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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스겔 Jun 15. 2024

3.7. 이사야 시대의 거짓신앙 1

이사야 시대의 신앙은 우리 시대의 신앙과 너무나 닮아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이사야 시대를 지나 마지막 멸망을 앞둔 예레미야 시대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3.7.1. 이스라엘[1]의 거짓신앙


원래 이스라엘은 야곱의 12 아들들로 이루어진 지파들이 가나안을 정복하여 자신들의 땅을 분배받아 살았다. 원래 한 나라였는데 통일 왕국의 솔로몬 왕의 범죄에 대한 징계로 왕국은 북왕국과 남왕국으로 분열되었다. 원래는 모두 유다 지파인 다윗의 계보를 잇는 왕들이 다스렸는데 북쪽에 있던 나라들이 반역하여 갈라져 나갔다. 솔로몬은 하나님을 떠나고 하나님께 대해 반역한 신앙을 가졌었다. 자신이 동서남북의 주변국들에서 얻은 후궁들이 믿던 타국의 신들을 섬겼다. 하나님만을 섬겨야 하는 이스라엘의 왕이 타국의 거짓 신들을 섬긴 것이다. 솔로몬이 이렇게 한 것은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고 하나님의 사랑을 배반한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께 반역한 솔로몬의 죄와 같이 솔로몬의 나라에도 솔로몬과 같이 반역하는 자들이 생겨났고 그런 반역이 일어나 북쪽의 나라가 갈려져 나갔다. 남쪽에 원래 있던 나라는 이스라엘의 12 지파 중 2개의 지파가 남았다. 원래 이스라엘을 다스렸던 베냐민 지파와 그 베냐민 지파의 사위였다가, 왕이 된 다윗의 가문 유다 지파만 남았다. 이 두 지파가 원래 이스라엘의 왕가였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들이 원래의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다윗의 후손 르호보암 왕을 버렸다. 이렇게 된 것은 앞에서 언급했지만 원래 이스라엘을 다스렸던 다윗 왕의 아들 솔로몬 왕이 하나님을 버리고 반역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다스렸던 백성들도 솔로몬 왕의 아들 르호보암 왕을 버리고 반역했다. 


북쪽에 반역한 나라는 사마리아를 수도로 했다. 그리고 남쪽에 원래 있던 나라는 원래의 수도인 예루살렘을 수도로 삼았다. 원래 나라의 모든 백성들이 왕을 배반하여 떠났다. 그래서 그들이 원래 나라의 이름 이스라엘을 그대로 사용했다. 그리고 쫓겨난 왕에게는 왕 자신의 지파들만 남았다. 그래서 쫓겨난 왕은 자신의 지파의 왕이 되었다. 바로 유다 지파의 왕이 된 것이다. 그래서 남쪽 나라의 이름은 유다가 되었다. 그 유다 지파에 원래 이스라엘의 원조 왕가였던 베냐민 지파가 함께 했다.


이런 상황이 벌어지면 다윗 혈통의 왕들도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왔어야 했다. 그런데 그렇지를 못했다. 하나님을 사랑한 왕은 몇 명 되지 않았다. 다윗 계보의 왕들은 다윗의 아들 솔로몬과 그 아들 르호보암과 그 아들 아비야 그리고 그 아들 아사 그리고 그 아들 아하시야 그리고 그 아들 여호람과 그 아들 여호사발과 그 아들 요아스 그리고 그 아들 아마샤였다. 그 후대들은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므낫세, 아몬, 요시야,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여호야긴, 시드기야다. 이들 중 솔로몬 이후의 왕들 중에 여호사밧과 히스기야와 요시야 세 왕을 제외하고는 모두 하나님을 배반한 자들이었다. 이들은 솔로몬이나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보다 더 큰 범죄를 저질렀다. 그래서 더 큰 심판들이 다가왔다. 주변의 거짓 신을 섬기던 이방인들의 나라가 쳐들어와 약탈을 하고 괴롭혔다. 그래도 회개하지 않았다. 자신들을 보호해 줄 하나님을 버렸으니 결국 주변국들의 먹잇감이 되었다. 강한 제국이었던 앗수르가 쳐들어왔다. 이때 북쪽의 반역한 왕국 이스라엘은 멸망당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도 하나님께로 돌이키지 않았던 남쪽 왕국도 바벨론에 의해 멸망을 당한다. 초대왕 사울부터 시작하면 BC 1050~ BC 586년까지 왕국이 지속되었다.


