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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3.2.3.7. 꿈꾸는 자, 요셉의 연대기-1

요셉과 담장을 넘은 가지

by 에스겔

01.3.2.3.7.1. 요셉의 이름


요셉은 "하나님께서 더하신다"는 이름을 가졌다.

아이를 갖지 못하던 야곱의 둘째 아내 라헬에게 우리가 아이를 주었는데 이름을 요셉이라 했다. 또 다른 아들을 더하여 줄 것이라는 소원이 담긴 이름이다(창 30:22~24) 야곱의 부인들, 레아와 라헬은 자식을 낳음을 통하여 서로 질투의 전쟁을 벌였다. 남편의 사랑을 독차지한 라헬도, 자식을 많이 낳아 야곱에게 기쁨을 주었던 레아도, 모두 서로가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서로를 질투했다. 그들은 서로 각자의 소원을 우리에게 말했다. 그러나 사실 그 소원들은 집착이었다. 올바른 기도가 아니었다. 라헬은 자식을 놓지 못하다, 자식을 낳았으면 감사하면 될 일이다. 그런데 라헬은 우리에게 더 달라고 요구를 했다. 집착이다. 라헬은 자신의 남편 야곱의 집착에 전염되었다. 그 전염된 집착의 이름이 요셉이다. 그렇게 집착해서 한 기도의 응답으로 아들을 더해주었는데 그 이름은 베냐민이다. 라헬은 집착했던 그 아이를 낳다가 죽었다. 죽어가면서 아이 이름을 베노니(내 슬픔의 아들)라 했는데 야곱은 베냐민(오른손의 아들)으로 불렀다.


01.3.2.3.7.2. 야곱의 집착과 편애


과거 야곱이 젊었을 때 라헬은 얼굴이 아름답고 몸매도 예뻤다(창 29:17) 그런 라헬을 얻기 위해 야곱은 14년을 라헬의 아버지 라반을 위해 일했다. 라헬을 위해 7년씩 두 번을 허비했다. 그런데 야곱은 그 7년들을 하루같이 여겼다. 어떻게 그 오랜 세월을 버틸 수 있었을까? 그 답은 야곱의 집착이다. 야곱의 집착은 무서웠다. 무엇이든 원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얻을 때까지 노력했다. 그 집착의 야곱이 라헬만 편애함으로 우리는 레아를 불쌍히 여겨 레아에게만 아들들을 주었다.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였다. 이렇게 되니 라헬의 질투가 레아를 향했다. 우리는 그때에 라헬도 불쌍히 여겼다. 그대로 두면 둘의 불화가 가정의 불행이 될 것이었다. 라헬은 아이 요셉을 얻었고 또 그 동생 베냐민도 얻었다. 야곱, 레아, 라헬 각자의 집착이 이루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원래 인간의 집착이란 덧없는 것이다. 야곱이 그렇게 사랑했던 라헬이 세상을 떠나버렸다. 집착의 끝, 허무에 도달한 것이다. 당시 에브랏이라 불리던 베들레헴 길에 라헬을 장사했다. 그곳에 라헬의 비석을 세웠다(창 35:16~20) 아브라함, 이삭과는 다르게 야곱의 기록은 집착의 기록들로 가득 찼다. 그 주변도 그러하고 야곱 자신도 집착으로 가득 찬 삶을 살았다. 그가 집착에 가득 차니 주변도 그렇게 된 것이다. 그 집착의 끝은 허무했다. 라헬을 장사 지냈을 때 야곱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그 정도 되면 야곱도 깨달아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했다. 야곱은 탐욕을 부리는 집착을 버리지 못했다. 그로 인해 또 집착하는 아들들을 길러냈다. 아버지의 편애로 사랑을 잃어버린 레아의 아들들은 사랑에 굶주려 한이 맺혔다. 엄마 레아도 사랑받지 못했고 엄마의 자식들인 자신들도 사랑받지 못했다. 이미 장성한 자신들을 두고 아버지는 죽어버린 라헬의 아들 요셉을 마치 라헬을 보듯 편애했다. 그에게만 장식을 단 긴 코트(채색옷)를 입혔다. 요셉을 편애하여 요셉은 양을 치는 것 같은 힘든 일은 시키지도 않았다. 형들보다 훨씬 어린 요셉에게 형들을 감독하는 일들을 시켰다. 요셉은 그 임무에 충실해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고자질했다. 그런 일들로 형들은 요셉을 더욱 미워했다. 야곱의 집착과 편애는 결국 가정에 파국과 같은 불행을 가져왔다. 나면서부터 사랑받지 못한 아들들이었다. 늘 들에서 재산증식에만 몰두하느라 집에도 들어오지 않던 아버지의 얼굴을 잘 본 적도 없는 아들들이 결국 문제를 일으켰다.

