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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스겔 May 25. 2024

3.4. 살아있는 신앙

3.4.1. 사귐이 있게 하려


형제들아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묻는다면 회개하고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성령님을 선물로 받을 것이다. 

여러분들이 사영리나 기타 복음 전도를 받고 그 지식에 동의하여 신앙고백을 하였다면 당신은 신앙고백자는 맞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아닐 수도 있다. 성경에서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만나는 것을 뜻한다. 성령님은 영이시므로 성령님이 마음에 오셔도 스스로 지각할 수 없다는 것은 거짓이다. 성경에 그런 말씀은 없다. 기독교는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과의 사귐이다. 만남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성경 속에 그런 만남은 기적이 아닌 일상이다. 성경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인과의 만남의 일상을 기록한 책이다. 신앙은 하나님과 철저히 인격적이고 긴밀한 대화의 자리에 나가는 것이다.


요일 1:1-3 바른

1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말하자면, 그것은 태초부터 있었고 우리가 들었으며, 우리의 눈으로 보았고, 우리가 주목하였고, 우리의 손으로 만져 보았다.

2그 생명이 나타났다. 그래서 우리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나신 그 영원한 생명을 보았고, 너희에게 증언하며 전하고 있다.

3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너희에게도 전하니, 이는 너희가 우리와 서로 사귐이 있게 하려는 것이다.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것이다.

 

요일 1:1-3 KJV

1That which was from the beginning, which we have heard, which we have seen with our eyes, which we have looked upon, and our hands have handled, of the Word of life;


2(For the life was manifested, and we have seen [it], and bear witness, and shew unto you that eternal life, which was with the Father, and was manifested unto us;)


3That which we have seen and heard declare we unto you, that ye also may have fellowship with us: and truly our fellowship [is] with the Father, and with his Son Jesus Christ.


요일 1:1-3 YLT

1That which was from the beginning, that which we have heard, that which we have seen with our eyes, that which we did behold, and our hands did handle, concerning the Word of the Life--


2and the Life was manifested, and we have seen, and do testify, and declare to you the Life, the age-during, which was with the Father, and was manifested to us--


3that which we have seen and heard declare we to you, that ye also may have fellowship with us, and our fellowship [is] with the Father, and with His Son Jesus Christ;


 

 

요일 1:1절에서 ‘들었고 보았고’라는 말은 한국어 번역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영어 번역에는 현재완료시제다. 영어 번역은 동작이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이어짐을 뜻하는 현재완료의 용법이다. 헬라어 완료시제는 현재완료, 과거완료가 있는데 여기에 사용된 동사들은 현재완료 시제다. 헬라어 현재완료는 영어와 차이점이 있지만 그 해석 중 영어의 현재완료와 같은 역할을 하는 측면의 해석이 있다. 여기 이 본문은 영어의 현재완료와 같은 해석을 할 수 있다. 즉 과거에도 보았고 계속 보았고 현재까지 보고 있다는 뜻인 것이다. 즉 만남인 것이다. 그래서 요일 1:3절에 ‘사귐이 있게 하려는 것이다.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님과 함께 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요한이 요한 서신들을 기록한 시기는 당연히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셔서 이 땅에 계시지 않을 때였다. 그런데 요한은 어떻게 사도들과 믿는 자들이 예수님을 계속해서 만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일까? 성령님 안에서 영과 영의 인카운터로 만나서 사귐이 있는 것이다. 요한의 글들뿐 아니라 성경 66권은 사귐을 자연스럽게 기록하고 있다. 

사귐이란 그분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분께 찬양을 드린다고 상상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그냥 관념일 뿐이다. 상상 임신이 임신이 아니듯 상상 사귐은 사귐이 아니다.

사귐은 하나님을 보고 그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것이다. 사도들과 형제들은 태초부터 계셔오시는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그 예수님을 보는 사귐에 초청하는 것이다. 자신들은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에도 그리고 부활 승천하신 후에도 계속 그런 사귐을 해왔는데 이제 너희도 그 사귐에 초청한다는 것이다. 이 초청은 이미 과거에 수신자들이 예수님을 믿을 때 초청을 받은 것이고 요한은 그것을 다시 한번 그들에게 상기시키는 것일 수도 있다. 

성도는 하나님을 정말 만나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다. 성령님이 내 안에 나와 함께 계시는 것이다. 


