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스겔 Jun 08. 2024

3.6. 우리 시대의 거짓신앙



3.5.3.2. 율법의 본원적 기능


여기서 율법의 기능 중 하나가 설명되고 있는데 율법은 정죄하여 모든 사람이 죄인임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기준이기는 하나 자연인은 그것을 완벽하게 지킬 수가 없다. 그래서 율법은 모든 사람을 죄인으로 낙인찍는다. 사실 죄인이라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율법이다. 그래서 현대 교회 안에서도 이런 과정을 거쳐 예수님을 믿게 되는 극 소수의 사람들이 있다. 율법을 통해 자신이 죄인임을 철저히 깨닫게 된다. 율법을 정말 지키려고 해 본다면 알게 된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결코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율법을 지키지만 마음속에는 탐심이 가득한 것을 철저히 깨닫게 된다.


3.6. 우리 시대의 거짓신앙


만약 그런 경험을 해보지 못했다면 그는 철저히 속아 눈이 가려졌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자신은 율법을 잘 지키고 교회 생활 열심히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바리새인과 같은 상태다. 심지어 바리새인과는 비교도 할 수 없으면서 현실과 다른 자기 허상을 믿고 자기애에 빠진 나르시스적 인격장애자다.


3.6.1. 우리 시대 거짓신앙


사실 말로는 은혜라고 하지만 실재로는 그 믿음도 없고 확신도 없으며 또 교회생활에서 열심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칭찬받기 원하는 신앙도 율법주의의 또 다른 형태다. 은혜가 아닌 자기 열심이며 그 동기는 자기 자랑이다. 믿음의 의가 자신을 집어삼키고 자신 안에 하나님을 향한 열망이 타올라서 그 열망을 주체할 수가 없고 새벽부터 그 열정이 타올라 하나님을 위한 일만을 하게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구원받은 믿음이 아닌 것이다. 이래야 바리새인들 보다 나은 의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바리새인들보다 하나님 앞에 더 의로운 것이다. 물론 구원 자체를 얻는 기준은 오직 믿음이다. 의롭다 함을 받는 것도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다.. 그러나 그 구원받는 믿음은 나를 송두리째 변화시킨다. 변화의 능력이 나를 삼켜버린다. 바리새인들은 의롭다 함을 얻기 위해 그렇게 노력하고 살았다. 심지어 중심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열심도 있다. 바울은 그 열심이 특심이었다. 구원받기 전의 바울 같은 열심을 현대 교회에서는 찾을 수 없다. 그러니 현대 교회에는 구원받은 자가 없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보다 나은 의를 소유한 자는 없는 것이다. 아니 바리새인과 서기관 수준의 의를 가진 자도 없다. 구원받기 전의 바울과 같은 수준의 의를 가진 자도 없다. 참 회심한 자는 구원받기 위함이나 자기만족을 위함이 아닌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는 열정이 속에서 불타올라 그 사랑으로 인해 바리새인보다 더 깊은 열심으로 살아간다. 감히 바리새인은 감당할 수 없는 삶을 살게 된다.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온 세상이 버려도 바울과 같이 달음질하게 된다.  


