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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3.2.3.6. 야곱 연대기

구원받은 자의 이름

by 에스겔

01.3.2.3.6.1. 야곱: 뒤꿈치를 잡는 자


앞에 나온 아브람은 아브라함이 되었다. 위대한 아비에서 열국의 아비가 되었다. 그리고 야곱 즉 뒤꿈치를 잡는 자는 이스라엘이 되었다. 나의 민족 이스라엘의 이름이 되었고 나의 12지파를 낳은 아비가 되었다. 그는 형의 뒤꿈치를 잡는 자였고 나중에는 나와 겨루는 자가 되었다(호 12:3) 그의 이름은 하나님께서 이기신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결국 우리가 그를 지키며 그를 위해 대신 싸워 이긴다. 그것이 야곱이 원한 축복이었다. 바로 형의 칼날 앞에서 우리가 구원해 주기 원한 것이다. 그의 간구대로 우리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었다. 이스라엘의 편이 되어 이스라엘을 지키는 자가 되었다. 이스라엘을 우리의 눈동자와 같이 지키게 되었다. 이런 나라, 이런 민족은 모든 민족이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스라엘의 뒤에 있는 전능자와 상대해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야곱의 육신의 후손들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육신의 자녀들도 사랑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참 믿는 자들을 뜻하는 것이다. 바로 영적 이스라엘을 말한다. 야곱은 내가 사랑하여 나의 생명을 주고라도 그를 모든 원수에게서 구하는 축복을 받았다.

아곱이 이 약속을 받는 자리에 나가기까지 야곱의 인생은 아브라함 가문의 장자가 되기 위한 열망과 그 자신의 방법들과 실패, 그리고 삼촌 라반의 집에서 삼촌의 딸인 라헬을 향한 갈망과 갈등, 그리고 삼촌의 재산을 향한 갈망과 갈등으로 가득했다. 그의 인생은 시작부터 갈망으로 가득했다. 엄마 리브가의 태중에서부터 형 에서의 자리를 갈망했다. 그는 태아날 때부터 형의 자리를 갈망해 형의 뒤꿈치를 잡고 태어났다.

그 갈망은 더 커져서 팥죽 한 그릇으로 형의 장자의 자리를 도둑질했다. 그리고 형이 받을 아버지 이삭의 축복도 도둑질했다. 장자의 축복을 얻기 원해 아버지 이삭도 속이고 형도 속여서 그 자리를 차지하기 원했다.

이삭의 눈이 어두워지지 않았다면 야곱의 속임수로 형제가 원수가 되는 그런 비극은 없었을 것이다. 이삭은 자신의 눈이 어두워지고 늙어 가자, 아들들을 위한 마지막 축복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자신의 장자 에서에게 축복하겠다고 했다.

이삭은 자신의 아들 에서를 자랑스러워했다. 그가 가진 남다 다운 성격도 사랑했다. 그가 사냥에 재능이 있다는 것도 내심 기뻤다. 무엇보다 에서는 욕심이 없는 아들이었다. 성격도 남자다웠다. 어릴 때부터 야곱과는 다르게 시원시원했다. 외모도 건장했고 몸에는 붉은 털이 덮고 있어서 강인함을 더했다. 야곱이 사냥 다녀온 에서에게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권을 팔라고 했을 때도 그는 그냥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동생의 농담 정도로 여겼다. 그래서 그냥 배고픈 자신에게 팥죽을 준다면 장자권을 주겠다고 했다. 팥죽이 없어도 아마 에서는 야곱에게 장자권을 주었을 것이다. 남자다운 그의 성격에 사랑하는 동생이 달라고 했으면 무엇이든 내어 주었을 것이다. 야곱이 장자권과 장자의 축복을 도둑질한 후 밧단 아람에 있는 삼촌의 집으로 도망가 있는 동안에도 에서는 이삭의 재산을 탐하여 장자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남자답게 나가 세일 산에 자신의 기업을 스스로 개척했다. 양과 염소를 길러 거부가 되고 사람들과 관계를 형성하여 자신의 기업을 강하게 했다. 야곱이 삼촌 라반의 양과 염소를 도둑질하다 시피하여 가나안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이미 400명의 군대 정도는 쉽게 동원할 수 있는 인물로 성장해 있었다. 부정한 방법이 아닌 자신의 힘으로 개척하여 거부가 되고 강한 세력을 이루었다. 나중에 그 세력은 성장하여 부족을 이루고 나라가 되었다. 그 나라의 이름은 에돔이었다. 에서의 이름을 딴 이름이었다. 에서의 면모는 정말 남자다웠다. 심지어 자신을 속인 동생이 돌아왔는데도 동생을 울며 안아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보호아래 보호하려 했다. 또 동생이 원하는 대로 자기 아버지 이삭의 모든 재산을 야곱이 가질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 이삭이 살던 헤브론 산지의 터전도 동생에게 주었다. 만약 동생이 속이지만 않았다면 동생에게 장자의 축복권 정도는 쉽게 양보할 수 있는 시원시원하고 훌륭한 성품의 사내였다. 사실 인간적인 면모로는 대장부 에서에 비해 야곱은 너무 야비하고 탐심이 가득하며 용기도 없는 졸장부였다.