문제는 야곱에게 있었다. 요셉 외에 다른 야곱의 아들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탐욕과 집착으로 일 중독에 걸려 집에 들어오지도 않고 자신들에게 얼굴조차 보이지 않던 아비가 노년에 집에 머무르게 되었다. 이제 자신들도 사랑받을 시간이 생겼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버지는 자신들을 본채 만채 했다. 아버지는 자신들을 곁에 두고 사랑한 것이 아니라 이제는 양치기로 아비에게서 분리해 들에 보내버렸다. 아비는 자신들에게 너무 무관심했다. 그들은 또 아비에게 밀려난 것이다. 그런데 자신들을 어릴 때부터 밀어내던 아비가 옆에 요셉은 항상 끼고 있는 것이다. 마치 자기 엄마 레아를 밀어내고 언제나 라헬만을 아꼈던 것처럼. 그때 자신들은 아버지에게 사랑받지도 못하는 엄마의 아들들이라 없는 존재들과 같았다. 아버지의 관심과 따듯한 손길은 그들의 몫이 아니었다. 그런데 자신들을 아버지의 관심밖으로 밀어냈던 라헬이 죽은 지금도 아버지는 여전히 자신들을 사랑하지 않는다. 오직 그 라헬의 자식 요셉만을 옆에 두고 사랑한다.


01.3.2.3.7.3. 꿈꾸는 자 요셉


그런데 그런 요셉이 꿈까지 꾸고 자신들과 엄마 레아가 요셉에게 절을 하고 요셉을 섬기게 된다고 했다. 그 일로 야곱의 아들들은 더 분노가 치밀었다. 이제는 하나님도 우리를 모른척하고 밀어내시는가? 그들의 마음은 이제 서운함이 아니라 분노와 악에 받친 눈물이 점령해 버렸다.

이러한 시기에 눈치 없는 야곱에 의해 불운한 일이 벌어졌다. 집착에 눈이 멀어 주변 상황을 살피지 못했던 야곱은 자신의 다른 아들들이 요셉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몰랐다. 그래서 그들이 멀리 들에 양치고 있을 때에 그들의 감독자로 또 요셉을 보냈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해 애정결핍에 걸린 형들이 요셉을 보았다. 아버지의 편애를 받는 어린 동생의 간섭질과 고자질을 또 당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형들은 분통이 터졌다. 그들은 동생이 오는 것을 보고 비아냥 거렸다.

"저기 꿈꾸는 자가 온다"


이 말을 시작으로 야곱의 다른 아들들은 분노를 터트리기 시작했다. 형들은 아버지의 편애의 상징인 코트부터 빼앗았다. 그리고 동생을 묶었다.

그런데 요셉은 눈치도 없이 형들에게

"아버지에게 다 말하겠다"

고함을 친다.

요셉이 고자질한다는 말에 눈이 뒤집힌 형들은 요셉을 죽이려 했다. 지금까지 잘난 척하며 자신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일러바친 요셉에 대한 증오가 타올랐다. 안 그래도 사랑을 받지 못하는 자신들의 악행이 아버지에게 알려지면 어떻게 될까?라는 두려움에 차라리 요셉을 죽여 입막음을 하려 했다. 요셉은 르우벤과 유다의 도움으로 목숨은 건졌지만 노예신세가 되었다. 죽이는 대신 노예로 팔아버린 것이다. 이 모든 사건의 출발은 야곱의 집착적 편애였다. 우리는 이일도 요셉을 위한 연단으로 사용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을 위해 사용하여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했다. 그러나 그 아비 야곱으로 인해 요셉이 겪은 고통은 누가 만져줄 것인가? 동생을 죽이려 했고 또 노예로 팔아버렸다는 형들의 평생을 짓누르는 죄책감은 누가 감당해 줄 것인가? 인생의 집착은 항상 자신이 속한 환경에 불행을 가져온다. 그 집착의 대상에게도 그리고 집착에서 외면된 자에게도 또 그 집착하는 자신에게도 그것은 고통이다. 자신의 과도한 욕심을 채우려면 그 결과로 항상 그 자신과 주변이 피해를 입게 된다.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려, 요셉은 이집트 파라오의 경호대장 보디발의 노예가 되었다. 아버지의 관심과 사랑을 한 몸에 받던 17세의 요셉은 이제 억압과 착취와 폭력만이 가득한 세상의 사슬에 묶인 가련한 소년이 되었다. 요셉은 그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형들이 왜 자신을 죽이려 했는지 왜 자신을 팔아야 할 만큼 미워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냥 눈물만 나왔다. 나중에는 눈물도 말라버렸다. 사막의 뜨거운 바람에 목이 말랐고 눈에는 모래 바람이 덮였다.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상징과도 같은 코트는 없었다. 이제 누더기가 자신의 옷이 되고 그 누더기는 사막의 모래 색으로 물들어 그 색이 지워지지도 않았다.

이제 무엇을 해도 노예라는 자신의 상황은 바뀔 것 같지 않았다. 그래도 요셉은 내가 함께 함을 보았다. 모든 상황에서 내가 함께 해서 돕는 기적을 경험했다. 그래서 그 모든 순간에 함께 하는 나를 신뢰했다. 그 신뢰를 바탕으로 나에게 모든 일을 물어왔다.

형들이 세겜에서 죽이려 했을 때도 간절히 나를 찾았다. 그곳에서 내가 자신을 건지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자신이 노예로 팔리는 상황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그에게 그가 에굽(이집트)으로 미리 가서 그의 가족들을 구원할 계획을 세워야 함을 보였다. 또한 그의 가족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대로 큰 민족으로 성장할 것을 보였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 요셉이 해야 할 것에 대한 상세한 계획을 점차적으로 알렸다. 처음에는 구체적이지 않은 대강의 전반적인 그림만 설명했다. 그 이후 그는 나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했다. 왜? 어떻게? 무엇을? 언제? 그 질문은 다양했다. 나는 그때마다 그에게 대답을 해주었다. 때로는 그 대답을 미루어야 하면 질문을 하지 말라고 말하기도 했다.