그러나 당신의 열심이 특심이라고 해서 구원받은 징표가 될 수는 없다. 타고난 기질이 열심을 가진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애니어그렘 1번이나 8번이라면 특히 그렇다. 애니어그렘 1번은 자기만 옳고 8번은 그 기준이 파렴치하다. 모두 자기 기준이다. 우리나라 리더들은 특히 애니어그렘 1번이나 8번이 많다. 교회 리더들 중 특히 대형 교회 목사들은 대부분 애니어그렘 1번이나 8 번들이다. 열심으로 대형교회를 만든다. 그러나 그 심령 안 가장 깊은 곳에서 예수님께서 심어 놓으신 불꽃이 아닌 자기 기준이 불타고 있다면 그것은 지옥의 불꽃이다. 대부분은 많은 사람을 모으고 큰 교회를 세우고 많은 신앙고백자를 만들어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중세 교회는 그 전체 대부분이 지옥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유럽 전체를 압도하는 교세를 자랑했다. 그래서 우리는 경각심을 가지고 주의해야 한다. 그들이 열심을 내어도 그것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의 수준이다. 그것을 넘어설 수 없다. 그들의 거짓신앙은 거짓 매가처치들을 만든다. 그곳이 하나님이 세우신 곳인지 사람이 세운 곳인지 분별할 수 있는 가장 쉬운 길이 있다. 그 담임목사가 행하는 신앙을 성도들이 모두 행하고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그곳은 성령님께서 세우신 곳일 가능성이 높다. 성령님은 누구에게나 동일하심으로 동일한 성령님이 동일하게 역사하신다. 물론 그 열정이 순수한 하나님만을 향한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담임목사가 행하는 신앙을 성도들은 감히 우러러 볼뿐 자신들은 범접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곳은 사람이 자기 열심으로 세운 곳이다. 성도들이 열심으로 하지만 담임 목사의 경지에는 결코 도달할 수 없다고 말하고 그 목사를 높인다면 그곳은 인간이 자기 방법으로 세운 곳이다. 인간들은 각자의 열정의 크기가 다르므로 열심이 특심인 자의 열심을 일반적인 성도들이 따라 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담임 목사의 삶의 수준도 그냥 바리새인의 수준이다. 성자처럼 보여도 그냥 아주 특별한 역사의 별종들은 살 수 있는 그런 삶이다. 오직 성령님만이 살게 할 수 있는 삶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하지만 성령님으로 그 삶을 살게 하신다. 그러니 담임목사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삶을 살아도 성도들도 그 삶을 살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적인 열심으로 사는 목사도 물론 자신의 열정은 하나님만을 향한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눈이 가려지면 자신을 볼 수 없다. 무엇이 하나님의 길인지 말해 달라며 멀리 인도에서 나는 나드 향유를 수입하여 하나님께 드린 열심을 가진 자들이 과연 자신들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음을 알았겠는가? 예수님을 대적하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눈이 가려진다는 것은 진리를 완전히 반대로 해석하여 대적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연인은 모두 그렇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오직 거듭난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눈을 열어 주셨을 때만 진리를 진리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렇게 인간은 자신의 상태의 비참함을 알아야 겨우 하나님 앞에 겸허히 진리를 찾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자연인인지 거듭난 자인지 성경과 믿음의 선진들의 글을 통해 심각하게 고민하고 찾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 시대의 거짓신앙 속에 평생을 살다 지옥의 백성이 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서구의 대부분의 신앙인들은 지옥백성들이었다. 복음이 서진했다고 믿을 정도로 그 수는 많았다. 한 때는 유럽 전체가 자신들은 기독교인라고 생각했다. 1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러나 그들은 대부분 지옥 백성이었고 그 가운데 구원받은 자가 나오면 핍박하여 죽였다. 복음의 서진은 단지 원수의 허울 좋은 허상이었다. 바로 거짓 신앙이 그들 속에서 행한 속임수다. 이 시대도 비슷하다. 예수님께서 좁은 길, 바늘 귀라고 표현하신 이유가 있다. 사람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길이 구원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시대도 중세와 다르지 않다. 대부분의 교회에 다니는 99.999999999999%의 사람들은 지옥의 불쏘시개들이다. 이렇게 말해도 못 알아듣는다. 자신은 해당사항이 없다고 생각한다. 특히 거짓신비주의에 빠져 있다면 그 신비적 현상들로 인해 자신은 구원받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마음의 중심으로부터 바리새인과 서기관보다 나은 의가 임하지 않았다면 당신은 지옥의 백성이다. 일부 그런 마음이 생겼어도 여전히 구하는 것이 삼박자 구원이라면 당신은 지옥의 백성이다. 그래도 이 정도는 있어야지 하면 당신은 지옥의 백성이다. 집 한 채는 또는, 직장은 또는, 자식은 있어야지 하면 당신은 지옥의 백성이다. 그리고 그것이 채워지지 않을 때 원망이 나오고 예배에 오고 싶지 않다면 당신은 지옥의 백성이다. 마태복음 5장의 예수님의 기준은 이런 기준이다. 성경이 그렇게 말씀하시는지 아닌 지 살펴보기 바란다. 아마 이미 거짓신앙에 세뇌되었다면 아무리 보아도 그 본문이 그렇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아 인생들은 지킬 수 없구나 그러니 예수님이 필요하지'라고 보이면 당신은 거짓신앙에 세뇌되어 있다.