다시 야곱의 축복권 탈취 사기에 대해 말하겠다. 아버지 이삭은 강한 사내, 에서가 사냥한 것들로 요리한 별미도 좋아했다. 이삭은 에서에게 사냥해 온 고기로 별미를 만들어 달라고 했다. 그리고 난 후 축복해 주겠다고 했다. 보통 아비들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자식을 축복한다. 그런데 원래 아비들은 다음과 같은 심리가 있다. 자신의 아들이 자랑스러우면 그것이 좋아 꼭 그것을 아들에게 보여줄 것을 요구한다. 자기 자식이 운동을 잘하면 그 아들이 받은 트로피들을 두고 소중히 간직하고 다른 이들에게 자랑하기를 좋아한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도 소중히 여겨 가까이 두고 늘 즐겨본다. 그리고 아들이 오면 아들과 또 그것을 들고 보며 그것에 대해 대화하는 것을 즐겨한다. 그것이 아비가 아들을 자랑스럽게 여길 때 나오는 행동이다. 이삭도 에서에 대한 마음이 그러했다. 아들의 사내다움을 자랑스러워한 아비 이삭이 에서에게 사냥한 결과물로 자신을 기쁘게 해 주기를 부탁했다. 다시 한번 아들이 탁월함의 트로피를 자신에게 안겨주는 기쁨을 누리기 원했다. 그리고 그런 자랑스러운 아들에게 자신의 가문을 맡겨 미래를 든든하게 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 아들에게 우리의 이름으로 축복하여 보호와 번성을 부어주기 원했다. 그러한 목적으로 이삭은 에서에게 사냥한 고기로 만든 별미를 부탁했다.