요셉은 그렇게 노예 생활을 받아들였고 내가 함께 함으로 그는 노예였지만 믿음을 잃지 않았다. 그의 주인 보디발도 내가 그와 함께 함을 보았다. 그래서 요셉에게 모든 일을 의지했다. 요셉은 꿈을 꾸었다. 주인이 그를 그렇게도 신뢰하니 혹시 노예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 희망을 품었다. 다시 헤브론 상수리나무가 우거진 그 고향집으로 돌아갈 기대를 했다. 그는 나의 계획에 대해 즉 그의 가족을 구하기 위해 자신이 이집트에 있어야 됨을 우리에게 들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은 노예이니 비전을 이룰 것은 요원해 보였다. 차라리 고향으로 돌아가 아버지와 형제들의 집에 있으며 가족들을 이집트로 이주시키는 것이 현실적으로 보였다. 그런데 그 꿈은 우리의 계획과는 달랐다. 요셉은 자신의 방식으로 비전을 이루려 했다. 그는 자신이 신뢰하는 힘인 보디발을 의지했다. 그는 우리가 아닌 자신의 지혜와 인간적 의지처를 믿었다.

요셉의 어리석은 믿음은 결국 그 어리석음으로 인한 고통으로 되돌아왔다. 요셉은 자신이 믿던 인간에게 배신을 당했다. 그 결과 자신의 방법이 얼마나 어리석은 지 알게 되었다. 그는 믿을 수 없는 존재를 의지한 것이다. 인간이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우리다. 우리 외에는 신실한 존재가 없다. 그런데 그는 믿을 수 없는 존재에게 기대를 품었다. 그 결과는 참혹했다. 그 믿던 인간, 보디발은 자신의 아내의 거짓말만을 믿고 요셉의 말은 듣지도 않았다.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를 겁간하려 했다는 것만을 사실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분노를 터트렸다. "역시 노예 놈들은 믿을 수 없는 놈들"이라는 말도 빠뜨리지 않았다. 요셉은 자신을 그렇게 신뢰하던 존재의 밑바닥을 보았다. 역시 인간이라는 존재는 믿을 수 없는 존재다. 그 결과 요셉은 자신이 신뢰할 수 있는 대상은 세상의 존재가 아니라 완전한 우리뿐임을 알게 되었다.

요셉의 어리석은 믿음은 결국 요셉을 감옥의 죄수로 만들었다. 그러나 우리는 왕의 죄수들을 가두던 감옥에서도 우리가 요셉과 함께 함을 보였다. 우리가 요셉을 사랑함을 보였다. 그렇게 우리에게 사랑을 받은 요셉은 우리를 더욱 신뢰했다. 그리고 감옥 안의 모든 사람들이 요셉에게 우리가 함께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감옥을 관리하던 간수장도 요셉을 의지하게 되었다. 무슨 일이 있으면 기도해 달라며 달려왔다. 일을 처리할 때도 지혜를 구했다.

요셉이 갇힌 감옥에는 왕의 죄수를 가두는 감옥이라 권세를 가졌던 자들이 많이 들어왔다. 그곳의 간수장은 일개 간수장인 자신이 왕의 대신들이었던 자들을 상대하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왕의 대신이었던 자들을 최대한 공명정대하게 보살폈다. 그러나 자신도 사람인지라 실수로 죄수들이 서운함을 가질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런 자들 중 다시 왕에 의해 복권되어 권세를 얻게 되는 자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면 자신은 반드시 그들의 회복된 권세에 의해 보복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간수장은 늘 죄수들의 관리에 골머리를 썩어야 했다. 그럴 때 우리(신)의 지혜가 함께 하는 요셉은 요긴한 존재였다. 자신의 답답한 마음과 골치 아픈 문제들을 순식간에 해결해 줄 우리들(신들)의 영이 함께 하는 자가 요셉이었다. 그가 말한 것은 신(우리)이 말한 것과 같았다. 후에 파라오가 요셉에게 '신이 말씀하신다. 지금도 말씀하신다.'라는 뜻의 '사브넷 바네아'라는 이름을 준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다. 요셉의 일처리는 귀신과도 같았다. 이것을 요셉이 살던 시대의 표현으로는 '요셉은 거룩한 신들의 영이 함께 한다'였다. 그런데 요셉과 함께 한 것은 악한 잡신들이 아니었다. 우리였다. 그러니 그의 지혜와 일처리가 얼마나 대단했겠는가?


