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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스겔 May 18. 2024

3.3. 화석화된 죽은 정통주의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들은 열방을 다시 살리는 부흥의 주역들이 된다. 그들을 통해 열방은 죽음에서 다시 생명을 얻는다. 사도들의 시대에도 그들은 복음을 들고 땅끝까지 나아갔다. 그 폭발적인 생명력으로 구대륙 전역에 복음을 전했다. 도마 시대에 전해진 복음은 인도에 그 생명력을 유지하여 2000년 넘게 살았다. 지금도 도마의 신앙을 가진 자들이 인도에 있다. 사도들의 순교와 복음 전파에 대한 수많은 기록이 남아있다. 심지어 복음은 이곳 한반도의 남단 신라 지역에까지 흔적을 남겼다. 히브리어로 된 비석이 있다. 그 비석엔 도마라는 이름이 남아있다. 양을 돌보는 목자의 그림이 있다. 불국사 안에 십자가가 있다. 신라 왕릉 주위엔 히브리인들의 생김새로 샌들을 신고 있는 석상들이 있다. 또 역사적인 기록에도 이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기록들이 있다. 이렇게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들 즉 두 번째 아담의 후손들은 놀라운 생명력과 권세로 열방을 회복시켰다.

그럼 원수들은 이를 두고 보고 있었을까? 대적하는 원수도 그 책략을 발동하여 아담의 후손들과 그들에게 맡겨진 복음을 대적했다. 원수는 거짓 신앙을 퍼트림으로 아담의 후손들의 권세와 그들에게 맡겨진 복음을 무력화시키려 했다. 거짓 신앙은 화석화된 죽은 정통주의를 만든다. 죽은 정통주의란 그 교리적 내용은 동일하지만 생명력은 없는 신앙을 말한다. 교회는 교회인데 하나님을 만난 자는 없는 마치 모양은 동일한데 죽어있는 화석과 같은 신앙을 말한다. 이 화석화된 신앙을 대표하는 거짓된 신앙이 있다. 바로 율법주의, 인본주의, 기복주의다. 이 셋은 유기적 관계를 가지고 서로를 지탱한다.


3.3.1. 율법주의, 인본주의, 기복주의의 융합체


3.3.1.1. 율법주의


그중 하나가 율법주의였다. 이것은 인간의 타락과 함께 계속 존속해 오는 것이고 언제든지 참된 복음이 나타나면 대적하기 위하여 반드시 일어나는 해충과 같은 것이다.


3.3.1.1.1. 자기 노력


인간의 타락의 본질도 본질상 이 율법주의와 깊은 연관이 있다. 골로새서에 ‘붙잡지도 마라, 맛보지도 마라, 손대지도 마라.[1]’라는 것인데 그것은 창세기에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낸 계명과 흡사하다. 하나님께서는 그냥 ‘먹지 마라’고 하셨다. 그런데 인간은 거기에 자기 노력을 더한다. 그것이 바로 ‘만지지도 마라’는 것이다.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을 창세기 3장의 자의적 율법은 다음과 같다. 먼저 열매를 붙잡지 마라(열매를 따지 마라=만지지 마라), 열매를 맛보지 마라(열매를 먹지 마라), 손대지도 마라(만지지도 마라) 율법주의의 핵심이다.

이 자의적 율법 조항에서 괄호 밖의 붙잡지 마라, 맛보지 마라, 손대지도 마라는 골로새서 2:21에 나오는 사람의 계명이다. () 괄호 안의 것은 창세기 3:3에 여자(하와)가 자의적으로 만들어낸 사람의 계명이다. 골로새서 2:21은 사도 바울이 창세기 3:3을 염두에 두고 언급한 구절이다. 그 핵심은 하나님의 명령에 자기 노력을 더하는 것이다. 자기 노력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것이 보이지 않는 실패의 시작인 것이다.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한 것이다. 사실 아담의 삶도 또 그 후손들의 삶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하는 삶이어야 했다. 피조물인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하나님을 닮은 아들들로 지음을 받았다. 하나님 보다 조금 못한 존재가 된 것이다. 그러나 그 삶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한 삶이다. 현재의 우리의 모습을 보면 하나님의 능력을 떠난 인간의 모습이 어떠함을 철저히 알 수 있다. ‘너희는 신들인데 인간처럼 죽는구나[2]라고 탄식한 시편 기록자의 말과 같이 하나님을 떠난 우리는 비참한 모습이다. 그런데 그것을 모르고 자신의 노력으로 살아가려는 것이 율법주의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살 수 있는 인간 스스로에 대한 무지다. 그리고 하나님을 철저하게 신뢰하지 않는 불신앙이다. 하와도 철저하게 하나님을 신뢰했다면 그냥 뱀이 속이는 시도를 했을 때 결코 자신의 계명 즉 만지지도 마라는 것을 추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의가 아닌 자신의 의로 살려는 것이다. 우리도 스스로 노력해서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하고 그래서 하나님께 인정받고 싶다면 그것은 철저히 율법주의에 속한다. 대부분은 그것이 율법주의인 줄 알지도 못한다. 왜 무당들이나 절에서 비는 사람들처럼 교회에서 치성을 드리는지 알지를 못하는 것이다.