이삭은 에서를 장자로서 사랑했다. 에서는 사내다웠고 이삭과 야곱과 같이 거친 땅에서 스스로 개척해서 기업을 이루 수 있는 능력자였다. 그런데 사내다움은 다른 부작용이 있었다. 원래 사내다운 자들은 개척정신이 뛰어나 부모에게 언제나 고분고분하지 않을 수 있다. 에서는 이방여자들과 결혼하여 부모를 실망시켰다. 그리고 어릴 때부터 들에 나가는 것을 좋아했다. 아버지인 이삭은 자신도 남자이므로 남자다운 성격의 에서에게 더 끌렸다. 그래서 좀 과격하고 거칠어도 그것을 에서의 단점으로 보지 않고 너그럽게 그의 장점으로 포용하여 품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에서에 비해 야곱은 약했다. 약한 아이가 그렇듯 늘 엄마 옆에 붙어있었고 두려워 바깥에 잘 나가지 않았다. 여자처럼 약한 야곱은 자신보다 강한 형을 항상 질투했다. 그래서 자신의 힘으로 형을 이길 수 없으니 자신에게 잘 속아 넘어가는 엄마 리브가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다. 아버지 이삭은 야곱에게 잘 속아 넘어가지 않았다. 언제나 야곱 자신이 조종하려는 대로 움직이는 엄마와는 달리 이삭은 안정적이고 지혜롭고 굳건한 심령으로 흔들리지 않았다. 야곱의 조종은 이삭에게 통하지 않았다. 그러니 야곱은 더욱 엄마 리브가에게 집착했다. 결국 엄마도 에서를 미워하고 야곱 자신만을 사랑하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야곱에게 조종당하는 엄마 리브가는 아버지 이삭이 에서를 축복해 준다는 말을 듣고 그 축복은 에서가 아닌 야곱이 받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똑같은 자식인데 어떻게 엄마라는 사람이 이런 한심한 짓을 벌였는지? 리브가는 자신의 남편 이삭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야곱을 축복해주지 않을 것을 알았다. 그래서 남편을 속이기로 했다. 리브가는 남편을 속이기 위해 염소를 사용했다. 염소를 잡아 그 털을 야곱에게 감아주었다. 에서는 털이 많기 때문에 이삭을 속이려면 야곱이 에서와 같이 털을 가져야 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야곱이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눈이 어두워졌기 때문이다. 잘 보이지 않으니 아들을 만져서 누구인지 파악할 것이다. 그러니 에서와 같이 털이 많아야 야곱을 이서라 믿어줄 것이었다. 형 에서가 사냥을 하고 그 고기로 별미를 요리할 동안 일을 처리해야 했다. 그 이후에는 형이 축복을 받아버릴 것이기 때문에 야곱 자신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서둘러 야곱은 아버지 이삭을 속이기 위해 장막에 들어갔다. 물론 엄마 리브가가 염소 고기로 만든 별미를 가지고 갔다. 늙어서 미각도 둔해진 이삭은 그 별미가 에서가 사냥하여 잡은 짐승의 고기로 만든 것인 줄 착각했다. 귀도 어두워 야곱의 소리를 구분하지 못했다. 물론 조금 의심했으나 야곱의 속임에 넘어가버렸다. 에서에게 줄 축복을 속아서 야곱에게 모두 주었다. 그 후 에서가 사냥한 고기로 만든 별미를 가지고 왔을 때에야 야곱은 자신이 속은 줄 알았다. 그래서 탄식하며 아들 에서에게 미안함을 표했고 야곱이 속였음을 알렸다. 원래 하려던 축복은 야곱에게 도둑질당했지만 그래도 남은 축복으로 아들 에서를 마음 깊이 축복했다. 이삭과 에서는 야곱의 야비함에 치를 떨었다.

에서는 차마 아버지 앞에서는 말할 수 없었지만 텐트 밖으로 나와 분노를 홀로 터트렸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내가 저놈 야곱을 반드시 죽이리라"

사실 에서가 남성적 성격이라 순간적인 분노에서 한 말이었다. 그냥 그 분노는 그때뿐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그런 분노는 사그라들고 또 남자다운 성격으로 여자처럼 약한 야곱을 보호하려들 것이 뻔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야곱에 의해 세뇌를 당한 엄마 리브가가 에서의 말을 들었다. 그녀는 에서를 몰랐다. 그래서 에서의 분노의 절규를 골육상잔의 의도로 오해했다.

'저 불한당 같은 놈이 야곱을 죽이겠구나'