01.3.2.3.7.4. 꿈의 해석자 요셉


간수장은 요셉을 신뢰했다. 요셉에게 모든 일을 맡겼다. 요셉은 감옥의 일을 맡아보면서 왕에게 죄를 지은 대신들을 상대했다. 그들 중에는 보디발보다 권세가 강했던 자들도 있었다. 요셉은 그들을 통해 자신의 억울함을 풀고 죄수의 신분도, 노예의 신분도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신분이라도 회복해야 우리가 자신에게 준 비전을 이룰 가능성이 높아질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기회가 찾아온 것 같았다. 왕의 식사를 담당하는, 왕의 술 맡은 대신과 빵 맡은 대신이 꿈을 꾼 것이다. 왕의 식사를 담당하는 대신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자들인 것 같으나 그 당시에는 상당한 권세를 가진 자들이었다. 그리고 왕이 절대적으로 신임하는 자들이 아니면 그 관직에 오를 수 없었다. 그들은 왕의 식사에 원수들이 독을 타는 것을 막아내는 역할을 담당했다. 그들이 신뢰할 수 있는 식재료만을 사용하여 음식을 만들고 먼저 노예들에게 독성 실험을 거친 것만을 왕에게 올렸다. 특히 술 맡은 관원장은 왕에게 거의 24시간 붙어 있으면 술을 제공해야 했다. 만약 이들이 다른 마음을 품는다면 왕은 독살을 당하게 되고 왕의 권세는 다른 자에게 넘어가게 된다. 이처럼 중요한 관직이었다. 또한 왕의 파라오 옆에서 언제나 왕의 시중을 드는 최측근이었다. 이들의 한마디 한마디는 왕에게 영향을 주게 된다. 그래서 왕의 전폭적 신뢰를 받는 이들에게 사람들의 청탁이 끊임없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 대가로 받는 돈들로 그들은 나라 안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부자가 될 수 있었다. 요셉은 나의 도움으로 그들에게 꿈을 해석해 주었다. 그중 술 맡은 대신은 그 관직을 회복하게 될 것이었다. 요셉은 그에게 관직을 회복하면 파라오에게 자신의 을 부탁했다. 그가 우리의 도움으로 꿈을 해석해 준 대로 사흘 후에 술을 담당하는 신하는 직무를 회복했다. 그는 기뻐하며 감옥을 나갔다. 요셉은 이제 그가 자신의 부탁을 들어줄 것으로 생각했다.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모두 말했고 감옥생활을 통해 자신에 대해 신뢰하게 된 그가 분명 자신의 사면을 위해 노력할 것으로 믿었다.

그런데 술 맡은 대신은 요셉을 잊어버렸다. 요셉은 또 사람을 믿었다. 그리고 자신의 수단을 사용했다. 언제나 우리에게 묻지 않고 행하는 모든 것, 즉 인간 스스로의 결정에 의해 행하는 모든 것은 인본주의의 열매를 맺는다. 요셉이 술 맡은 신하를 대한 것은 단지 자신의 목적에 의한 것이다. 그 목적은 스스로 자신을 세우고 비전을 이루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에 대응하는 상대도 인간적인 이익에 따라 요셉을 대하게 된다. 술 맡은 신하는 꿈을 꾼 것은 자신과 빵 맡은 신하라고 생각했다. 그 꿈을 준 것은 신이었다. 즉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신이었다. 요셉은 단지 그 예지몽을 삼일 앞당겨 해석해 주었을 뿐이다. 요셉의 해몽을 받고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다른 무당들과 같이 부적이나 굿을 해서 정해진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 정해진 운명 안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다른 대안이 주어진 것도 아니었다. 술 맡은 대신은 살았고 빵 맡은 대신은 죽었다. 그 예언대로 되었을 뿐이었다. 이는 두려운 일이기는 했으나 요셉이 술 맡은 대신의 운명을 바꾼 것은 아니었다. 인간들이 샤먼을 의지하게 되는 것은 샤먼이 인간에게 정해진 운명을 미리 알려주고 그 운명에 대처할 방안을 알려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셉의 해몽에는 대처법은 없었다. 단지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만 있었다. 그래서 술 맡은 관원은 요셉에게 딱 그만큼의 고마움만을 느꼈다. 그리고 자신에게 위기가 찾아오지 않는 한 그리고 그 위기에 대한 대처법을 요셉이 가지고 있지 않는 한 요셉을 필요로 하지도 않았다. 이것이 인간이다. 만약 그 자리에서 요셉이 복채를 요구했다면 그는 복채를 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이상은 아니다.

왕의 감옥을 관장하는 보디발의 결정을 번복하고 요셉의 억울함을 풀어주려면 보디발 이상의 권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자신은 이제 막 복권되어 아직도 그 자리를 계속 지킬 수 있을 지도 불안하다. 그렇다면 결론은 기회를 보아 고마움을 갚을 수는 있다. 그러나 단지 노예 하나가 억울한 일을 당했다 하여 파라오가 자신의 충복인 보디발을 책망하고 죄를 짓지 않았다는 증거도 없는 노예를 풀어줄 리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 일을 뒤로 미루기로 했다. 그리고 결국에는 그의 기억 속에서 요셉의 억울한 사정은 지워졌다. 요셉의 기대와는 다른 결과였다. 요셉은 인간을 돕고 그들에게 어떤 도움을 기대한다는 것이 어리석다는 것을 아직 몰랐다. 그에게 우리가 지혜를 부어주었어도 그는 아직 세상과 세상에 속한 자들의 악함을 다 알지는 못했다. 경험이 부족하면 성령을 통해 지혜를 확장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 인간은 어려서부터 그 생각하는 바가 악하다. 인간은 도둑놈의 심보를 가졌으며 자신이 어렵고 위태롭다고 느끼면 자신이 살기 위해 어떤 짓을 할지 모르는 악마와 같은 존재들이다. 요셉은 이런 사실을 몰랐다. 인간의 이기심은 그 끝을 알 수 없다.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으면 자신에게 큰 도움을 준 자도 언제든지 버릴 수 있다. 특히 사회적으로 우위를 점한 자들의 그 사악함을 말로 할 수 없다. 그들이 사악하지 않았다면 다른 이들을 밟고 높은 자리를 차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것이 세상의 원리인 것이다. 요셉은 아직 그 비정함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는 요셉이 세상의 비정함을 알고 또 우리만이 자신을 도울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임을 깨닫기를 원했다. 우리는 인간이나 세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사실 우리는 완전히 자기 충족적인 존재다. 우리의 능력은 완전하여 다른 존재의 도움을 필요치 않는다. 우리의 성품도 완전하여 어떤 다른 존재의 위로나 애정의 보충도 필요 없다. 그런 우리가 요셉이 우리를 의지하기 바라는 것은 단지 요셉이 진정한 현실을 깨닫고 진정한 도움을 얻기 바람이었다.