3.7.2. 이사야와 우리 시대의 거짓신앙


이사야는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활동했던 선지자다. 이사야서는 이 시대에 남왕국 유다와 그 수도인 예루살렘에 관한 계시다(사 1:1).


3.7.2.1. 하나님을 버림


이스라엘(남북 왕국)의 죄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버린 것이다. 율법을 지키지 않은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하나님보다 세상을 사랑했다. 돈을 사랑하고 세상의 쾌락과 명예를 사랑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이유도 세상에서의 성공을 빌기 위해서였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상황에 대한 심정을 이렇게 토로하고 계신다.


Isaiah 1:2-3 공동개정

2하늘아 들어라, 땅아 귀를 기울여라. 야훼께서 말씀하신다. "자식이라 기르고 키웠더니 도리어 나에게 반항하는구나. 3소도 제 임자를 알고 나귀도 주인이 만들어준 구유를 아는데 이스라엘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내 백성은 철없이 구는구나."


하나님을 배신하고 다른 거짓 신들을 섬기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안타까운 심정이 들어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자식으로 돌보았는데 하나님께 반항하고 실패와 죽음만이 있는 반항의 길에 들어선 이스라엘을 보고 계시니 그 심정이 부모의 심정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사야서의 첫 장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바치는 많은 예배를 위한 제물과 희생으로 인해 그리고 그들의 열심인 집회들로 인해 구역질이 나고 견딜 수 없다는 말씀을 하고 계신다. 이들이 하나님을 떠났다고 했지만 이스라엘은 여전히 수많은 제물과 절기들을 지키고 예배의 집회들에 열심을 내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들은 하나님을 떠나지 않은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철저히 하나님을 떠났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지만 예배를 드리는 목적은 하나님이 아니다. 오직 세상의 부와 명예와 권력을 위해 그것을 기원하기 위해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많은 헌물을 드리지만 그것도 모두 자신들의 부와 명예와 권력을 위한 것이다. 결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도 사랑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런 것들을 주시면 일석이조라는 태도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여자가 남자를 사랑하는데 그 남자가 주는 돈과 명예와 권력이 없다면 그 남자를 만날 이유가 없다고 한다면 그 여자는 과연 무엇을 사랑하는 것일까? 한국의 교회의 수많은 여자와 남자들이 상대의 조건을 보고 결혼을 한다.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모두 그것이 지혜롭다 해도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단지 욕심과 욕심을 덧댄 야합[2]일 뿐이다.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사랑을 잃어버리니 남녀의 사랑의 순전함도 잃어버린 것이다. 이전에는 그런 타락한 마음이 창피한 줄 알고 욕심이 나도 자제라도 하고 숨기기라도 했는데 이제 모두가 그런 타락에 젖어 드니 누구 하나 창피한 줄도 모르고 개들과 같이 자신들의 적나라한 더러움을 공개적으로 드러낸다. 이것이 개들의 야합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몇십 년 전만 해도 세상도 그러한 것이 창피한 줄을 알았는데 이제는 교회에서 조차 그것이 부끄럽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모든 가치관과 율법이 무너져 내린다. 모든 기준이 하나님이 아닌 맘몬이며 성공이며 권력이다.


3.7.2.2. 하나님의 법을 버림


그 시대 이스라엘의 모습에 대해 이사야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Isaiah 1:21-23 바른

21어찌하여 신실하던 성읍이 창기가 되었는가? 그 가운데 공의가 가득 차고 정의가 머물더니, 이제는 살인자들 뿐이다. 22너희 은은 찌꺼기가 되었고 너희 포도주에는 물이 섞였다. 23너희 지도자들은 반역자들이며 도둑의 친구들이고, 모두가 뇌물을 사랑하며 사례를 구하고, 고아를 변호하지 않으며 과부의 소송을 받지도 않는다.