마태복음 5장을 제대로 본다면 제자들과 같이 '그렇다면 누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라는 말이 나와야 한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도 동일하게 그런 마음이 들어야 한다. 오히려 '내가 성경에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는 한 거야?'라는 질문이 나와야 한다. 우리는 마태복음 5장뿐 아니라 부자청년의 이야기를 읽으면서도 그런 마음이 들지 않는다. 이미 우리는 거짓신앙에 세뇌가 되었다. 단지 '그러니 예수님 믿어야지, 이런 깨닫지 못한 어리석은 제자들 같으니'라고 하는 생각이 대부분 든다. 그 생각이 거짓신앙의 징표다. 이 시대 모든 성도와 신학자와 목사들이 그렇게 생각해도 이미 그들 모두는 이 시대의 거짓신앙에 세뇌되어 있는 것이다. 그 세뇌된 자에게 무엇을 말해도 소 귀에 경 읽기다. 그 본문을 100번을 읽어도 그렇게 계속 보인다. 그것이 세뇌의 무서움이다. 이런 현상은 세뇌가 아니라도 수학문제를 풀었는데 틀렸다는 결과가 나왔을 경우에도 나타난다. 그 틀린 문제를 붙들고 아무리 스스로 점검해도 왜 틀렸는지를 모르는 것과 같다. 특히 그 문제가 너무 난해하고 어려워 일반인들이 풀어내기 어렵다면 더욱 그렇다. 스스로의 사고 속에 이미 틀린 사고가 있기 때문에 문제 풀이를 틀린 것이다. 그 사고를 바로 잡지 않고 아무리 스스로 다시 점검해도 계속 무엇이 틀렸는지 알 수 없는 것과 같다. 내가 수학강사로 일할 당시에 유명한 학원의 매년 발행되는 교재에 오랫동안 실려 있던 고난이도 문제가 있었다. 그 문제는 문제 자체에 오류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 학원은 한국에서 오프라인 학원으로는 최대의 학원이다. 그런데 그 유명하다는 학원의 수많은 유명강사들이 그 문제가 오류가 있는지 알지 못했다. 심지어 내가 설명해도 잘 모르는 경우도 있었다. 수학과 출신의 베테랑 강사도 동일했다. 그런데 많은 강사들이 듣고 난해하기는 하지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아 들었다. 그런데 오랜 세월 동안 그 문제와 정답의 풀이가 가지고 있는 오류는 발견되지 못했다. 거짓신앙은 이렇게 난해한 문제일 수도 있다. 세뇌당하면 전혀 다른 것을 생각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또 그런 오류가 있는 개념을 머리에 품고 있으면 아무리 옳은 것이라도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죽은 정통주의는 교리적으로는 완전히 정통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적도 없다. 하나님의 형용을 본 적도 없다. 여기서 더 나가면 중세교회와 같이 아주 미묘한 교리 부분에 이단성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그 근본적인 교리는 정통을 유지한다. 그래야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거짓신앙 안으로 포섭할 수 있다.

신비주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형용을 본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자신의 의로 삼는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만이 할 수 있으니 그것을 할 수 없는 자들은 자신의 신봉자(노예)가 되어야 한다고 선언한다. 그래서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하대하는 것도 서슴지 않으며 그들을 자기 몸종 부리듯 하는 것도 서슴없이 한다. 이것도 자기의를 높이는 거짓신앙이다. 결국 그들은 자기 욕심에 미혹되어 사탄과 그 동료 악령들의 음성을 듣기까지 타락하게 된다.