리브가는 급히 야곱을 불러 도망가라고 했다. 이렇게 해서 야곱은 불운한 방랑길에 올랐다. 이후 나열된 인생의 파국들은 오직 야곱 자신의 비정상적인 집착으로부터 출발한 불운이었다.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집에 도망가서도 그 집착인 탐심을 내려놓지 못했다. 형의 것을 탐을 낸 그 집착으로 삼촌의 것 중 가장 아름다워 보이는 라헬을 탐했다. 14년이 걸려 라헬을 얻고 나니 또 삼촌의 양과 염소 즉, 재산을 탐했다. 물론 이 사건에는 라반의 잘못이 있었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라반의 잘못 보다 야곱의 잘못이 컸다. 일반적으로 고대에 조카(족하, 族下)이며 동시에 사위가 되었다면 보수를 청구하지 않는다. 단지 유산 상속이 있으면 그때에 유산을 받는다. 만약 에서였다면 보수 없이 일했을 것이다. 그 집에서 가족으로 함께 먹고사는 것이다. 의식주를 제공받는 것이 당연하듯 그 집의 식구로 함께 무보수로 일하는 것도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기업은 스스로 개척했을 것이다. 사실 라반이 보수를 주는 것은 선심을 쓴 것이다. 자신의 조카인 야곱이 마음에 들어 자기 옆에 붙잡아 두고 싶어 더욱 그리한 것이다. 그러나 그때도 나는 야곱을 위해 싸우는(이스라엘) 자가 되었다. 이는 야곱이 내게 사랑받도록 영원 전부터 선택받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야곱의 편을 들어 태어나는 건강한 새끼들을 모두 야곱에게 주었다. 어찌 되었건 야곱은 삼촌의 재산을 얻고 나니 삼촌을 버리려고 했다. 이제는 더 이상 삼촌에게서 얻을 것이 없었다. 자신의 재산이 더 많아진 것이다. 정상적인 사람이면 자신이 일을 열심히 했어도 일정 부분만 가지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야곱의 탐욕은 삼촌의 거의 모든 재산을 가로채다시피 했다. 결국 야곱은 재산을 모두 빼앗기다시피 해 자신을 곱게 봐주지 않는 삼촌 라반을 피해 도망가려 했다. 그렇게 도망 오면서 야곱의 처, 레아와 라헬은 아버지 가문의 신상인 드라빔들까지 도둑질했다. 고대인의 가문 신은 그 가문의 흥망성쇠를 결정하는 아주 중요한 존재였다. 그것도 도둑질해 아버지 집의 복을 모두 자신들이 차지하려 했다. 남편 야곱이 그러하니 그 주변도 모두 도둑놈의 성품으로 물들었다. 엄마 리브가가 에서의 장자축복을 도둑질한 것도 야곱에게 물든 습성이었다. 또 야곱은 자신의 탐욕에 눈이 멀어 외삼촌의 입장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 외삼촌 라반이 사기꾼과 같이 야곱의 급여 조건을 야곱에게 불리하게 10번이나 변경했던 것도 사실 야곱의 너무 큰 탐욕에 자신의 모든 재산이 야곱에게 갈까 두려웠던 라반이 자기 방어적 행동으로 한 것이다. 결국 야곱의 탐심에 외삼촌도 물든 것이다. 이렇게 야곱은 자신의 집착으로 모든 주변을 물들여 죄짓게 하는 사악한 성품을 타고났다. 얼마나 집착이 강하면 태에서 나오는 아이가 형의 발목을 붙잡았겠는가? 야곱의 탐심은 태중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 집착은 불안을 불러왔고 다른 모든 이를 자신과 같이 속이며 도둑질하는 자로 보이게 했다. 자신이 자신의 탐심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하는 자이니 타인들도 모두 그렇게 보였다. 형은 자신을 죽이지 않을 것인데도 형도 자신과 같이 악한 자인줄로 알았다. 그래서 삼촌을 피해 고향으로 돌아올 때도 형이 자신의 재산과 처첩을 빼앗고 자신을 죽일 것이라 두려워했다. 실제로 만난 형 에서는 자신을 죽이려 하지 않고 반가워서 눈물을 흘리며 안아주는데도 믿지 않았다. 자신을 보호하려고 오는 형의 군대를 보고도 오히려 위협감을 느끼고 형의 보호도 거절하고 형을 따라 세일로 가겠다는 거짓말을 했다. 사실 야곱은 두려워서 처음부터 그냥 에서를 피하려고 속이는 말을 했을 뿐이었다. 세일로 따라가겠다는 말은 처음부터 거짓이었다. 야곱은 신의도 없고 약속에 대한 책임감도 없었다. 그렇게 필요하면 언제든 배신하고 속이는 것이 야곱이었다. 무엇보다 자신의 탐욕에서 기인한 불안에 의해 인생이 파국으로 달리는 어리석은 자였다. 야곱은 형의 선한 의도를 믿지 않았고 결국 형의 보호도 받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도망갔다. 그곳에서 딸 디나가 강간을 당했다. 만약 에서의 군대와 함께 했다면 결코 당하지 않을 일이었다. 야곱의 불운한 삶은 모두 자기 탐육과 그것을 스스로 이루려는 어리석음과 그로 인한 불안에서 나오는 질병과도 같았다. 많은 인생들이 그렇게 산다. 사실 세상이 지옥도인 것도 모두 이런 인생들의 집착 때문이다.