우리 시대와 비슷하지 않은가? 교회를 다니지만 그들도 이 시대의 다른 믿지 않는 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오히려 더 신앙적인 척하며 잘 숨기며 도둑질은 더 열심히 한다. 그러면서 도둑질해서 돈 더 잘 벌게 해달라고 헌금은 또 엄청나게 많이 한다.


예전에 내가 경험한 것인데 건설사들이 안전시설물 설치 비용을 아끼려고 공사를 축소시키고 인부들이 일하는 장소를 서류에 허위로 기재했다. 건설사 20여 개 곳이 담합을 한 사실이 녹취된 증거도 있었다. 그 공사들을 감독하던 감리들과 그리고 공무원들이 모두 결탁되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대형 비리였다. 내가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은 20여 개의 건설사 중 한 곳 건설사의 대표로 있던 장로님을 통해서였다. 자신도 모르게 나와의 통화에서 한 말들에 증거들이 고스란히 녹음이 되었다. 자신은 장로라는 사실을 말로 하지 않았는데 경찰에 사건을 고발한 내가 그 대표와 대질 신문하던 중 내 입에서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장로님, 이렇게 도둑질해서 하나님께 헌금드리니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던가요?” 그분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사실 나도 알지 못했던 사실인데 내 입에서 성령님께서 튀어나오게 하셨다. 그 사건에는 사문서 위조의 증거와 건설사들의 위법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그런데도 경찰도 검찰도 보건복지부도 건설교통부도, 그 어느 곳도 조사를 하지 않았다. 사실 조사도 필요 없었다. 증거는 이미 내가 다 수집해서 다 확보를 하고 그들에게 그 증거가 있으니 가져가라 했다. 그런데 이 나라의 책임자들은 그냥 자신들의 업무가 아니라고만 했다. 공무원들은 경찰에서 조사해 오면 자신들이 처리하겠다고 핑계를 댄다. 경찰은 자신들이 조사할 업무가 아니며 이런 건설이나 노동문제에 관한 것은 정부의 다른 기관에서 처리해야 한다고 한다. 대한민국의 내가 아는 모든 곳에 민원을 제기했지만 모두 묵살당했다. 유일하게 사문서 위조는 인정을 했는데 그것도 처벌되지 않고 유야무야 끝이 났다. 모든 위법사실이 녹취가 되었는데도 사문서 위조가 된 서류가 그대로 있었는데 모두 묵살당했다.


안전시설물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으면 일하는 인부들이 목숨을 잃을 수 있는데도 그것을 회피하는 기가 막힌 방법들을 고안해 내고 그것을 위해 사문서 위조를 하는데 건설사 수십 군데가 가담을 한다. 그것을 처벌해야 할 공무원들은 자신들의 비리를 감추기 위함인지 아니면 거대 카르텔이라 자신들이 손을 댈 수 없는 것인지 모두 조사를 회피한다. 그러면서 건설사 대표인 장로는 그 탈법의 대가로 번 돈으로 교회에 십일조를 내고 헌금을 낸다.


이들은 사람의 목숨을 떡 먹듯 한다. 그들의 표현은 이렇다. 

“안전 시설물이 없어 사람이 죽어나간다면 그것은 그 인간이 재수가 옴 붙어서 생긴 일인 것이다. 다른 것들은 멀쩡한데 그놈만 죽은 것은 그놈이 재수가 없는 것이야. 우리 책임이 아니야.” 

“그놈 때문에 괜히 우리만 조사를 받고 귀찮아졌어”라고 불평을 한다. 


3.7.2.3. 율법•기복•인본•신비주의


그 장로가 섬기는 신은 하나님인가? 아니면 돈인가?


이것은 기복적 신앙이며 샤머니즘이다. 결코 기독교가 아니다. 그들의 신은 자신들의 배(stomach)다. 그들은 자신들 식의 신앙을 가지며 자신들의 방법대로 산다. 자신들의 방식으로 비리를 저지르며 그것을 무마하고 또 더 큰 비리를 저지르고도 복을 얻기 위해 더 큰 헌금을 교회에 바친다. 그들이 섬기는 신은 그런 신이다. 결코 하나님이 아니다. 