3.4.2. 사귐을 거부하는 신학적 오류


많은 교회와 신학자들이 이 사귐을 모른다. 심지어 세대주의자들 중에는 이런 사귐이 사도시대 이후로는 불가능하다고 한다. 성경에는 있는데 지금은 하나님께서 죽으셨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면 성경에 수많은 사람들과 만나 말씀하셨던 하나님께서 지금 나와는 왜 못 만나신다는 말인가? 평양 대부흥 같은 부흥의 시대나 개인적인 부흥이 임한 사람들은 늘 하나님을 만나왔다. 이건 신학을 논하기 전에 세 살 배기도 글을 모르는 노인네들도 다 알 수 있다. 성경의 집필이 끝난 다음에는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성도를 만나시지 않는 것인가? 성경을 보아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만나신 것은 성경 집필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단지 성경은 그 만남의 기록이다. 하나님의 목적은 아담의 후손들을 만나고 그들과 사랑의 관계를 원하신 것이다. 바로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그 하나님과 아가서와 같은 밀월의 사랑을 성도와 나누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그것을 가지고 논쟁을 한다는 자체가 그들은 하나님 만나지 못한 것이다. 한 번도 만나본 경험이 없는 것이다. 아니 무당도 귀신을 만나는데 성도가 하나님을 못 만난다니 말이 되는가? 이것을 가지고 잘못 추구하면 신비주의로 빠지고 귀신에게 미혹될 수 있으니 이런 만남 자체는 위험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물론 그런 자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그들은 정상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아니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은 성령님께서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성경을 통해 깨닫게 하심으로 능히 분별할 수 있다. 

미혹을 두려워하는 사상은 기독교는 결국 샤머니즘보다 못하다는 사상이다. 하나님께서 그 정도 분별력을 주시지 않겠는가? 성경이 그 정도를 분별할 수 없을 정도로 허술한 책인가? 이것은 분별의 중요성을 간과하자는 것이 아니다. 능히 분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하나님도 못 만난 신앙고백자들의 사상을 대변하는 신학은 죽은 신학이다. 그곳에는 살아있는 생명이 없다.

살아있는 신앙은 화석화된 신앙과 융화될 수 없다. 화석화된 신앙은 원수에게서 나온 원수의 영을 받은 옛사람으로 거듭나지 못한 상태다. 그래서 예수님의 영을 받은 살아있는 신앙을 대적하게 된다. 본능적으로 싫고 태생적으로 싫은 것이다. 예수님이나 사도들을 대적한 것도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살아있는 신앙이 문제가 있어서도 아니다. 단지 그냥 극도로 싫을 뿐이다. 이유로 붙이는 것들은 모두 핑계일 뿐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셔도 그 말을 듣지도 않는다. 전혀 엉뚱하게 곡해한다. 예수님도 못 알아보았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몇 천년 후에 나타난 제자들 속에 있는 생명을 알아볼 수 있을까? 혼미케 하는 영들에게 속아 본능적으로 미워하고 대적하게 된다. 그것이 화석화된 신앙의 상태의 심각성이다. 단지 자신만 죽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신앙을 대적하게 된다. 스스로 자신이 화석화된 신앙을 가졌는지 의심이 된다면 이미 나는 복음을 대적하는 원수의 영을 받은 옛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내가 성경에 기록된 복음을 소유한 성도를 극도로 싫어해서 대적할 수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 그럼 이 비참함을 벗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형제들아 어찌할꼬 묻는다면 성경 안에는 답이 있다. 무엇보다 겸손히 살아있는 신앙을 달라고 하나님께 목숨을 걸고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지식적으로 올바른 기준의 신앙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성경과 선진들의 글들을 통해 배워야 한다. 부흥의 시대에 기록된 글들을 읽어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먼저 회심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조셉 얼라인의 Call to the unconverted를 읽고 그가 제시한 성경적 근거가 무엇인지 그 성경구절들을 깊이 묵상해 보기 바란다. 새물결 선교회의 십자가의 복음이라는 책을 읽어보면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마틴 로이드 존즈의 부흥을 읽어보기 바란다. 그리고 이 모든 책들에서 제시하는 성경적 근거가 과연 무엇인지 깊이 묵상해 보기 바란다. 목사나 장로나 권사나 신학자라도 마틴 루터가 만난 하나님 그리고 죠지 폭스가 만난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는 돌이켜 회개하고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조셉 얼라인이 제시한 회심한 사람의 성경적 근거가 자신 안에 표징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는 어떻게 회심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지 조셉 얼라인의 책 속에서 성경적 근거를 찾고 그 지시대로 목숨을 걸고 기도하기 바란다. 이 외에도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의 글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살기 위해 성경을 연구하기 바란다. 깊이 그리고 내가 보던 대로가 아닌 성경이 말씀하시는 대로 연구하기 바란다. 성경해석학에 따른 객관적인 연구법을 통해 연구하기 바란다. 단순한 성경해석학 개론서들이 아닌 실제적인 지침을 주는 연구법들을 찾기 바란다. 국내에서는 IVP나 프리셉트 연구원, 죠이선교회, 생명말씀사가 출간한 책들을 참고하기 바란다. 주의해야 할 것은 스스로 성경을 관찰하고 해석하고 삶에 적용하는 것에 초점을 두기 바란다. 주석서나 설교집을 참고하는 것은 성경연구가 아니다. 그냥 다른 사람들의 글을 참고할 뿐이다. 마치 논문이나 리포트를 표절하는 것과 같다. 그렇게 성경을 연구하면 성경을 깊이 있게 볼 수 없고 그렇게 안 것은 나의 지식이 아니다. 그러니 확신도 있을 수 없다. 처음에는 참고할 수 있는 몇 권의 책으로 출발하면 된다. 그렇게 성경 연구법을 따라 하다 보면 자신이 찾아야 할 더 깊이 있는 연구법을 다루고 있는 책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깊이 더 깊이 성경을 연구하고 그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을 만나라. 그리고 성경에 기록된 신앙을 발견하라. 다른 이의 설교나 해석을 통해 신앙을 발견하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다른 이에게 맡기는 것과 같다. 성경 속에 있는 바른 신앙을 발견하고 그 생명을 얻는 것은 생사가 달린 문제다. 거짓된 신앙 속에서 평생을 살다 간 대부분의 중세인들은 기독교인의 이름표가 붙어있었으나 지옥으로 가는 길을 선택했다. 그들이 죽음 후 천국을 기대하며 눈을 떠 보게 된 것은 지옥에 떨어진 자신이었다. 아마 지옥의 고통보다 더했던 것이 천국에 있으리라 확신했던 자신이 거짓신앙인으로 판명된 것일 것이다. 그는 평생 지옥의 백성으로 살면서 자신을 천국의 신앙을 가진 자로 착각하였다. 왜일까? 우리는 그렇지 않을까?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신앙의 선배들의 글이나 이 시대의 신앙서적을 읽더라도 스스로 성경을 통해 확인해야 한다. 그 책임은 담임목사나 유명 목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에게 있다. 자신의 판단에 의해 지옥에 가는 것은 자신의 책임인 것이다. 심판대 앞에서 어떤 목사가 그렇게 말했다고 핑계하는 것은 효과적인 변명이 될 수 없다. 진리에서 벗어난 새로운 것을 발견하라는 말이 아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참 신앙이 무엇인지 다른 사람들의 말이 아닌 성경에 의해 자기 스스로 발견하라는 말이다. 중세인들은 자신들이 초대교회 바리새인들이나 구약 광야 이스라엘이나 하나님을 거역한 열왕 시대 신앙인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앞선 시대 거짓신앙을 똑같이 가졌고 동일한 지옥 길을 갔다. 눈이 가려지면 스스로 자신을 볼 수 없다. 그래서 절실함이 필요하다. 그 절실함이 그 시대 거짓신앙을 뛰어넘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신앙으로 달음질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하나님을 찾고 찾으면 만나게 되는 것이다.