3.3.1.1.2. 자기의


그 모든 것은 오직 인간의 노력에 의해 하나님을 만족시키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율법주의의 발로인 것이다. 그렇게 해서는 절대 하나님의 기준을 만족시키는 삶을 살 수가 없다. 팔복이 포함된 산상수훈에 말씀하신 기준만 보아도 인간은 그것을 만족시킬 수가 없다. 우리의 노력에 의한 자기의는 결코 바리새인의 의를 넘어서기 어렵다. 그 노력의 극한에 이른 자들이 바리새인들이었다. 그들도 결코 하나님의 기준을 만족시킬 의를 가지지 못했다. 우리는 노력으로 하나님 앞에 결코 옳다고 인정받을 수 없다. 그래서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었던 사도 바울은 ‘아, 나는 비참한 사람이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주겠느냐? (롬 7:24 바른)’라고 했다.

인간의 자기의는 다양한 형태로 타나 날 수 있다. 지식을 추구할 수도 있다. 영지주의가 그런 분파였다. 신비한 능력을 추구하기도 한다. 그런 것이 신비주의다. 영적 지식을 소유함으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인정을 받은 특별한 존재로 여긴다.  신비한 능력을 소유함으로 특별한 존재로 인정받으려는 것도 같은 모습이다. 영적인 지식이나 신비함을 경험하는 것은 우리 신앙에서 당연하다. 그런데 이를 통해 자신의 의를 추구한다. 자기 노력의 삶은 반드시 실패한다.

결국 이러한 모습들은 하나님 중심이 아닌 자기중심으로 무엇이든 해결하는 것이다. 그것이 인본주의다.


3.3.1.2. 인본주의


휴머니즘은 박애주의로 생각되어 선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인본주의는 박애주의와는 다르다. 신본주의의 반대말이다. 즉 하나님이 중심이 되는 삶은 신본주의다. 자신이 중심이 되는 삶은 인본주의다. 자신의 방법과 자신의 힘과 자신의 생각대로 사는 것이다. 율법주의는 인본주의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40일 철야를 하는데 왜 인본주의냐고 물을 것이다. 하나님을 찾는 목적이 자신이기 때문이다. 자기의 성공과 자기의 행복이 목적인 것이다. 삶의 목적이 하나님이 아닌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 목적을 이루는 방법도 자기 방법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살지 않는다. 오직 자기 욕심을 이루기 위해 자기 방법대로 노력하는 것이다. 심지어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도 자신의 욕심을 따라 듣는다. 욕심을 따라 잘못된 영적 근원에서 음성을 듣게 된다. 잘못된 신비주의나 능력주의도 이런 의미에서 인본주의다. 오직 하나님만이 목적이 되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시행착오가 있을 수 있으나 결국 하나님께서 올바른 곳으로 인도하신다. 그러나 자기 자신이 목적이 되면 반드시 잘못된 길로 갈 수밖에 없다. 이런 신앙은 결국 기복주의로 흐른다.