01.3.2.3.7.5. 요셉의 고통


요셉은 17살에 노예로 팔려 30살에 총리가 되기까지 13년의 기간을 노예와 죄수로 살았다. 그 기간은 우리의 의도가 아닌 요셉 자신의 부주의함과 형들의 악함, 그리고 아버지 야곱의 편애가 만들어낸 비극이었을까? 맞다. 인간들의 의지를 살펴보면 그들의 삶의 결정권은 오직 그들 자신에게 있다. 그러므로 이 모든 비극은 인간들 자신의 선택에 의한 것이 맞다. 이런 기간을 네가 보냈다면 어떨까?

현대의 상황으로 각색하면 요셉의 상황은 이렇게 각색될 수 있다.
조셉은 17살이었는데 아빠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형과는 나이 차이가 많았는데 형은 일 중독이었던 아빠가 젊었을 때 낳은 아들이었다. 아빠가 40이 넘어 낳은 조셉은 아빠가 60이 되어 정년 은퇴를 했을 때 이제 십대였다. 아빠는 다 커버린 형은 이미 직장 생활을 하는 건실한 남자였으므로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아직 어린 조셉에게만 사랑을 쏟았다. 아빠의 편애를 견디다 못한 형은 조셉을 죽이려는 계획을 세웠다. 지하실에 감금하고 그곳에서 죽이려 했지만 차마 동생이라 죽이지 못했다. 그래서 인신매매단에 조셉을 팔아버렸다. 조셉은 인신매매를 당해 새우배에서 노예로 살았다. 그러다 염전 노예로도 일했다. 그러던 중 주인의 눈밖에 나서 주인과 한통속이던 지역 경찰서 서장에 의해 범죄자로 몰려 감옥에 들어갔다. 그런데 교도소 소장도 그 악한 자들과 한패였다. 그래서 감옥에서도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다른 이에게 말할 수조차 없었다. 억울함을 말했을 때 그 대답으로 돌아온 것은 폭력과 살해 위협이었다. 이런 충격적인 과정들에서 조셉은 실어증까지 걸려 더 이상 억울함을 호소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산 세월이 13년이었다.

만약 이 일이 너에게 일어났다면 너는 이일을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그 기간 동안 너는 배신에 대한 분노와 무기력한 자기 자신에 대한 한탄으로 스스로 생을 마감하지 않았겠는가? 어떤 이들은 요셉이 형들을 용서하기 전에 형들의 죄를 책망한 것에 대해 요셉이 옹졸하다고 평가한다. 만약 네가 위와 같은 일을 당했다면 어떻겠는가? 너는 요셉 정도에서 그쳤겠는가? 네가 이 나라의 대통령과 맞먹는 권력을 소유하게 된다면 너에게 위와 같은 짓을 한 형을 어떻게 하고 싶은가?

무려 13년이다. 너라면 그 무지막지한 폭력들 앞에 살아남을 수나 있었겠는가? 감히 함부로 판단하지 말기 바란다. 너희는 무지막지한 종족이라 남의 심정을 너무 모른다. 너희는 공감력이 없는 싸이코패스들이다. 우리가 보았을 때는 그렇다. 그렇지 않다면 상대들을 그렇게 함부로 판단할 수 없다. 너희의 판단에는 상대에 대한 애정과 긍휼이 결핍되어 있다. 너희는 공감력이 없는 괴물이다. 상대를 공감하지 못한다. 너희는 피 흘리는데 빠르며, 너희에게는 상대를 비난하는데 특화된 DNA가 흐른다.