그들은 인간의 노력과 인간의 방법과 인간의 지혜로 살아간다. 그들은 인본주의 신앙을 가졌다. 신앙생활도 자신들의 방식대로 한다. 결코 하나님이 기준이 아니다. 자신들이 기준이다. 하나님이 아닌 자신의 기준대로 세상에서 생활한다. 헌금을 마련하는 것도 자신의 기준에 의해한다. 그리고 그 비리를 저지르고 사람의 목숨을 죽인 대가를 가지고 자신의 복을 위해 많은 헌금을 한다. 그것이 아주 큰 이익이다. 헌금을 많이 한다 해도 결코 자신이 비리로 버는 돈에 비해서는 아주 작은 돈에 불과하다. 복을 더 잘 받기 위해서는 샤먼(목사, 원장, 주의 종)에게 잘 보여 축복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그들에게 복채를 주고 그들을 극진히 대접한다. 더 뛰어난 샤먼들은 더 신비적이며 인간적이지 않은 현상들을 보여준다. 그 신비를 가진 자들은 더 최상으로 대접을 하고, 있는 돈 없는 돈 다 끌어다 바친다. 왜냐하면 그들은 바친 돈의 열 배, 백 배를 벌게 해 줄 축복을 내려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샤먼들은 더 경쟁적으로 신비적 현상들을 추구한다. 바로 신비주의다.


그들은 열심을 내어 교회생활을 한다. 성경의 계명도 지키는 척 노력을 많이 한다. 결정적으로 자기 이익에 위배되지 않는 다면 최선을 다한다. 예배도 열심히 드리고 하루에 열 시간이 넘는 시간을 기도하기도 하고 밤을 새워서 기도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40일 금식기도를 하며 달에 날들을 정하여 금식하고 주에 시간을 정하여 금식을 한다. 그러나 그들의 기도제목은 자신의 안녕이다. 자신의 복이다. 목사면 큰 교회를 주셔서 목회에 성공하게 해 달라는 것이다. 성도가 늘면 하나님도 좋고 자신도 좋으니 하나님 들어달라고 나무뿌리라도 뽑을 기세다. 사업하는 자는 사업을, 공부하는 자는 공부를, 권력자는 더 큰 권력을 구한다. 그것을 위해 율법을 열심히 지킨다. 헌금도 열심히 하며 교회 봉사도 열심히 한다. 혹시 게을리하면 하나님께서 축복을 내리지 않으실까 봐 더 열심히 한다. 일천번제를 드린다. 성경도 열심히 읽는다. 뜻을 아는 것은 나중 문제다. 일단은 성경 읽기 표에 성경을 많이 읽는다는 것을 표시를 해야 한다. 교회 가면 상도 타고 자랑도 되고 열심을 내어 율법을 읽었으니 하나님께 내세울 것도 있다. 이렇게까지 하는데 하나님 축복 안 하시면 참 너무 하시는 것이다. 바로 율법주의다.


3.7.2.4. 성공한 거짓신앙


이사야 시대의 성공한 거짓신앙인에 대한 묘사가 나온다.


Isaiah 5:8-12 바른

화 있을 것이다. 집에 집을 이으며 밭에 밭을 더하여 빈 곳이 없게 하고 이 땅 가운데 홀로 살려고 하는 사람아. 만군의 여호와께서 내 귀에 말씀하셨다. 


"참으로 많은 집들이 황폐하게 될 것이니, 크고 좋을지라도 거할 자가 없을 것이며, 열흘갈이 포도밭이 포도주 한 바트밖에 내지 않을 것이며, 한 호멜의 씨앗이 한 에바밖에 내지 않을 것이다."


화 있을 것이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독주를 찾는 사람과 밤늦도록 있으면서 포도주로 붉게 물든 사람들아. 그들의 연회에는 수금과 비파와 작은북과 피리와 포도주가 있지만, 그들은 여호와의 행적에 대해서 관심이 없고 그분의 손으로 하신 일을 생각지 않는다.