3.3.1.3. 기복주의


자기가 목적이 되고 자신의 욕심만 따라 살게 된다. 기복주의는 하나님을 배신하는 것이다. 다른 것을 사랑하는 것이다. 연인이 나보다 내 돈을 더 사랑한다면 기분이 어떨까? 기복주의는 이런 짓을 하면서도 사랑을 운운한다. 기독교 안에 너무 만연해 있어서 자신들의 행위가 기복주의인지 알지도 못한다. ‘하나님 저의 자식을 주님이 원하는 곳에 써주세요 그곳이 어디입니까?’ 부모의 기도는 이래야 한다. 그런데 수능전력기도회를 하거나 서울대 합격 감사헌금을 드린다. 차라리 절에 가서 빌 것을 교회에서 하고 있다. 가짜 기독교인들아 회개하여 참된 기독교인이 되던지 아니면 차라리 절에나 다녀라. 너희의 행위가 역겨우니 하나님의 얼굴에 똥을 들이미는 것과 다르지 않은가? 이 말에 반발심이 생긴다면 당신은 눈먼 소경의 영적 상태에 있다. 한국교회 전체가 소경이라도 그 전체가 잘못된 것이다. 장로나 권사나 구역장이 되기를 욕망하는가? 하나님께서 섬김을 위해 강권적으로 임명하신 것이 아니라면 당신은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지 못한 자연인에 불과하다. 당신의 길은 지옥이요 당신의 정체성은 지옥의 불쏘시개다. 인간이면 누구나 다 그런 거 아니냐고? 그렇다. 그러나 그런 인간은 모두 거듭나지 못한 인간일 뿐이다. 사람으로는 불가능한 삶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불꽃이 당신 안에서 당신의 전생을 불사르지 못한다면 당신은 지옥의 불 쏘시개일 뿐이다. 지옥의 불길보다 더 뜨거운 사랑의 불꽃이 타오르지 않으면 당신의 열심은 거짓이다. 인간의 노력으로 이를 수 있는 그 어떤 경지도 구원의 표증이 되지 못한다. 오직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만 하실 수 있는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그런 기적과 같은 기준이 그리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보다 나은 의가 있어야 구원의 표증이 되는 것이다. 그런 능력과 은혜는 오직 위로부터만 부어질 수 있다. 그러니 그 은혜가 임할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기도해야 한다.


3.3.2. 역사 속 거짓신앙의 심각한 폐해


거짓신앙의 심각성은 역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서구에서 복음을 대적한 가장 강력한 도구는 바로 거짓신앙이었다.


3.3.2.1. 복음의 서진: 심각한 역사 해석 오류


일반적으로 복음은 서진했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복음은 서진하지 않았다. 단지 그렇게 보여지도록 사단과 그 졸개들에 의해 의도적으로 조작되었다. 땅끝은 스페인이나 서쪽의 어떤 지역이 아니었다. 누구나 생각하듯 땅 끝은 세상의 끝이다. 우리가 갈 수 있는 모든 곳의 한계선이다. 동서남북 모든 곳 끝이다. 예수님께서도 모든 족속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다. 사도들도 복음을 들고 열방 모든 곳으로 갔다. 바울은 로마를 향해 갔다. 도마는 인도를 향해 갔고 그를 통해 전파된 복음은 동방의 끝자락 신라에도 그 흔적을 남겼다. 불국사에는 십자가가 발견되었다. 경남 함안에는 히브리어 비석이 발견되었다. 그 비문에는 도마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경남 한 사찰의 벽에는 목자와 양을 그려놓은 벽화가 있다. 왕릉의 지신상들은 중동인들의 외모를 하고 있고 그들은 샌들을 신었다. 옷도 중동인들의 옷이다. 1세기 초대 교회의 복음은 이곳 한반도에까지 전파되었다. 복음은 땅끝 모든 곳을 향해 간다.

그런데 단지 그 복음을 대적하는 전략이 동서양에서 서로 달랐을 뿐이다. 이 전략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동서양의 기질의 차이와 정치제도의 차이를 이해해야 한다. 또한 동양과 서양 모두의 북부 스텝지역과 그 위쪽은 유목민족의 기질과 그에 맞는 정치제도가 있었다.