혹 상대에 대해 자신이 겪은 것과 같은 고통이 있다면 그것은 공감하는 것처럼 느낀다. 그러나 그것도 상대에 대한 공감이 아니다. 너희의 내면을 잘 살펴보면 그것도 상대에 대한 공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오직 상대의 경험을 통해 나의 상처를 아파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이 공감이라 생각하는가? 아니면 남의 아픔을 듣고 이미 지나간 자신의 상처를 더 아파하는 것으로 보이는가? 너희 대부분의 공감이라는 것은 후자에 가깝다. 그래서 동병상련인 것이다. 같은 병을 알아야 아는 것이다. 그 안다는 것도 진정 상대의 고통을 느끼고 그것을 슬퍼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고통과 자신의 슬픔을 다시 회상하며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이다. 타락하여 그 기능을 상실한 인간의 그것으로는 공감이란 옛 아담의 무덤에 있는 어울리지 않는 부장품일 뿐이다. 상대가 고통스러워하고 아파해도 그것이 나의 아픔이 아니라면 너희는 결코 울지 않는다. 너희 인간들 중 많은 아픔을 겪은 자들이 좋은 상담자가 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너희는 결코 공감하는 존재들이 아니다. 단지 자신의 아픔을 슬퍼할 뿐이다. 그래도 비슷한 종류의 아픔을 통해 상대의 앞에서 울어줄 수 있다는 것만 해도 정말 다행이다. 그것이 자신의 아픔을 향한 감각이건 타인에 대한 공감이건 어찌 되었건 상대는 자신의 앞에서 자신과 함께 울어줄 인간을 하나 만난 것이다. 너희 인생에서 이런 일을 만나는 것도 참으로 희귀하다. 그러니 그것으로도 감격할 수 있다. 그러나 네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네가 사는 세상에는 진정 너를 공감할 존재가 없다는 것이다. 네가 느끼는 슬픔의 감정을 네가 느끼는 고통을 느끼는 자는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인간이 타락할 때 이미 그런 기능들은 사라졌다.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기능이다. 그 기능은 전지전능한 우리에게나 가능한 것이다. 태초의 인간은 성령과 연결되어 그 능력을 소유했다. 그래서 하와의 아픔이 아담의 아픔이 되었다. 하와가 손을 다쳐서 아파하면 우리는 그것을 느끼고 그것을 아담에게 전달해 느끼게 했다. 그것이 진정한 공감이다. 이런 전달이 없으면 인간이 다른 이의 아픔을 느낀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물론 너희가 서로 상대의 아픔 중 자신의 아픔이었던 것을 보고 상대도 자신과 같이 아플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도 공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상대의 아픔을 온전히 알지 못한다. 단지 자신의 아픔에 너도 그랬을 것이라는 글 한 줄을 올릴 뿐이다. 그런데 그마저도 말할 수 없는 위로가 된다. 왜냐하면 공감도 위로도 아닌 글 한 줄을 더해주는 인간도 거의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네가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을 요셉과 같이 겪고 있다면 너의 눈물을 닦아주고 너의 고통을 공감할 자가 있다. 나는 영원의 시간 동안 모든 것을 느꼈다. 그리고 너희 인류가 창조되던 날부터 모든 사람의 마음을 느끼고 모든 사람의 생각을 알았다. 나는 오늘도 너희를 안다. 내가 너를 안다. 나는 너를 안다. 그러니 나에게 말할 때는 나를 이해시키기 위해 설득을 펼칠 필요가 없다. 내가 공감을 느끼도록 부가적인 설명을 할 필요도 없다. 그냥 나와서 말할 기력이 없다면 그냥 앉아 있으라. 그 고통을 견딜 수 없어 정신이 아득해지고 정신줄을 놓칠 것 같으면 그 끝에서 또는 그 극악한 끝에 다다르기 이전에 내게 건져줄 것을 구하라. 나는 너희 고통으로 인해 고통하며 너희 아픔으로 인해 아파한다. 나는 모든 것을 이해한다. 누군가 너의 행위가 악하다고 비난할까 두려운가? 그러나 나는 너를 안다. 네가 어떤 세상에서 태어났는지 안다. 그리고 너는 더 이상 첫 아담과 같이 태초의 거룩을 간직한 존재가 아님을 안다. 네가 무슨 일을 했든지 다른 이들과 비교해 네가 더 악한 존재가 아님을 안다. 너희 인류의 존재의 근원을 아는 나는 너를 깊이 이해한다. 혹 내가 그렇게 너를 낮게 평가한다고 해서 자존심이 상했다면 미안하다. 그러나 네가 아직 그 상태라면 너는 나를 찾아올 준비가 되지 않았다.

나는 죄인을 찾는다. 나는 자신이 구제불능임을 깨달은 자들을 찾는다. 자신의 존재에 대해 절대절망에 이른 자들을 찾는다. 그래야 겸허히 너희는 나의 도움을 구할 수 있다.

내가 왜 요셉을 그 오랜 기간 고통의 자리에 두었다고 생각하는가? 그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은 왜 그 버림받은 자리, 잊혀진 자의 자리에 오랫동안 거했다고 생각하는가? 요셉과 같다. 그래야 절대적으로 자신을 신뢰하지 않고 나만을 신뢰한다. 사실 인간은 자신을 신뢰하면 안 된다. 자신은 신뢰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을 신뢰하는 순간 옛 아담의 타락한 본성이 자신을 망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자신을 신뢰하는 것이 어리석음인 줄 깨닫고 오직 완전한 나 여호와를 신뢰함을 배워야 한다. 그것이 바로 인생의 실패에서, 죽음에서, 저주에서 건짐을 받을 유일한 구원이다.