부동산을 불려 가는 모습을 집에 집을 이으며 밭에 밭을 잇는다고 표현한다. 다른 사람들이 살아야 할 집을 자신이 사들인다. 그리고 그렇게 불로소득으로 번 돈으로 웰빙 라이프를 즐긴다. 따로 일하지 않아도 자산이 자산을 증식한다. 노예들이 일을 해주니 자신은 일할 필요도 없다. 그래서 아침부터 술에 취하며 음악과 술이 넘치는 파티를 즐긴다. 소위 여호와께서 축복하신 자의 증거인 부가 있는 축복받은 무리들이다. 이런 자들은 자신들의 부로 권력을 사기도 한다. 권력을 가진 자들은 자신들의 권력으로 부를 산다. 서로서로 야합하여 서로의 일을 도우고 범죄를 눈감아 주기도 한다. 앞의 3.7.2.2.  하나님의 법을 버림에서 언급한 사 1:21-23은 이들의 야합에 대해 책망한다.



우리 시대에는 집값을 투기를 통해 계속 올린다. 그래야 자신의 자산 가치가 올라가는 것이다. 집값이 올라 다른 무주택자들과 가난한 자들이 집을 살 수 없어도 상관이 없다. 자신만 잘 살면 된다. 자신이 사는 데는 한 채만 있으면 되는데 다른 이들이 살아야 할 집들도 자신이 욕심을 내어 사버린다. 그리고 그 집들을 랜트하는 대가로 고리대와 같은 월세를 요구한다. 더 많은 집을 사들이기 위해 집값의 70~80%에 해당하는 전세를 요구하기도 한다. 탈세를 위해 차명으로 명의 도용을 한다.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집에 집을 이으며 밭에 밭을 잇는다.

건설사들은 최종 포식자들이다. 아무리 부동산 투기꾼들이 돈을 벌어도 건설사의 이익과는 비교할 수 없다. 그들은 같은 원가면 더 비싼 가격으로 집을 팔기를 원한다. 그래서 투기를 조장하는 떴다방과 같은 투기세력들을 끌어들여 영업을 한다. 부동산 투자를 권장하는 매체들에 은근히 뒷돈을 넣고 그들을 조종한다. 집값이 오를 것이니 투자하는 것이 성공의 지름길이라며 투기를 부추긴다. 이들은 부동산 시장의 호황이 지속되도록 정부에 로비를 한다. 건설과 관련한 자신들의 사업에 관련해서 법조계에도 로비를 아끼지 않는다.


이들은 한 사람이 평생을 모아도 모을 수 없는 돈을 집 한 채를 팔아 착취를 해버린다. 평생을 번 모든 돈을 집 한 채에 빼앗기는 데도 큰 규모의 자산인 집을 샀다며 어리석게 기뻐하는 자들을 사기 쳐 돈을 빼앗는데 한치의 망설임이나 양심의 가책조차 없다.


