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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3.2.3.10. 기업을 취한 아들 여호수아19

01.3.2.3.10.9.6. 침노하는 자들의 리더 여호수아

by 에스겔

01.3.2.3.10.9.6. 침노하는 자들의 리더 여호수아



Matthew 11:12 개정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01.3.2.3.10.9.6.1. 침노하는 자들?


천국은 왜 침노를 당하는가?
( )

어떻게 천국이 침노를 당할 수 있는가?
( )

침노하는 자는 누구인가?
( )

침노하는 것은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가?
( )

침노하는 자들이 천국을 빼앗는 것인가?
( )


신약의 침노하는 자들과 가나안을 침노하는 여호수아의 세대는 연결되어 있다. 이것을 알지 못하고 성경을 해석하니 이 구절에 대한 올바른 해석을 하지 못한다.

천국(의 예표인 가나안)은 (여호수아 세대에 의해) 침노 당한다. 침노하는 자들은 (천국=가나안을) 빼앗는다.

천국( )은 ( ) 침노 당한다. 침노하는 자들은 ( ) 빼앗는다(Matthew 11:12).

이렇게 설명하면 내가 마 11:12에서 숨긴 부분이 보일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이 구절의 난해성이 해결된다.

내가 신약의 난해구절인 이 구절을 말한 이유는 이 구절을 통해 여호수아 세대를 연상시키기 위함이다.

침노에 대한 일반적인 학자들의 해석들은 다양하다. 말하려는 사람인 나 예수의 뜻을 알지 못하니 엉뚱한 해석들을 하는데 그 해석이 어딘가 모순된다.

신약과 구약을 관통하는 거대한 문맥 속에서 이를 파악하려면 먼저 기초적인 지식들이 필요하다. 그 기초적인 지식에 대해 먼저 이해하고 침노하는 자들에 대해 알아보아야 하겠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조상들의 이야기인 구약에 정통했으므로 이런 설명이 필요 없을 수도 있지만 현대의 너희는 시간과 공간의 차이가 너무 크기에 설명이 필요하다.


01.3.2.3.10.9.6.2. 천국의 신비적 개념


너희 대부분은 마 11:12절에서 천국이 왜 침략을 당하는 지부터 알지 못할 것이다. 알지 못함의 이유는 너희가 생각하는 천국의 개념이 땅의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천국은 땅의 개념만이 아니다. 사실 이 세상 국가의 개념도 땅의 개념을 포함하지만 결코 땅만으로 모든 것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땅이 있고 그 땅을 지배하는 지배권을 가진 자가 있어야 그 땅은 실효적인 지배를 받아 국가가 된다. 그리고 그 땅을 지배하는 자의 아래에 백성이 있다. 물론 지배자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일 수도 있다. 또는 그 지배의 체제가 다양한 형태를 취할 수도 있다. 민주주의일 수도 있고 왕정일 수도 있고 입헌군주제나 공화제 안의 형식적 군주제일 수도 있다. 또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또는 아나키즘일 수도 있다. 그 모양이 다양하다.

01.3.2.3.10.9.6.2.1. 신비적 통치 개념


그러나 이 모든 종류 국가의 공통적 핵심은 지배력 즉 통치에 있다. 그리고 그 통치에는 지배자와 백성 그리고 땅이 있다. 천국도 이러한 개념을 공유한다. 그러나 천국은 세상 나라들과 근본적인 차이를 가진다. 세상 나라의 지배자는 눈에 보이는 사람이다. 또는 사람의 집합체다. 그러나 천국의 지배자인 우리(하나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이다. 육체가 없는 정신적 존재다. 그것이 영이다. 그러나 정신적 존재라 하여 물리력을 상실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정신이지만 모든 것을 움직이고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는 전능의 능력을 가졌다. 사실 보이는 모든 것은 우리의 능력에 의해 창조되었다. 천국은 이러한 독특한 지배자를 가졌다. 그러니 다른 세상 나라들과는 그 시작부터 차이를 가진다. 우리는 무소부재하며 무소부지하다. 우리는 없는 곳이 없고 모르는 것이 없다. 우리는 우주와 우주밖의 모든 곳에 동시에 존재하며 모든 것을 알고 있다. 또한 우리는 모든 곳에서 동시에 전능의 힘을 행사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통치도 전능이며 제한이 없다.