결국 거짓신앙은 사람들을 거짓성도로 만들고 거짓으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믿게 만든다. 그들의 신앙은 모두 모조품일 뿐 그 안에 구원은 없다. 그리고 하나님을 만나는 만남도 없다. 그들은 생화가 아닌 조화다. 모양은 같지만 향기도 없고 그 안에 생명도 없다. 또는 살아있고 모양도 비슷하지만 가라지다. 밀과 가라지는 서로 닮았으나 하나는 알곡이 있고 하나는 단지 잡초일 뿐이다. 그들은 성령님에 취한 것이 아니다. 정말 세상 술에 취한 것이다. 바울은 술 취하지 말라라고 했다. 이 세대가 악하니 세월을 아끼라고 했다. 거짓신앙은 그렇게 인생들의 평생을 미혹하여 허비하게 하고 그 인생들이 죽어 눈을 떴을 때 그곳이 지옥이 되게 한다.


3.6.2. 갈라디아 거짓신앙의 핵심-율법주의


갈라디아서의 거짓신앙의 표면적인 모습은 바로 율법주의다. 율법주의는 육체의 모양을 내고 그것을 자랑한다. 자기 스스로 행한 것이 옳음을 인정받기 원하는 것이다. 1 세기의 배경하에 유대주의의 특징을 그대로 가지고 예수님을 믿는 것에 더해 구약 율법도 행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그중 유대인들이 핵심으로 생각하는 것이 바로 할례였다. 할례는 유대인들의 생각에 유대인의 표다. 이방인도 하나님의 자비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데 그때는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 했다. 할례는 하나님의 선택받은 민족의 몸에 새긴 증표다. 그래서 나면서부터 유대인이라 난지 8일 만에 받은 할례는 자랑 중에 자랑이었다. 바로 유대인 자신들이 나면서부터 하나님께 선택받았다는 표였다. 여기에 이방인으로 할례를 받고 들어온 자들은 이방 개였는데 아량을 베풀어 사람으로 인정해 주었지만 그래도 그 원래 본질은 개들이었다. 그들은 말도 안 되는 아량을 베풂 받기는 했지만 여전히 나면서부터 유대인이 된 자들과는 비교도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 개들이 할례도 받지 않고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유대인들 입장에서는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유대인의 선민사상은 자부심이지 신앙이 아니다. 오직 자기의에 불타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거짓신앙이다. 그 핵심이 바로 할례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주장한 율법주의의 핵심은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3.6.3. 우리 시대 거짓신앙의 핵심-값싼 신앙고백


