아 샤먼적 주술과 탐심을 담은 미신을 믿는 것일 것이다. 그들의 행위에서 그들을 알 수 있다. 그들은 결코 무당을 넘어서는 행위를 너희에게 할 수 없다. 그들은 나의 이름을 말하지만 결국 자신의 권위와 명예를 입에서 표하며 결국 복채를 구한다. 그들은 샤먼이지 결코 나의 생명을 가진 백성은 아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가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나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고 귀신을 쫓아내었어도 거짓 선지자를 삼가라. 그들이 가는 길은 넓고 그들이 유혹하는 길은 쉽다. 만약 너희가 나의 자녀임을 증명하려면 나의 자녀의 행위를 해야 할 것이다. 사도행전의 등장인물이나 아브라함, 다윗과 같은 믿음이 아니라면 너희는 나의 자녀가 아니다. 나의 자녀는 나타나는 기적뿐 아니라 그 심령으로 말한다. 그리고 그 심령은 세상이 이해할 수 없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그 길을 너희는 알지 못한다. 너희를 세상이 이해할 수 있다면 너희는 나에게 속한 자가 아니다. 세상이 너희를 칭찬하고 상을 준다면 너희는 나의 백성이 아니다. 율법적이고 기복적이며 인본주의적인 세상의 교회가 너희를 칭찬한다면 너희는 단지 세상의 종일뿐이다. 너희가 교회라고 아는 뾰족 지붕 집의 대부분은 나를 알지 못하는 거짓종교에 속한 곳이다. 그곳은 율법적 구원과 기복적 구원과 인본주의적 구원을 가르친다. 그러나 자신들도 듣는 자도 자신들이 그렇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다. 바리새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인간은 항상 눈멀고 귀 먹고 벙어리 되어 자신의 모습을 알지 못한다. 이 말조차 이해가 안 간다면 기도하여 구하기 바란다. 그리고 하늘문을 두드리기 바란다. 나를 찾고 찾기를 바란다. 스스로 이해할 수 없다면 이슬람권이나 중국의 지하교회에서 죽음을 이긴 믿음을 가진 자들을 찾아 함께 기도해 주기를 구하기 바란다. 그렇게라도 살 수 있다면 어떤 대가라도 지불하기 바란다. 결코 주변에서 주는 거짓 위로에 속지말기 바란다. 나를 아는 절대만남과 나를 믿는 절대 확신이 없이는 결코 스스로의 구원을 확신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나의 십자가를 말하며 언제나 끊임없는 눈물이 나지 않는다면 너희는 가짜다. 나의 사랑하는 영혼을 향한 열정이 자신의 죽음을 불사할 만큼 타오르지 않는다면 너희는 가짜다. 너희가 죄를 이기지 못한다면 너희는 가짜다. 아직도 내려놓지 못한 허영과 세상의 자랑이 남아있다면 너희는 가짜다. 그러고도 자신의 모습조차 알지 못하고 스스로의 의에 취해있다면 너희는 바리새인들과 같이 독사의 새끼들이며 개들이며 행악자들이다. 이렇게 말해도 못 알아듣고 화가 난다면 너는 정말 구원받지 못한 불쌍한 지옥의 하수인이다. 그러니 그 화를 증거로 스스로 구원받지 못한 것을 깨닫고 스스로의 구원을 위해 생명을 걸고 내 앞에 기도하라.