3.4.3. 하나님의 임재


창세기만 보아도 타락하기 전의 인간은 동산에 거니시는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그 얼굴을 보고 대화하는 사이였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은 다시 그 관계로 회복시키시는 것이다. 계시록은 그 최종적 완성이다. 생명수 강가에서 생명나무의 열매가 있는 곳에서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귐은 이 땅에서 이미 시작되었다. 물론 아직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서로의 모든 것을 가려짐 없이 보는 최종적 사귐에는 이르지 못했다. 그러나 성경에서 보여지는 수많은 사귐은 인간과 인간의 만남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그 만남은 영적 인카운터로 서로 영과 영이 마주 보는 것이다. 그 상태에서는 상대의 마음을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고 긴 시간의 경험이 없어도 상대의 성품이 어떤지 그 상대의 속성이 어떤지 그대로 알 수 있다. 그것을 하나님의 현존 즉 임재에 들어간다고 한다. 하나님이 계신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라는 단어는 창세기 3장에[1] 처음 등장한다. ‘하나님의 낯’이라는 말이 ‘하나님의 임재’라는 단어다. 하나님의 얼굴이 있으니 그곳에 하나님이 계신다. 그것이 하나님의 임재다. 히브리어 단어는 상당히 회화적이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얼굴 앞에 살았다. 아담의 후손은 아담과 같이 그 하나님과 함께 살아야 하는 존재다. 그리고 그렇게 영과 영이 서로 마주하여 보지 않고는 하나님의 성품이 어떠함을 알 수가 없다. 


바울이 그들과 처음 머문 기간은 단 3주였다. 그 후 바울은 핍박 가운데 그곳을 떠났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리스도 예수님과 함께 고난을 이겨내고 믿음을 지켰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하겠는가? 바울이 1차 선교여행에서 전도한 도시들에 머문 기간은 평균 5개월 이하였다. 3주는 말할 필요도 없지만 5개월도 안 되는 기간에 믿음을 가지고 순교의 자리에서도 믿음을 지키는 자들로 가득한 에클레시아가 세워지다니 어떻게 된 것일까? 이것이 살아있는 믿음이다. 화석화된 신앙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을 한다.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믿음이다.


          



[1]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은 사랑의 관계 안에서 찬송받기 원하심이다. 창세기 시작에도 인간은 하나님의 얼굴 즉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다. 그리고 계시록의 마지막 장면도 인간은 하나님이 빛이신 곳에서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한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와 함께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다른 표현으로 그것을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한다. 친밀함 가운데 하나가 되어 영원히 함께 하는 것이다. 에녹은 살아서 하나님과 동행하다 죽음을 보지 않고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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