"불운의 종, 인류여 너희는 언제나 이 어리석음에서 헤어나려는가"

모든 것은 야곱의 망상이었다. 에서가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는 것도 망상이었다. 만약 정말 에서가 야곱을 죽이려 했고 여전히 미워했다면 야곱을 찾아내어 죽이지 못했겠는가? 그 큰 가축무리를 몰고 다니는 야곱을 추격하여 죽이는 것은 아침에 물을 끓여 차를 마시는 시간 정도만 투자해도 충분할 일이었다. 그러나 에서는 야곱을 사랑했기에 야곱을 약속에 대한 신의가 없는 자라고 책망조차 하지 않았다. 야곱이 자신의 군대의 보호조차 거절하는 것을 보고도 에서는 그냥 동생의 불안함을 이해하고 그냥 넘어갔다. 정말 사내다우면서도 배려가 깊은 성품을 에서는 타고났다. 그런 사내들은 원칙과 기준이 분명하면서도 말이 많지 않고 자연을 사랑하고 자기에게 속한 사람들은 너그러움과 따사로움으로 품는 성품을 가진다. 인간적으로는 에서가 야곱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면모를 가졌다. 야곱의 참 답답하고 병적인 집착에서 나온 생각이 집안에 분열을 가져왔다. 그 편집적 망상이 자신의 인생도 유리방랑하는 불행한 처지로 몰아넣었다. 사실 야곱과 리브가가 그런 망상에 빠지지만 않았어도 야곱은 아버지 이삭의 집에서 엄마 리브가의 보호아래 평안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형의 분노는 오래가지 못한다. 그리고 그 형은 야곱과 같이 아버지의 재산을 탐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아버지 이삭의 기대대로 남자답게 나가 자신의 기업을 스스로 일으키는 길을 택했다. 그러면 당연히 탐하지 않아도 이삭의 재산은 모두 야곱의 것이 된다. 야곱은 이런 평탄한 길을 망상에 쫓겨 내버리고 자신의 집착과 탐심의 악령에게 시달리며 평생을 고생하며 지냈다. 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너희도 내가 너희에게 준 창세기의 야곱의 일대기를 잘 관찰하면 이러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01.3.2.3.6.2. 이스라엘


야곱의 망상은 나에 대한 태도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는 자신의 형이 자신을 죽일 것이라 두려워했다. 그런데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객관적 사실을 야곱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방법으로 양과 염소 떼를 나누고 자식들과 처첩의 떼도 나누었다. 그리고 자신은 뒤에 남아 나에게 그 집착을 이룰 것을 요구했다. 그의 기도는 기도가 아니었다. 집착이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질 때까지 포기하지 않는 그의 기도는 나를 괴롭힐 뿐이었다. 그는 거듭난 심령을 가지지 못한 불운한 짐승일 뿐이었다. 그가 기도라고 하는 것은 그 짐승의 탐욕의 울부짖음일 뿐이었다. 형이 자신을 죽일 것도 아닌데 형에게서 보호해달하는 요구를 했다. 나는 그에게 그것이 자신의 집착에서 나온 망상임을 설명했지만 그에게 나의 설득은 통하지 않았다. 오직 자신의 불안에 사로잡혀 나에게 지켜주고 보호해 달라는 불필요한 요구를 했다. 나는 밤이 새도록 그것이 필요 없고 야곱의 불안은 단지 망상에 기인한 것이라는 것을 설명했다. 그래도 야곱은 듣지 않았다. 형이 자신을 죽일 것이니 반드시 자기를 보호해 달라는 것이었다. 내가 이미 바로 직전에 나의 군대(마하나임)를 보내어 나의 군대가 야곱을 지킬 수 있음을 보였다. 그런데도 야곱은 필요도 없는 자신의 망상을 위해 내가 그를 지켜 달라고 요구했다. 언제나 자신을 지켜줄 것인데 이미 이전에 여러 번 약속을 했는데 그는 또 수호의 축복을 달라고 매달렸다. 내가 가려하자 나를 가지 못하도록 잡았다. 나는 이미 너를 축복했고 네가 지금 불안해하는 것은 단지 망상이니 그냥 염려하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이 인간 야곱은 나도 믿지 않았다. 그냥 귀찮아서 자기를 버리고 간다는 듯이 나를 오해하고 나의 바짓가랑이나 허리춤을 번갈아 잡고 매달렸다. 그 씨름을 밤새도록 하다가 나는 그가 도저히 설득되지 않을 인간인 것을 알았기에 그의 옆구리에 있는 복숭아 뼈를 쳐서 그것이 움푹 들어가게 만들었다. 그는 주저앉았다. 더 이상 나를 붙들 힘이 없었다. 그제야 그는 나를 놓아주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의 불안을 이해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야곱 즉 발꿈치를 잡는 자에서 이스라엘로 개명해 주었다. 내가 싸울 것임을 그의 이름에 새겨준 것이다. 너무 불안해하고 믿지를 못하니 평생 자기 이름을 부를 때마다, 내가 자신을 지켜줄 것을 상기할 수 있도록 했다.