3.3.2.1.1.  동양: 복음의 박멸


동양은 적절한 비가 내리고 햇볕이 풍부한 기후로 인해 쌀농사 지역이 되었다. 동양은 논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마을 공동체가 협동해야 했다. 협동적이고 마을 전체가 함께 하는 것에 순응해야 논농사를 짓고 살아남을 수 있다. 그래서 협동적이고 순종적인 기질의 사람들이 되었다. 이렇게 공동체적이고 순종적인 기질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공동체는 강력한 리더십을 필요로 했다. 누군가 공동체를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논으로 물을 공급하는 수로를 효과적으로 만들어야 했다. 서로 자신의 논에 먼저 물을 대려는 욕심을 제어하고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도록 강제해야 했다. 절대권력을 가진 리더가 필요한 것이다. 그곳에서 발달할 수 있는 정치제도는 절대왕정이다. 강력한 왕권을 통해 공동체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정체제도가 동양 사람들의 기질에 적합한 것이다. 그래서 동양에는 유교사상이 우위를 차지했다. 이런 사회에서 전체와 다른 자기 의견을 주장하는 것은 공공의 적이 되는 길이다. 마치 논농사를 공동체와 협의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수로의 물을 허비하여 마을 전체에 피해를 입히는 사람 취급을 당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마을 전체의 농사를 망치게 되고 결국 보릿고개에 마을 전체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는 자가 된다. 그런 자는 공동체를 위해 제거되어야 했다. 동양의 공동체적 문화에서 서양의 개인주의적 사고를 가지는 것은 사회로부터의 고립과 죽음을 자처하는 길이 된다. 이러한 체제 안에서 사탄이 복음을 대적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절대 왕권을 통한 복음의 박멸이다. 강력한 왕권이 복음을 박멸하는 도구가 되었다. 원래 사회가 가지고 있던 종교와 문화와 완전히 다른 복음은 공동체적 문화에서 사라져야 할 공동체의 적이 되었다.

동양에서 왕이 지적하여 대적하면 무엇이든 사회의 악이 되고 박멸되게 된다. 왕권이 아닌 다른 권력은 모두 무너져야 한다. 다른 권력은 모두 역적이다. 복음은 왕보다 더 절대 권력인 하나님과 예수님을 전파한다. 당연히 왕은 대적할 수밖에 없다. 그래야 자신의 절대권력을 유지할 수 있다. 동양에서 원수들은 복음을 박멸하는 길을 택했다. 그러나 복음은 박멸되지 않았다. 인도에서 복음은 살아남았다. 시대 시대마다 복음은 동쪽 땅끝이었던 한반도에도 전파되었다. 그 복음은 절대왕권이 있던 시절엔 박멸의 길을 갔다. 그래서 동쪽으로 전파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복음은 언제나 부흥이 올 때마다, 땅끝의 모든 곳으로 나아갔다. 그런데 동방으로 온 성도들은 모두 순교하여 박멸당하였다. 그래서 복음이 동쪽으로는 전진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모라비안의 복음은 동서남북 모든 곳으로 향했다. 회중교회도 그러했다. 영국의 윌리엄케리도 동으로 향했다. 그리고 중국으로 온 오엠의 리더가 그러했다. 물론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도 동방의 조선으로 왔다. 그들은 모두 동방을 향해 왔다. 중국과 북한에 부흥의 불길이 있었지만 공산주의라는 전제 정권에 의해 거의 박멸당했었다. 그래도 복음은 동방으로 계속 전파된다. 박멸의 시대에는 박멸을 당하더라도 또다시 하나님의 부흥이 오면 그 부흥의 물결을 타고 다시 전 세계 모든 곳으로 전해지는 복음은 동방으로도 온다.


복음은 과연 서구로만 지속적으로 전해진 것일까? 아니다. 그곳에서는 복음을 대적하는 방식이 달랐을 뿐이다. 서구에서는 복음을 변질시켰다.