모든 분야를 통해 이런 불공평과 착취는 일어난다. 그런데 그것이 서서히 교묘히 일어나니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다. 집값을 올리면 다른 물가도 올라가는 데 힘들어지는 것은 착취를 당하는 을들 뿐이다. 그리고 이미 막대한 이익을 통해 부를 쌓은 대형 자본들은 그 정도 물가 상승에는 별 영향도 받지 않는다. 대형 자본들은 물가가 오르면 더 많은 이익을 창출할 수 있다. 같은 상품을 팔아도 더 비싸게 팔 수 있기 때문이다. 도저히 소비를 할 수 없을 정도의 인플레이션만 발생하지만 않으면 어느 정도 가격이 오르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한번 달콤한 소비에 중독된 소비자들은 결코 자신들의 소비의 양을 줄이기 힘들다. 그래서 착취당하는 을들은 같은 소비를 유지하기 위해 더 악착같이 일을 해 오른 물가만큼의 돈을 번다. 편리함과 쾌락이라는 두 가지 유혹은 떨쳐내기 힘든 중독이다. 세탁기가 생겨서 주부들의 여유시간이 늘어났다고 하지만 사실 현대의 주부는 과거 세탁기가 없던 시절의 주부들보다 더 분주하고 더 많은 노동을 한다. 더 많은 편의품들과 사치품들을 사기 위해서는 더 많은 돈이 필요한데 항상 자신들이 노동하여 생산하는 가치보다 훨씬 낮은 임금을 받는 자들은 항상 부족한 돈을 가질 수밖에 없기에 편리해졌지만 더 고강도의 노동착취를 당해야 한다. 이것이 도적놈의 사탄과 독사 새끼들이 만든 사회 구조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자신이 잘 살기 위해 하는 일이라 믿어버리니 불공평하다는 생각을 하지도 못한다. 그런데 구조상 이들이 이렇게 죽도록 일해야 하는 이유는 절대 다수인 자신들이 절대 소수인 대형 자본을 가진 자들의 상품들을 소비하여 그들에게 상상할 수 없는 막대한 이윤을 주기 위해서다. 그리고 그런 이윤을 주는 상품을 저렴한 노동력으로 생산해 주기 위해서다. 자신들은 이런 일에 이용을 당하면서도 조삼모사와 같이 자신들은 더 부요해지고 더 잘 살고 있다고 착각한다. 자신들이 생산한 거의 대부분을 빼앗기는데 어떻게 잘 살게 될 수가 있을까? 도적놈의 세상의 착취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 교묘해지고 더 악랄해진다. 이런 내용은 글 쓰는 이가 어느 책에서 배운 내용이 아니다. 어떤 책도 이런 내용을 알려주는 책은 없었다. 스스로 탐구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에 의해서 깨달아진 것들이다. 이런 내용을 듣던 경제학과 학생이 너무 받아들이기 힘겹다고 하였을 때 내게 감동이 있어서 미국의 학자들 중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찾아보라고 했다. 그랬더니 세계은행 부총제를 지낸 스티글리츠라는 노벨상을 받은 학자가 이런 비슷한 말을 하고 있다고 했다. 영문으로 된 자료를 읽고 나서 자신도 충격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학생의 유학을 도와 이런 내용으로 논문을 쓰게 했는데 유럽 최고의 명문에 경제학교에 합격했다. 『21세기 자본론』을 쓴 토마 피케티가 세운 파리경제학교다. 생긴 지 15년 정도 된 학교에서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학자가 나왔고 청년들에게 주는 노벨경제학상인 존 베이츠 클라크 메달을 수상한 학자도 나왔으며 하버드나 버클리, MIT공대, 펜실베니아대, 뉴욕, 툴루즈 경제학교, 런던 비즈니스 스쿨, 런던 정치경제학교, 파리정치대학 등 세계 주요 대학의 교수들을 배출했으며 유럽 중앙은행 이사를 배출하기도 했다. 15년 된 신생학교가 이런 성과를 낸 것은 거의 전무후무하다. 그만큼 이 학교의 교수진과 학생들이 탁월하다는 것이며 입학이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참고로 그 학생에게 이런 내용들을 설명할 당시에 나는 피케티가 누군지도 모르는 경제학 문외한이었다. 나중에 서점에서 보니 피케티라는 학자가 눈에 들어왔고 학생에게 말하니 이미 아는 학자라고, 유명한 사람이라고 했다.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는 세상이 측량할 수가 없다.


이런 사회의 전반적인 시스템에서 기독교인들은 세상 사람들과 동일하게 그 시스템의 하수인이 되어 일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남의 부를 더 많이 빼앗아 착취를 하게 되면 축복을 받았다며 감사헌금을 드린다. 혹시 착취와 포식자들의 먹이 사슬의 상위 랭크로 올라가게라도 되면 교회에 광고를 걸고 예배시간에 간증거리로 선전에 이용된다. 더 많이 헌금하고 더 많이 샤먼에게 충성하고 더 많이 자신의 거짓을 위한 거짓 신앙에 충성을 다하면 저렇게 복을 받게 된다고 선전거리가 된다.


그들은 이사야 시대와 같이 불로소득으로 웰빙 라이프를 즐기며 음악과 파티를 즐기며 세상 사람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그들은 혹시 이 책에서와 같은 말을 하는 사람을 만나면 듣지도 보지도 못한 요상한 소리로 혹세무민 하는 사회의 불순분자로 몰아버린다. 그 불순분자들의 이름은 대한민국에서는 빨갱이였다. 북한에서는 반동이고 중국에서는 우파, 유산계급, 자본가, 제국주의자였다. 중세 유럽에는 마녀와 이단이었다.