만약 이를 절실히 느끼지 못하고 있다면 아직도 너희는 너희 자신 스스로 신앙생활을 하려 하든지, 또는 너희 인생의 목표를 스스로 이루려 노력할 것이다. 스스로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도덕규범을 지키려 노력할 것이다. 만약 너희가 이러한 자리에 있다면 단언컨대 너희는 아직 구원받지 못했다. 심지어 교회에 다니고 영적인 신비를 만났다 해도 아직 나의 구원에는 이르지 못했다. 너희가 너희 본성의 악함을 느끼고 그것에서 벗어나려고 많은 시간을 기도에 투자하고 있다고 한다면 너희는 아직 나의 구원을 만나지 못했다. 나의 구원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한다. 구원은 자신의 노력과 힘이 소용없음을 알고, 즉시 오직 하나, 나만을 믿는 것이다. 너희의 모든 것을 해결할 유일한 답은 오직 나 예수 외에는 없다. 너희 율법을 지키고자 하는 열심은 오직 자신의 절망을 깨닫고 오직 나만을 의지함을 배우는데 소용이 있다. 아직 네가 노력하고 있다면 너희는 다시 한번 이 말을 되새기라.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오직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눅 19:16)

내가 제자들에게 한 말을 기억하라. 그러나 이 말의 뜻을 깨닫기 원하는 자야, 만약 네가 절대절망을 맛보지 않았다면 너는 결코 이 말의 진정한 뜻을 깨달을 수 없을 것이다. 그때까지 너희는 내가 악한 재판장과 같이 느껴질 것이다. 너희가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는데도 내가 너희에게 구원의 은혜를 왜 부어주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네가 나를 향한 절대신앙을 가지려면 너는 나 외에 다른 것을 믿어서는 안 된다. 다른 믿을 것이 있다는 것은 나를 절대신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입의 말과 기도가 아니라 그 자신의 행동을 보면 그가 무엇을 믿는지 알 수 있다. 인간은 의지할 것이 있으면 그 쉬운 길을 택한다. 인간은 스스로 더 의지하는 것을 따라간다. 나를 따른다고 하지만 그 삶의 실상에서는 자신의 방법을 선택한다. 그 이유는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

회사가 부도나는 상황에 다급하여 옆에 있는 사람이나 금융기관에 돈을 대출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에 나에게 철저히 묻고 나의 답을 들으며 나를 의지하고 믿고 내가 그 길이 최고의 길임을 확인해 주는 과정이 없었다면 이 사람은 나보다 돈을 더 믿는 자다.

광야의 이스라엘에 대해 너희는 가혹한 판단을 내리는 경우가 많다. 이스라엘은 광야를 걸으며 목이 말랐다. 너희는 광야에서 이스라엘과 같이 헤매어보지 않아서 그들의 심정을 모른다.

만약 네가 광야나 사막에서 하루 동안 물을 마시지 못했다면 너는 극심한 갈증 가운데 일사병으로 쓰러져 죽을 것이다. 반나절 물을 마시지 못했다면 너는 더 이상 이성이 작동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너를 광야로 초청한 자가 옆에 있다면 그에게 원망뿐 아니라 욕설을 내뱉을 것이다. 물도 준비하지 않고 광야를 가게 하다니 미친 것이 아니냐며 욕지거리를 내뱉을 것이다. 어찌 보면 이는 당연한 반응이다. 그러나 이런 자들은 나의 구원에 이른 자들이 아니다. 나를 향한 절대믿음을 소유한 자들은 짜증을 내기 전에 나에게 먼저 묻는다. 잠시 짜증이나 탈수에 의한 죽음을 두려워하는 두려움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즉시 내게 묻고 나의 답을 듣는다면 바로 평정을 찾고 나를 선택할 것이다. 이들은 내가 목마름을 해결해 주지 않는다면 그 이유를 묻는다. 그리고 나를 신뢰한다. 심지어 물이 없고 양식이 없어 굶어 죽어가도 나를 향한 고난을 받아들인다. 굶어서 순교하는 은혜는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니라고 나를 찬양한다. 왜냐하면 내가 완전한 사랑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줄 알기 때문이다. 내가 자신들에게 주는 길은 완전한 길인줄 안다. 만약 이러한 자들은 나를 믿음으로 죽어야 하는 자리에 선다면 그 죽음도 받아들인다. 그것이 바로 순교다. 이것이 절대믿음이다. 그러한 믿음이 없으면 나의 나라에는 들어올 수 없다. 그러한 믿음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요한 웨슬레가 폭풍우에 침몰할 것 같은 배에서 모라비안들이 찬양하는 모습을 보고 자신은 신앙이 없음을 깨달았다는 일화를 아는가? 죽음 앞에서도 나를 믿고 나를 찬양하는 자들은 일반인들이 보면 정상인이 아닌 미친 자들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나를 믿는 자들은 그러하다. 교회를 다녀도 너무 빠지지 말라고 말한다면 너희는 너희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거부하는 자들임을 깨달아야 한다.

너희가 나보다 더 믿는 것이 있다면 너희는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눅 14:25-35 개정

25수많은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26무릇 내 게 오는 자가 자기 부 모와 처 자 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27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28너희 중의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 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29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30이르되 이 사람이 공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31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 명으로써 저 이 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32만일 못할터이면 그가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33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34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 도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35땅에도, 거름에도 쓸데없어 내 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시니라


25~27, 33절
내가 성경에 기록한 말을 보고도 너희는 이해하지 못한다.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고 자신의 자녀나 부모나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버리지 못한다면 나를 사랑할 수 없다. 인간이 이런 선택을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내가 마태를 통하여 기록한 성경에 왜 이 말의 끝에 망대를 쌓음에 대해 언급하는지 너희는 잘 모를 것이다.