내가 야곱을 위해 싸운다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고도 야곱은 불안을 떨치지 못했다. 여전히 에서의 호의를 보면서도 형 에서를 의심했다. 그리고 여전히 나도 믿지 못하고 늘 불안해했다. 형의 보호를 거절하고 그 결과 자신의 딸이 강간을 당하는 일을 당했는데도 야곱은 믿음이 없었다. 나에게 복수해 줄 것을 빌었더라면 내가 가서 세겜 족속들을 쓸어버렸을 것이다. 그런데 야곱은 그런 기도는 할 생각조차 못했다. 오직 두려움에 떨 뿐이었다. 오히려 자기 대신 용감하게 복수를 하고 돌아온 시므온과 레위를 책망했다. 인생의 마지막까지 그 태도는 바뀌지 않았다. 그래서 인생의 마지막에 자식들을 축복하는 자리에서도 그 잘못된 선입견으로 시므온과 레위에게 잘못된 저주를 남겼다. 유목민의 경우, 상대가 먼저 공격하면 상대를 공격하고 약탈하는 것이 당연했다. 특히 자신의 딸이 강간을 당했다면 이는 법을 따질 필요도 없이 보복한다. 보통 남자는 죽이고 여자들과 가축은 빼앗는다. 그 유목민의 관례대로 시므온과 레위는 정당한 전쟁을 했고 승리했다. 그런데 야곱은 그 소문을 다른 가나안 족속들이 듣고 자신들을 공격할 것을 두려워해 꽁무니를 뺐다. 만약 에서였다면 할아버지 아브라함 때부터 길렀던 이삭의 군대와 자기 주변의 동맹들을 끌어모아 세겜 족속들을 완전히 멸절시켰을 것이다. 그리고 누구든 다시 자신의 딸들에게 그런 짓을 하는 자들이 있으면 똑같이 만들어주겠다고 엄포를 놓았을 것이다. 그런데 야곱은 가상한 용기를 가진 아들들을 책망하고 나중에 그들에게 저주까지 퍼붓는 참으로 졸장부다운 면모를 여지없이 보여주었다.

그런데 나의 선택한 구원의 계보를 이어 나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나게 할 자는 시므온과 레위도 아니었고 사내다운 에서도 아니었다. 나는 야곱을 택했다. 나는 이미 태중에 그들이 잉태되기도 전에 나는 야곱을 택했다. 야곱이 배신자며 속이는 자라도 나는 야곱을 택했다. 내가 야곱을 택한 것은 그가 훌륭한 성품을 가져서도 아니었다. 수완이나 능력이 뛰어나거나 무력을 가져서도 아니다. 내가 그를 택한 것은 오직 가장 약한 자를 택하여 세상의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함이었다. 나의 구원이 결코 인간 스스로의 어떤 조건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 나는 야곱도 사랑하고 에서도 사랑했다. 그런데 에서는 선택하지 않았다. 내가 성경에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는 말을 했는데 그것은 히브리인들이나 그들이 속한 셈어파의 족속들이 사용하던 과장법을 사용했을 뿐이다. 그들의 언어적 수사법으로 말한 것이다. 그래야 그들이 알아듣는 것이다. 그들은 항상 과장하고 과대포장하기를 좋아했다. 그들의 언어도 그러했다. 또 그들은 대조법을 쓰는 것도 즐겨했다. 그래서 그런 수사학적 습관들을 따라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방식으로 그들에게 설명했다.