우리는 물리적 세상과 물질을 벗어난 세상의 모든 곳의 지배자다. 우리는 보이는 세상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더 광활한 세상을 모두 통제한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세상의 통치자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의 육체의 범위뿐 아니라 정신의 영역까지도 모두 지배한다.

그러나 우리의 통치는 결코 강압적이 아니다. 자연의 순리와 질서와 법칙을 거스르지 않는다. 보이는 세상의 모든 것을 우리가 만들고 설계했으며 그 속의 모든 법칙도 우리가 만들었다. 그 원리는 순리의 법이며 사랑의 법이다. 사랑은 결코 강압적이지 않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딘다.(1 Corinthians 13:4-7 개정) 그러므로 우리의 통치는 사랑을 바탕으로 한다. 우리는 모든 곳에 존재하며 모든 곳을 지배하지만 결코 무례하거나 폭력을 동원하지 않는다. 우리의 통치는 사랑이다. 그러나 그 사랑의 통치로 인간에게 자유를 주지만 인간이 자신의 자유를 사용하여 행동한 모든 결과는 우리의 공의에 의해 재판대에 오르게 된다. 자유란 책임을 동반한다. 그렇지 않다면 자유를 사용하여 방종함으로 인해 벌어진 모든 일은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아내가 있는 자가 자유를 사용하여 다른 여자와 불륜을 저지른다면 아내는 어찌하라는 말인가? 그 책임을 묻지 않는다면 그 피해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마찬가지로 살인자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다면 살인을 당한 피해자와 가족의 슬픔은 누구에게 물어야 하는가? 그러므로 공의란 순리이며 정의다. 공의를 배반하는 자에게 그 벌이 있음이 정의다. 그러나 그 형벌도 오래 참는다. 그 오래 참음은 죄인이 회개하여 돌아오면 용서하려 함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지막까지 기다리며 우리의 통치와 그 통치에 따르는 재판조차도 오래 참고 기다린다. 이로 인해 세상에 인간의 악행에 대한 처벌이 늦게 나타나지만 또 그로 인해 우리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무신론의 세대가 등장했지만 그래도 우리는 인내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부정하는 무신론자들도 사랑하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우리가 통치하더라도 최대한 순리를 거스르지 않는다. 자연의 법칙도 우리가 만들었으며 자연과 그 속의 동식물도 사랑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연과 그 속의 순리와 그 법칙을 거스르지 않는다. 심지어 우리가 자연 속에 개입하더라도 그러한 자연법칙을 이용하여 역사한다. 과거에는 인간들이 태풍이나 천재지변에 대해 모두 심판으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과학주의가 득세하면서 모두 과학법칙에 의한 자연현상이라 치부한다. 물론 모든 자연현상을 신의 징벌이라 생각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 그러나 모든 현상을 우연적 현상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문제가 있다. 심지어 기적에 의해 병이 낫는 것도 신이 아닌 그냥 우연의 기적으로 받아들인다. 이 모든 것도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무신론자들의 논리다. 그들의 세계관 안에서는 귀신들과 다른 영적 존재는 있지만 심지어 불교나 기타 거짓신들은 인정하지만 우리(하나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서로 비슷한 존재들에 대해 오직 우리만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이상하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다.