참고로 저자는 너무 수많은 공격이 쏟아질 것이기에 신분을 밝힐 수 없지만 대한민국 기독교계에서도 보수의 극한에 속하는 무리의 사람이다. 바울의 표현과 같이 보수 중의 보수이며 골통 보수다. 그러니 빨갱이 사냥하는 프레임에 저자를 가둘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빨갱이는 계시록의 붉은 용이며 그 빨갱이는 붉은 깃발을 사용하는 공산주의다. 그래서 자신의 교회 청년회 사람들을 서북청년단에 가입시키고 제주 4.3에 보내 임산부를 죽이고 배를 갈라 태아를 꺼내는 잔악한 행위를 한 것을 칭찬하는 설교를 했던 한경직 목사가 조선의 성자라는 칭호를 받고 있는 이 나라에서는 나도 빨갱이로 몰릴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기독교인, 소위 안두희가 서북청년단에 가입하고 기독교인인 집사 이승만과 권사 이기붕을 위해 김구 선생을 죽인 이 나라, 그리고 김구를 죽인 중죄인을 비호하여 평생을 돌봐준 이 나라에서는 나도 암살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도 이단으로 몰렸고 바울도 이단의 괴수가 되었으니 나라고 빨갱이가 못될 것도 없지만 일단은 나는 스스로 빨갱이 이단은 아님을 밝힌다. 나는 죽어도 빨갱이로는 죽을 수 없다. 죽더라도 예수쟁이로 죽고 싶다. 그리고 나는 막스나 레닌이나 모택동과 김일성과는 일절 관계가 없는 사람임을 밝힌다. 나는 대학을 다닐 때에 그들의 사상을 공부하거나 그들과 관련된 어떤 동아리에 든 적도 없다. 나는 민주학생운동의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사람이다. 그럼에도 나를 빨갱이라 욕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면 나는 그들에게 이런 말을 하고 싶다. 내가 빨갱이면 나는 예수님의 피로 옷을 세탁한 세마포를 입은 빨갱이라 말하고 싶다. 그러나 그분의 피는 무죄한 자의 피이며 그 피로 옷을 세탁한 나는 붉으나 가장 거룩한 순백의 옷을 입고 있는 백의의 흰둥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나는 예수님을 죽게 한 가장 흉악한 죄인으로 나의 죄는 밤하늘의 그 어떤 어둠보다 진한 검은색이니 나는 검둥이라 말하겠다. 그러니 나는 공산주의의 적색기도 가졌으며 제국주의 왕정파의 백색기도 가졌으며 아나키스트의 흑색기도 가졌다. 그러나 나의 붉음은 공산주의의 붉음이 아니며 예수님의 보혈의 붉음이다. 나의 백색은 제국주의의 백색이 아니며 예수님의 피에 세탁한 세마포의 순백이다. 나의 흑색은 아나키스트의 흑색이 아니며 예수님을 죽게 한 죄인의 검음이다. 오직 나에게 있는 것은 예수님이며 나에게 있는 모든 공로도 예수님이다. 나의 목을 베어 피를 내면 그것은 모두 예수쟁이의 피가 될 것이다. 그러니 나를 빨갱이나 흰둥이나 검둥이나 민주 미쿡 노랭이로도 부르지 말기 바란다. 나를 부르려면 예수쟁이로 불러주기 바란다. 그리고 혹 나를 죽일 죄목을 찾더라도 예수쟁이라는 죄목을 붙이기 바란다. 혹 나의 처형장에 죄의 명패를 붙이려면 ‘예수님을 죽게 한 죄인’이라는 죄의 명패를 붙여주기 바란다. 혹 자비를 베풀어 나의 시신 앞에 나무비라도 세우려면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자’라는 내게는 감당키 어려우나 진리 안에서 사실인 묘비명을 새겨주기 바란다. 그러면 나는 어느 이름 모를 들판에서 개들의 먹이가 되더라도 행복하리라.


행복하다 예수님께 사랑받은 자여

행복하다 하나님께 가난한 자여

행복하다 하나님이 세상에 없음으로 슬퍼 울었던 자여

행복하다 하나님의 의에 주린 자여

……………………………

행복하다 하나님의 의를 위해 거짓과 모함으로 박해를 받는 자여

행복하다 그 주검으로도 말하는 하나님의 행복자여


          


[1] 남북왕국 둘 모두


[2] 개들이 창피함도 모르고 밖에서 벌이는 저속한 성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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