"나는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

나의 선택은 나의 주권이며 절대적 은혜다. 결코 인간의 어떠한 면모도 그 어떤 영향력도 구원에 기여할 수 없다.

내가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개명하여 주었는데도 그 불신앙과 집착이 여전히 이어졌다. 후에 자신이 가장 집착했던 라헬을 잃었는데도 그 집착이 이어졌다. 라헬에 대한 집착을 인해 자식들 중에 라헬의 자식만 편애를 했다. 그 결과 요셉은 모진 고생을 해야 했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편애를 받은 것은 잠시였다. 노예로 팔려 모진 고생을 해야 했다. 물론 그것을 내가 선하게 썼지만 요셉의 고난의 원인은 야곱의 편애에 있었다. 그 편애가 너무 지나쳐서 레아의 자식들이 한을 품게 만들었다. 그로 인해 요셉을 팔아버리는 불행이 온 것이다. 요셉은 모진 고생을 했고 요셉의 형들은 언제나 자신들이 동생을 죽이려 했고 결국 종으로 몰래 팔아버린 범죄자라는 양심의 가책에 평생을 시달려야 했다. 형들은 나중에 이집트에서 요셉을 만나 용서를 받았지만 요셉이 죽을 때까지도 그들의 불안은 치유되지 못했다. 그 형들의 상처와 불안은 아비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푸대접을 받은 자들이 보이는 무너진 자존감에서 나온 질병이었다. 그 상처받은 마음들이 동생 요셉을 사지로 몰아넣는 질병이 되었다. 그 모든 질병의 근원지는 야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야곱을 택했다. 야곱은 이스라엘이 되었다. 야곱을 위해 나 하나님이 싸울 것이다. 그 누구도 야곱을 대적할 수 없다. 나는 그들에게 이름을 줌으로 나의 맹세를 확정했다. 세상에 그들의 이름으로 그들에 대한 나의 맹세를 공표한 것이다. 나의 구원은 결코 인간의 어떠함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 구원받을 자가 인생들이 상상치도 못할 싸이코패스라 해도 나는 그 사탄의 새끼를 변화시켜 나의 자녀로 만들어 사랑한다. 나의 사랑은 끝이 없고 나의 사랑은 조건도 없다. 나는 모든 자를 사랑하며 모든 자를 구원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그들이 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해도 나는 끝없이 그들의 구원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래서 결국 나의 택한 자들을 구원한다. 나는 그들이 인격적으로 자신의 존재적 절망을 깨닫고 나에게 소망을 품도록 그들의 회심을 준비한다. 나는 그들을 끝없이 사랑한다. 나의 사랑은 그들이 지옥의 나락에 떨어질 때까지 계속되며 그들이 스스로 멸망의 지옥으로 들어간 다음에도 계속된다. 만약 내가 그들에 대한 연민이 없었다면 지옥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전능의 저주가 퍼부어지는 곳이 될 것이다. 내가 약간의 형벌만을 지옥에 둔 것은 오직 그들을 사랑하는 연민에 의한 것이다. 나는 결코 심판을 원하지 않는다. 나는 그가 어떠한 자이든지 돌이켜 살기를 원한다. 나의 값없는 은혜를 받아들이고 그 은혜로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기를 기대한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기만 하라. 그러면 내가 그에게 나의 모든 것을 상속할 것이다. 온 우주도 아끼지 않고 모두 내어줄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내 아들들에게 무엇을 아끼겠는가? 너희가 나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전능자다. 나는 엘샤다이다. 그런데 내가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그러니 자신의 알량한 자존심은 빨리 버리고 나에게 달려오기 바란다. 원래 너희는 피조물이라 스스로 내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어린아이는 자기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을 스스로 해결하려 하면 문제만 키우고 사고를 더 크게 친다. 그러니 너희가 할 것은 어린아이처럼 빨리 나에게 달려와 말하는 것뿐이다. 아바, 아빠! 그러면 내가 모든 것을 해결할 것이다. 너를 구원하고 너의 더럽고 추한 죄도 씻고 너를 거룩하게 하여 너에게 거룩의 옷을 입힐 것이다. 네 심령에 거룩한 성령을 부어 너의 안에서 거룩한 샘이 솟아나도록 할 것이다. 너의 얼굴에는 영광의 기름을 바를 것이요. 너에게 기름을 부어 나의 기업을 무를 것이다. 너를 만유의 통치자로 삼으며 너를 통해 세상의 아름다움이 이루어지게 할 것이다. 그곳 새에덴, 새예루살렘에는 소망만이 가득하며 기쁨의 관을 쓴 행복의 무리만 가득할 것이다. 이스라엘아 너는 행복자로다 누가 너와 같이 나의 사랑을 받았는가?