28~30절
망대를 쌓는 자가 그 비용을 계산하는 것처럼 따져서 나를 믿을지 자신이나 다른 것을 믿을지 선택하라는 것이다. 그 계산이 끝나면 너희는 절대적으로 나를 신뢰할 수밖에 없다. 왜 사자굴에서의 죽음을 받아들이는지 알겠는가? 그것이 가장 자신에게 좋은 길이기 때문이다. 나를 선택하여 사자굴에 들어가면 나의 칭찬을 받고 하늘의 별과 같이 빛나게 될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를 선택하여 나의 나라 편에 서는 순간 세상과 원수가 되어 원수가 언제나 죽이려 드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나를 선택하여 순교하면 그 순교를 통해 수많은 영혼들을 살리는 부흥이 올 것이고 그 모든 상을 자신에게 줄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렇게 계산해 보라는 것이다. 나를 부인하고 살아남으면 육신의 목숨은 건질 수 있지만 결국 자신의 영혼은 죽음에 내버려질 것을 알기 때문이다.


31~32절
멀리서 오는 왕의 군대와 싸워 이길 수 있는지 계산하여 보고 이길 수 없다면 항복해야 한다는 말도 같은 말이다. 나와 나의 나라를 대적하고도 또는 배신하고도 살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 길을 선택하겠지만 나의 심판을 피할 자는 없다. 그러므로 나에게 항복하고 오직 나를 의지하는 것이 완전한 길임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33~34절
그런데 이렇게 나를 믿지 않는 자들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가졌으나 그 능력은 없는 자들이다. 마치 소금이 맛을 잃은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 소금은 소금이 아닌 가짜다. 그러므로 그러한 자들은 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밟힐 뿐이다. 왜 대한민국에서 나의 이름이 땅에 떨어졌는지 아는가? 왜 교회가 세상에 지탄을 받고 세상에게 밟히는지 아는가? 바로 너희와 같은 맛을 잃은 가짜 기독교인들 때문이다. 진정 나를 믿는 그리스도인이 하나 있다면 그와 그 주변의 모든 자들은 내가 살아있어 그와 함께 함을 알게 된다. 그리고 나를 믿는 그리스도인이나, 또는 나를 대적하면 어떤 두려운 일이 일어나는지 알게 된다. 맛을 잃은 가짜들에게는 내가 함께 하지 않지만 진정한 절대신앙을 가진 자에게는 내가 함께 한다. 그러니 내가 세상의 모든 비방을 이기고 세상이 두려워할 일을 행한다. 요셉을 보라 어떤 상황에서도 내가 함께 하면 모든 사람들이 알게 되고 그를 신뢰하고 또 존중하고 기본적으로 두려워한다. 혹 죽어 순교한다면 더 큰 역사로 내가 함께 한다. 너희는 대동강의 토마스의 순교를 아는가? 너희는 스데반의 순교를 아는가? 너희는 야고보의 순교와 바울과 바나바가 선교여행을 떠난 시점의 절묘한 시간의 경륜을 아는가? 그들의 순교는 열방을 살리는 부흥을 가져왔다. 그들은 죽어서 더 세상을 두렵게 진동시켰다. 그들은 사탄의 나라의 성문을 즉 대적의 문을 얻었다. 그리고 그 문을 열어 사탄에게서 나의 나라로 영혼들을 탈취하여 온다. 너희는 그러한 부흥의 기폭제가 바로 참 믿는 자의 순교의 피임을 아는가? 참 나를 믿는 자는 어떤 실패도 실패가 아니며 어떤 곳에서도 승리한다. 처참한 실패와 같은 죽음(순교)도 승리가 된다. 왜냐하면 나의 나라는 패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어느 나라에 설 것인지 결정을 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팔아서라도 이 값진 나라를 사야 한다. 이를 계산해보지 않고 알지 못한다면 너는 아직도 거듭나지 못한 짐승의 상태다. 네가 교회를 다니고 도덕률을 지킨다 하더라도 너는 여전히 변화되지 못한 죄인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변화의 기준은 말이 아닌 행동의 능력에 있다.

너희가 아직도 변화되지 못한 가짜 그리스도인이라면 너희는 계산하여 보라. 그리고 깨닫고 목숨을 죽일 수 있는 사람을 두려워 말고 영혼을 멸하는 자인 나를 두려워하라. 진정으로 계산하여 보라. 너희 어둠의 나라에서의 삶이 나의 빛의 나라가 임할 때 심판을 받을지 상을 받을지 생각하여 보라. 만약 나의 심판에 네가 합당하지 않고 너의 나라가 그 심판을 막아줄 수 없다면 진정으로 항복하고 나의 나라로 전향할 것인지를 결정하라.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너는 목숨을 잃을 것이고 심판에 이를 것이다. 이러한 것을 계산해보지 않은 자는 결코 절대절망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자신이 절대절망의 상태임을 알아야 나만을 믿게 된다. 정말 자신이 절대절망의 상태인지 알아보라. 그리고 정말 세상에 나 외에는 의지할 자가 없는지 계산하여 보라.

요셉의 그 절망의 삶이 그리고 마지막 만 2년의 기다림의 절망이 요셉에게 어떤 축복이었는지 다시 생각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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