그래도 그 믿음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회개가 터져 나오지 않는다면, 평양이나 웨일즈, 그리고 아주사에서처럼 너희 안에 은혜가 임하기를 구하라 성령이 온 증거는 표적이 아니다. 나의 구원이 임한 자는 결코 삼박자 구원을 구하지 않는다. 그것은 샤먼의 종교다. 그들의 구하는 복음은 샤먼의 복이며 그들에게 내는 것은 샤먼을 위한 복채다. 거짓 표적은 어디에서나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이 회개의 눈물이 터져 그것을 말릴 수 있는 아무것도 없는 것은 성령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다. 그러한 회개가 터져 일주일이 넘도록 눈물을 멈출 수 없다면 그리고 너희의 심령 안에서 나를 향한 열정이 불꽃처럼 올라온다면 너희는 너희의 구원이 시작되었음을 확신하고 너희의 믿음을 성경의 시금석으로 시험해 보라. 너희 안에 죄가 숨어들 수 없을 정도로 빛이 강하다면 그리고 그 빛이 나의 인격이라면 그리고 그 열정이 너희를 괴롭힌다면, 그로 인해 잠을 이룰 수 없다면 너희는 확신을 성경에 비추어 시험해 보라. 학자와 같이 성경을 연구하며 나의 조명을 구하며 성경을 연구하라. 그리고 성경의 모든 문맥이 보이고 그 속에서 발견한 것이 너희의 상태와 같다면 마지막으로 나의 앞에 나와 다시 물으라. 너희가 나를 아는지 내게 물으라. 그리고 자신의 심장에 물으라. 나를 만나 나를 아는지, 나를 확신함이 세상에 있는 너의 목숨과 목숨보다 귀중한 것을 바꿔서라도 취할 가치가 있는 것인지 물으라. 그리고 이사야와 같이 벌거벗은 미치광이로 나를 따를 것인지 스스로 물으라. 그리고 최춘선과 같이 맨발의 거지 광인이 되어 나를 따를 것인지 스스로 물으라. 그렇더라도 너는 확신하지 마라. 네가 나를 순종하여 따라온다면 너는 진짜다. 그러나 너의 입술과 다르게 네가 나를 따라 순종하지 않는다면 너는 가짜다. 진짜가 아니면 그렇게 살 수 없다. 온 세상이 너를 죄 없이 미워하지 않는다면 너는 가짜다. 어느 날 너의 교회에서 너를 미워하는 자들이 지독히 달라붙어 너를 괴롭히지 않는다면 네가 구원받았다는 그 어느 날은 회심의 날이 아니다. 너의 인간적인 목회자가 여전히 너를 칭찬한다면 너는 구원받은 자가 아니다. 네가 모든 노력을 기울여 그들을 사랑하여도 그들은 너를 미워한다. 그것이 세상과 나의 양들의 차이다. 세상이 미워하지 않는다면 나의 양이 아니다. 세상에 속한 자들과 말이 잘 통하고 그들이 너희 말을 이해한다면 너는 나의 양이 아니다. 세상은 세상의 말을 듣는다. 그리고 나의 양은 나의 음성을 알고 나의 말만을 듣는다. 그러니 나의 말을 하는 너를 세상이 알지 못한다. 나의 말을 알지 못하는 세상은 너의 말도 알아듣지 못한다. 여전히 세상이 너의 말을 알아듣는다면 너는 가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너의 정죄를 기뻐함이 아니다. 단지 네가 살기를 원하는 것이다. 네가 살아 나와 함께 하늘에 에덴에 거하기를 원한다. 네가 아직 하늘에 속한 자임을 확신하지 못한다면 나와 함께 살기를 원한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시간이 걸릴 수 있다. 내가 과부를 억울케 한 재판장과 같이, 빵을 주기 거절하는 악한 친구와 같이, 아들에게 뱀과 돌을 주는 악한 아비와 같이 느껴지더라도 그것은 네가 이직 절망에 이르도록 준비되지 못했기에 내가 너에게 응답할 수 없기 때문인 줄 알라. 그리고 마지막까지 기도하라. 나를 찾고 찾으면 만날 것이다.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은 절망이 온다면 그것이 소망이니 절망에 절망을 이어 모든 것이 죽어버리면 나를 만날 것이니 그때까지 기도하라. 계속 내가 누구인지 너 자신이 누구인지 보여달라고 기도하라. 네가 누구인지 알아야 절망이 온다. 그래서 자신을 포기하면 내가 누구인지 볼 준비가 된다. 그래야 나를 만날 수 있다. 절대절망이 없이는 나를 만날 수 없다. 절대절망은 절대믿음의 길이다. 그러니 포기하지 말라. 소망이 꺼져가면 더욱더 가까이 온 것이니 마지막까지 기도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