우리 시대 거짓신앙의 핵심은 무엇일까? 바로 값싼 신앙고백이다. 사영리나 기타 복음 전도를 듣고 믿는다고 지적이나 의지적으로 동의함을 고백하면 신앙을 고백했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그 안에는 입술의 말이 진실인가? 에 대한 검증도 없다. 그 지적 동의조차 확실하게 확인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 예수님(성령님)을 인격적으로 만난다거나 성령님의 세례는 포함되지도 않는다. 삶을 근원적으로 변화시켜 더 이상 세상에 살지 않게 하는 불덩어리나 육신의 더러움을 미워하게 할 거룩한 생수의 강은 없다. 자신의 삶을 통회하는 슬퍼함이 없다. 그렇다면 그에게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 저가 위로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가 적용이 되겠는가? ‘영에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요’가 적용이 되겠는가? 그에게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가 실제로 행해지겠는가? 사실 전도하는 자들도 그것은 기대조차 않는다. 단지 한 명을 교회로 오게 하는 것에 급급하다. 그리고 숫자를 채우고 자신의 의로 삼기에 바쁘다. 그 영혼이 구원받는 것은 나중 문제다. 교회 생활하다 보면 되겠지 하고 그냥 그것은 무시해 버린다. 사실 그렇게 영접하면 구원받았다고 교회에서 가르치니 그냥 구원받은 것으로 믿어버린다. 중세 기독교의 모습과 같다. 껍데기는 다르지만 그 속살이 같다. 그 중세의 거짓신앙을 벗어난 루터가 가지기 원했던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확신은 없다. 여러 번 강조하여 말하지만 루터가 지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님을 믿음으로 의가 온다는 것을 모른 것이 아니었다. 단지 벼락에 맞아 죽은 친구를 보는 공포 앞에서 즉 지옥의 불길 앞에서 그것을 벗어날 의가 자신 안에 있다는 확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지적 동의로는 가질 수 없는 확신이다. 오직 바울과 같이 다메섹 도상에서 그가 핍박하던 예수님을 만날 때만 가능한 일이다. 그 믿음은 루터와 같이 자기 생명을 걸게 만든다. 복음을 고수하기 위해 시대와 맞서 자신의 생명을 불사르게 만든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구원은 지금 팔고 있는 싸구려 거짓복음과는 다르다. 그들이 싸구려 복음을 파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 영혼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영혼들을 통해 주어지는 것에 관심이 있는 것이다. 그들이 내는 헌금에 관심이 있다. 그리고 그들이 모여 형성하는 전체 숫자에 관심이 있다. 그 숫자가 많아야 어깨에 힘주고 다닐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는 또 다른 면죄부를 팔고 있다. 중세에 돈 받고 죄 사함을 약속한 것이나 교회 숫자를 채우고 헌금을 하게 하려고 싸구려 신앙고백을 판 것이나 모두 면죄부를 판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양들을 떡 먹듯 하고[1] 있으면서도 자신들이 그런 짓을 한다고는 생각조차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양을 보호하는 자들이 아니라 그 양을 잡아먹는 이리와 같은 자들이다. 그들은 양들이 정말 구원받고 잘 자라는 것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 양들을 통해 자기가 어깨에 힘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거짓복음을 팔고 나서, '왜 양들이 변화되지 않느냐?'고 불평을 하는 어리석은 자들이다. 자신들이나 양들이나 모두 거짓복음에 속아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불나방들임을 꿈에도 모르는 욕심에 세뇌당한 식탐의 늑대들일뿐이다.


이와 관련되어 전해 들은 사건이 있다. 한 단체가 있었는데 한 때 이단으로 몰렸었다. 그런데 그 단체가 이단으로 몰리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는데 그 사건에 대해 전해 들었다. 사실 여부는 잘 모르겠다. 사건 당사자의 설교 녹음을 들었지만 내가 직접 그 사건현장에 있지 않았기에 확인할 수는 없다. 아마 그 교회 집회 녹음을 들으면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전해 들은 것에 대해 그냥 이야기하려고 한다. 판단은 독자 여러분들이 하기 바란다. 한 목사님이 다른 교회에서 집회하는 도중에 그 교회 장로님 한 분이 일어나서 회개하며 외쳤다고 한다. “목사님 지금까지 저는 예수님을 믿지 않고 교회에서 문제만 일으키고 담임 목사님 괴롭혔는데 이제 회개하고 진짜 예수님 믿겠습니다.” 너무 큰 은혜가 임하니 자신도 모르게 일어나 회개하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그 교회 담임 목사님이 이 장로님을 따로 불러서 책망을 하셨다고 했다. “아니 당신이 지금 그런 소리를 하면 내가 뭐가 됩니까?” 자기 밑에서 신앙생활 수십 년 하고 장로까지 되었는데 구원도 못 받았다면 담임목사로서 자기가 체면이 안 선다는 말이었다. 그 이후로 그 교회 담임 목사님이 그 집회를 인도한 목사님을 뒤에서 거짓으로 음해하고 이단으로 몰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담임목사님이 한국에서 아주 큰 교단에서 정치적 힘이 강했다고 한다. 그래서 결국 집회를 인도한 분이 이단으로 몰렸다고 한다. 이 전해 들은 것이 사실일까? 판단은 여러분에게 맡기겠다. 이외에 내가 직접 경험한 것은 수도 없이 많다. 그들은 하나님의 양들을 떡 먹듯 먹는 자들이다. 그 영혼 하나가 구원받아도 기뻐하지 않는다. 그것에 따르는 자기 이익만 생각한다. 그 둘을 같이 생각해도 사실 마찬가지다. 그들의 신은 자기 배다. 거듭나지 않은 자연인은 모두가 동일하다. 선량한 것 같아도 동일한 죄인이다. 오죽하면 중세 수도사들의 필독서였던 『명상록』을 집필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극심하게 기독교를 박해한 로마황제였겠는가? 아무리 인품이 훌륭하고 지식이 뛰어나도 자연인은 어쩔 수 없다. 그 본능의 한계가 있다.