사탄도 한반도가 서구화되었을 때는 복음을 거짓신앙으로 변절시키는 길을 택했다. 평양대부흥 이후에는 신사참배를 통해 변절시켰다. 그리고 해방된 후에는 물질적 축복과 사회적 성공을 주어 기복주의로 타락시켰다. 그중 하나가 소위 삼박자 구원이라는 것이다. 기적과 은사가 함께 하지만 결국 그 속에는 샤먼의 영이 흐르는 샤머니즘이 있다. 그리고 그 본질은 기복주의다. 결국 한국교회는 생명을 잃어버렸고 타락의 길을 달려갔다. 복음이 희석된 것이다. 즉 화석화된 죽은 정통주의가 되었다. 한국에는  화석화된 죽은 정통주의만큼이나 무서운 것이 있다. 바로 샤머니즘적 복음주의다. 여기에는 기복주의와 인본주의와 율법주의와 신비주의가 유기적으로 잘 결합되어 있다. 소위 주의 종을 잘 섬기고 잘 대접하는 것은 샤먼을 우러르고 숭배하던 시절의 그 모습과 같다. 그들에게 복채를 주고 그들에게 점을 치고 푸닥거리를 시키는 대가를 지불한다. 그래서 구하는 것은 이생에서의 물질적, 육체적 복이다. 이것이 기독교를 가장한 샤머니즘의 정체다. 그 결과는 교회의 부패와 타락이며 결국 숫자는 많아졌지만 화석화된 죽은 교회가 되었다. 어떻게 그렇게 신비적인 요소와 영적인 요소가 넘치는데 참된 신앙의 삶의 증거는 땅을 두루 살펴도 찾을 수 없는지, 이는 좀비화된 신비주의라 할 수 있다. 죽은 시체인데 좀비화되어 움직이니 살아 있는 것 같으나 그 생명은 정상적인 생명이 아닌 괴물화되고 짐승화된 생명인 것이다. 바로 사탄과 그 졸개들이 성도들과 천사들의 것을 훔쳐서 기생적 행태로 행하는 신비와 기적의 총화(總和)라 할 수 있다. 이런 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초대교회를 괴롭혔던 영지주의나 카톨릭의 신비주의를 생각하면 새로울 것도 없다. 교세를 자랑하지만 생각해 보라. 중세 교회는 유럽 전체가 교회를 다니는 교세를 자랑했다. 황제도 교황이 임명할 정도로 교세가 강해졌었다. 이를 거울삼아 보면 교세는 기준이 될 수 없다. 예수님을 죽였던 유대인들도 국가 자체가 교회였다. 유럽도 동일했다. 그러니 오히려 그들과 비슷한 한국교회는 스스로의 위급한 지경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세계 최대의 대형교회들이 있다 하여 기독교가 번성한 것이 아니다. 사탄의 전략은 집요하여 부흥이 와도 한 세대 이후에는 반드시 그 신앙의 불을 꺼트리고 화석화와 좀비화의 길을 걷게 한다. 이는 복음을 박멸시킬 수 없는 경우 사탄이 쓰는 복음을 변질시키는 전략에 의해 나온 결과물이다.


3.3.2.1.2.  서양: 복음의 변질


서양은 비가 부족하고 햇볕이 부족한 기후로 인해 밀 농사 지역이 되었다. 밀 농사는 수로를 통한 물 공급 시스템이 필요 없다. 농사는 개인이 자기 마음대로 알아서 하면 되는 것이다. 여기서 서양의 개인주의가 출발했다. 이러한 기질이 기반을 이루고 있는 서양에 절대왕권은 들어설 수가 없다. 개인주의적이고 전체주의를 반대하는 서양에서 절대왕권은 오래갈 수 없었다. 시저도 절대왕권을 원하다 살해당했다. 나폴레옹도 심지어 히틀러도 몇십 년을 버티지 못했다. 이러한 서양에서 왕권을 통한 복음의 박멸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왕권이 절대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핍박하려고 하면 그 반대세력이 보호하고 나설 가능성이 높다. 종교개혁 때도 개신교가 살아남은 것이 이러한 서양의 권력구도 때문이었다. 그래서 악한 영들이 서구에서 복음을 대적하는 방법으로 선택한 것은 박멸이 아닌 복음의 변질이다.