29"이스라엘아, 행복하게 되어라. 여호와께 구원을 받은 백성아, 너와 같은 자가 누구냐? 그분은 네 도움의 방패이며, 네 영광의 칼이시다. 네 원수들이 네게 복종할 것이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들을 밟을 것이다."( 신명기 33:29 바른)

나는 내가 태어날 요람이 될 민족 이스라엘을 세웠다. 그 이스라엘의 근본 야곱(이스라엘)도 내가 택해 세웠다. 그를 통해 구원은 오직 은혜임을 보였다.

어리석은 자들아 야곱이 탐심으로 얻은 것이 무엇이냐? 얍복 강가에서 그가 나에게 매달려 얻은 것이 무엇이냐? 그는 어리석은 집착의 망상에 스스로의 환영 속에서 헤맸을 뿐이다. 그가 그런 짓들을 하지 않았다면 그의 아버지 이삭과 같이 순전한 믿음으로 순종했다면 그는 아버지 이삭과 같이 평온한 생애를 보냈을 것이다. 그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나는 여전히 그를 위해 싸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었을 것이다.

너희도 스스로의 어리석은 인간적 모든 수단을 내리라. 너희의 탐심의 철야기도를 내리라. 너희 샤먼적 능력 갈구를 내리라. 너희 일천번제와 너희 복채와 강한 샤먼들에 대한 숭배를 내리라. 너희의 율법주의를 내리라. 그러면 내가 의의 옷을 입히리라. 너희 기복주의를 내리라. 그러면 내가 백합화보다 아름다운 영광을 옷 입히리라. 너희 인본주의를 내리라. 그러면 내가 솔로몬보다 지혜로운 관을 너희 머리에 씌우리라. 너희 자아실현을 내리라. 그러면 너희 아비인 내가 참 하늘의 형상을 너에게 옷 입히리라.

그러나 너희는 너희 탐심의 몸짓을 멈추지 못하리라. 그러니 너의 모든 헛된 노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리라. 너의 모든 추잡한 집착의 달음짐을 내달려 지옥의 불과 같은 절망에 이르라. 그래서 절대절망에 이르라. 그러면 나의 구원은 너희에게 값 없이 은혜로 부어지리라. 내가 너희 옆구리 복숭아 뼈를 치리라. 너는 절망에 이르고 너는 너의 모든 것으로는 너 자신을 구원할 수 없음을 알리라. 그래서 절대절망 가운데 나를 찾으라. 그러면 나는 너에게 그 시에 시절을 따라 약속된 은혜를 부으리라. 절대절망에 이르라. 그 시절에 이를 이른 비와 늦은 비는 성령의 강력한 회개로 너에게 임하리라.

그가 가면 너희는 죄에 대해 의에 대해 심판에 대해 깨닫게 될 것이다. '죄에 대하여'라고 하는 것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며, '의에 대하여'라고 하는 것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므로 너희가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고, '심판에 대하여'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 지배자가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지금은 감당할 수 없다. 그러나 그, 곧 진리의 영이 오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할 것이니, 이는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줄 것이기 때문이다.(John 16:9-13 바른)

이러한 성령의 책망이 너희를 대각성으로 이끌 것이고 그 대각성은 대회심, 대부흥(다시 살아남, Revival)에 이르게 할 것이다. 그러면 하늘의 능력이 급하고 강한 바람처럼 너희를 타오르게 할 것이요, 그 불과 바람은 열방을 휩쓸 말세지말의 대추수로 너희를 이끌 것이다. 너희 거리들과 거대한 탐욕의 하이웨이들에는 눈물이 강을 이루고 회개가 넘쳐 홍수의 물처럼, 급하게 밀려오는 쓰나미처럼, 선물결과 같이 너희에게 오리라. 그래서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나를 아는 것이 온 세상 가득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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