3.6.4. 십자가의 능력


그래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어야 한다. 옛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그것은 문자 상의 표현이 아니고 실제로 죽어야 한다. 그 옛 본성이 죽는 것이다. 그것을 경험한다는 것은 삶의 모든 것이 전환되는 것이다. 그 방향을 틀어서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그 전날 삶은 잊어버리고 오늘 또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하지 못하는 자신을 책망할 정도로 열정에 불타오르는 것이다. 새벽부터 그 사랑에 타오르다, 저녁 잠들 때에 지쳐서 쓰러지는데도 생각해 보면 자신은 여전히 부족하다는 마음이 간절한 것이다. 자신의 전 재산을 나누어 주고 맨발의 광인 같은 전도자가 된 최춘선 목사님이 “맡긴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요. 그러나 (자신의) 불충성, 불순종 말도 못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때 그 말을 듣고 눈물이 흐르지 않는 자들은 모두 가짜다. 거듭나 하나님의 불덩이가 있는 자들은 그 말의 뜻이 무엇인지 듣자마자 목이 메어 올라오기 때문이다. 


새로 태어나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을 살 수 있다. 율법의 의도인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 수 있다. 죄에 매여 율법을 지킬 능력이 없는 자들은 모두 죄의 종이다. 그러나 그 죄를 이기고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자들은 자유자다. 율법의 의가 아닌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능력으로 죄를 이기고 하나님의 선인 율법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자신 안에 불타오르는 것이다. 오순절의 성령님은 그 불과 같이 우리 안에 타오르신다. 그렇게 불타 올라도 예수님의 사랑을 생각하면 자신이 더 순종하고 더 사랑하지 못한 것에 대해 가슴이 메어진다.[2]


예수님을 믿는 의로 사는 바울은 율법에 대해 죽었다. 십자가에 자신의 욕심과 정을 못 박았다. 이 말은 율법을 행함으로 자기의를 의지하는 거짓신앙을 떠나 예수님을 믿고 그 예수님을 통해 주어지는 능력으로 사는 하나님의 자원으로 사는 삶을 말하는 것이다.

아담의 후손으로 사는 것은 우리 자신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하다. 오직 예수님으로만 가능하다. 우리는 자신의 율법적인 의로 하나님의 기준을 만족시킬 수 없다. 오직 나는 나로 살아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할 수 없다.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음으로 살아야 하나님의 영광 앞에 나갈 수 있다. 이 말을 1세기 사도바울의 문체로 쓰면 다음과 같다.


 2:20-21 바른

20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이다. 내가 지금 육체 안에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해 자신을 내어 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21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하지 않는다. 의가 율법으로 말미암는다면, 그리스도께서는 헛되이 죽으신 것이 된다.


          

[1] 시편 14:4 바른

4악을 행하는 모든 자는 무지하지 않으냐?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한다.


시편 53:4 바른 

4악을 행하는 사람이 어찌하여 깨닫지 못하느냐? 그들이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하나님을 부르지 아니하는구나.


[2] 이렇게 반복적으로 말하는 이유가 있다. 이미 거짓신앙을 가진 자들은 같은 말을 하여도 전혀 다르게 알아듣기 때문이다. 심지어 한 번씩 기존 교회에서 쓰지 않는 용어를 사용하는 이유도 그것이다. 그래야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생각이라도 해보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전 21화 3.5. 1 세기 대적의 도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