로마시대에도 콘스탄틴을 통해 기독교를 국교화했지만 태양신의 축일을 크리스마스로 만들고 태양신의 부활일 즉 춘분을 부활절로 만들었다. 이뿐 아니라 수많은 변절과 희석이 그 안에 있었다. 그중 핵심적인 것이 참 믿는 자가 세례 받고 교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고백한다고 입술로 말만 하면 교인이 되는 것이었다. 이를 반대하고 참으로 회심한 사람만 세례를 받고 교인이 돼야 한다고 주장한 자들은 수많은 박해 속에 순교를 당했다. 중세 기간 동안 순교한 자들의 수가 600만 명 정도 된다. 중세 인구가 3400~11200만 정도 되던 시기였기에 그 수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엄청나다. 이 시대에 등장한 변절 중 하나가 유아세례다. 지금 우리도 행하고 있는 것인데 유아세례는 성경적인 근거도 없다. 칼빈이 기독교강요에서 유아세례의 근거가 된다고 제시한 본문이 있는데 사실 유아 세례와는 전혀 상관도 없는 본문이다. 이 시대의 변절은 수많은 이교적인 풍습을 교회 안에 불러들였는데 사실 신학교도 헬라의 이교적 풍습을 따라 만들어졌다. 교회의 건축 양식은 헬라나 로마의 신전들을 모티브로 해서 만들어졌다. 그런 신전 건물(교회)을 중심으로 하는 신앙생활도 사실 기독교의 유산은 아니다. 모두 헬라의 유산이다. 교회 음악의 시초도 아리스토텔레스의 건축과 색채와 소리를 통해 사람들을 사로잡는 경외감(the sense of sublime) 이론에서 출발한 것이다.  (진에드워드, 2020년 4월 10일)

초대교회 이후 서방에서 교회가 번성한 것 같지만 사실 구원받은 수는 극히 적다. 저주받은 무화과나무와 같이 잎사귀는 무성하지만 열매가 없다. 거짓신앙은 복음을 대적하는 데 사용된 가장 강력한 도구였다. 자신들은 기독교인이라고 하지만 항상 위클리프나 후스, 폭스, 웨슬리를 박해했다. 죽은 정통주의는 기독교가 아니다. 그들의 교리는 정통이다. 그러나 그들은 기독교의 지식을 습득했을 뿐이다. 기독교인은 아니다. 이렇게 속임을 통해 어둠은 복음을 대적했다. 거짓신앙을 팽배하게 만들어서 그 거짓신앙을 통해 복음을 대적했다. 그래서 거짓신앙은 무성하지만 복음은 거짓신앙에 의해 서서히 고사되고 지리멸렬하게 만들었다. 이것이 거짓신앙의 무서움이다. 지금 이 시점에서 서양의 거짓 신앙을 다루고 있는 것은 현대 우리의 사상과 정치체제가 서양의 그것에 속해 있고 한국교회 안에 어둠의 전략이 바로 거짓신앙이기 때문이다.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는 저주받아 말라죽게 된다.


사탄은 절대전제정권하에서는 복음을 박멸한다. 그리고 그것이 불가능하면 복음을 변질시킨다. 이러한 전략으로 항상 한세대가 지나기 전에 부흥의 생명은 죽음을 맞는다. 이를 이기는 하나님의 전략은 새롭게 하여 살리는 부흥이다. 새롭게 하여 살려내는 것이다. 죽음을 맞고 시체만 남은 교회들이 있던 곳에 새 생명을 부어 새롭게 살려내신다. 종교 개혁 부흥이 그러한 부흥이었다. 종교개혁의 세대가 화석화되니 영국에 청교도들을 일으켰다. 청교도들이 화석화되니 한세대 뒤에 웨슬리와 휫필드를 일으켰다. 그들이 일어나기도 전에 이미 체코에서 모라비안들을 일으켰다. 모라비안들은 얀 후스와 그의 신앙의 동지들의 순교의 피위에 세워진 강력한 생명의 공동체로 그 생명도 한세대 이상을 갔다. 숨겨지고 가려졌으나 그들의 복음은 땅의 끝까지 다다랐다. 회중교회도 당대에 열방의 끝까지 다다른 역사상 가장 강력한 부흥의 불길을 받았다. 하나님은 오늘도 부흥을 준비하며 일으키신다. 우리는 오늘도 하나님의 일하시는 곳으로 가 화석화되고 좀비화된 죽음에서 깨어나 부흥의 불길 속에 살아가야 한다. 아직 사회적 부흥이 오지 않았다면 개인적인 부흥을 맞이했던 후스와 위클리프처럼, 저 프랑스의 잔느 귀용처럼 작은 불꽃이 되어야 한다.
  




[1] 골 2:21 바른 

21곧 "붙잡지도 마라, 맛보지도 마라, 손대지도 마라." 하는 것이니,

[2] 시 82:6-7 바른

6내가 말한다. "너희는 신들이며, 모두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들이나

7너희는 인간처럼 죽으며, 다른 지도자들처럼 쓰러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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