귀신들이 인간에게 부어 넣은 이데올로기인 무신론은 영적 존재인 우리의 통치를 부인하지만 엄연히 우리는 우리가 만든 순리의 법 안에서 통치하며 오래 참음으로 사랑의 통치를 베풀고 있다. 우리의 신비적 통치는 세상에 역사하며 세상의 모든 것을 법칙 안에서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는 자다. 또한 이례적으로 자연법칙을 거스르는 일들을 행하기도 한다. 어떤 자들이 자신들의 기도에 의해 태풍이 경로를 변경하기도 하며 또한 태풍이 소멸되는 역사를 경험하기도 하고 자신의 기도에 의해 농작물이 1~2 시간 만에 1 주일을 자랄 만큼 자라기도 한다. 또한 교통사고의 순간에 물리의 법칙을 거스르는 거대한 힘에 의해 사고를 면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일들은 일반적이지는 않다. 특히 태풍이나 지진 또는 화산과 같은 거대한 변화들을 우리가 일으킬 때는 그로 인해 많은 다른 것들이 영향을 받게 된다. 우리는 우리가 만든 자연이 그 법칙대로 작동하기를 원한다. 그 법칙을 파괴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자연의 법칙은 우리의 성품과 뜻을 따라 이루어진 것으로 그것을 거스르는 것은 우리 자신의 성향을 거스르는 것과 같다. 그러나 우리를 향해 기도하는 자의 기도와 그리고 그를 통한 하늘나라의 일이 다급할 때는 순리를 거스르는 일들을 일으킨다. 그러나 생각하여 보라. 과연 순리를 거스리는 일들을 일으킬지라도 우리가 과학법칙을 사용함을 알겠는가? 물론 너희들이 기적이라 부르는 어떠한 순리를 거스리는 일들은 너희의 과학을 넘어선다. 그러나 우리의 입장에서는 그것은 우리가 자연에 부여한 법칙의 일부다. 너희가 초자연적이라 부르는 현상에 대한 법칙을 너희가 아직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다. 모든 것은 우리가 만든 법과 우리 내부에 이미 존재했던 원리들에 의해 운행된다.

영인 우리가 통치자이며 우리의 일도 자연의 법칙 속에 숨겨져 있다. 그것이 숨겨졌을지라도 엄연히 존재한다. 과거 유신론자들의 시대에 그들이 모든 거대한 자연현상을 신들의 일로 받아들였다. 사실 그것도 틀린 것은 아니다. 참새 한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도 우리(하나님)가 허락하지 않으면 일어날 수 없다(마 10:29).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것들 중 하나라도 우리(하나님) 앞에는 잊혀지지 않는다(눅 12:6).

근대 이후의 철학자들은 자연법칙을 발견하며 그것을 신적존재로 만들었다. 그래서 현대의 너희는 세상은 자연법칙으로 인해 운행한다고 믿는다. 처음 근대 철학자들이 이러한 주장을 했을 때는 신인 우리가 그 법칙을 만들고 그 이후에는 우리가 세상에 개입하지 않고 멀리 떠나 있다고 했다. 그래서 세상은 우리(하나님)가 만든 자연법칙으로 독립되어 움직인다고 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자연법칙을 맹신한 이후에는 철학자들은 그 자연법칙을 창조한 우리(하나님)를 자신들의 개념에서 삭제해 버렸다. 교만한 소피스트들은 언제나 지혜를 말하는 척하지만 그 지혜로 자신들을 높이고 인간 자체를 숭배하게 한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시절에 유신론자들이 소피스트를 무신론자들이라 공격했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자신의 위에 있는 신을 삭제한다. 언제나 인간의 지혜와 철학이 빛을 발하는 시대에는 무신론자들이 등장한다. 이는 사탄이 자신들을 높여 교만의 반역을 하였을 때와 동일한 것으로 그 심정 안에는 오직 자신만이 가장 높은 북극성에 올라 그 보좌를 차지해야 한다는 변태적 욕구만이 존재한다. 그러니 자신 위에 있는 신적 존재의 개념을 스스로 부정하고 잊으려 노력한다. 이러한 인간의 악함과 사탄의 수백 수천 년 이어지는 부단한 노력들이 역사에 흔적을 남겼다.

그러나 너희가 아부리 부정한다 하여 우리의 통치가 사라지겠는가? 우리가 자연의 법칙을 통해 다스림으로 자연의 법칙만을 강조하고 우리에 대해 너희가 잊으려 노력한다 하여 과연 너희가 우리를 삭제할 수 있는가?

그것이 가능하겠는가?

너희는 그 결과를 이미 알고 있다. 사실 우리가 허락하지 않으면 먼지 한 톨도 이동할 수 없다. 너희가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우리는 전지전능하며 무소부재하다. 너희 주변의 모든 일은 우리의 법에 의해 일어난다. 자연법칙도 우리의 법이며 우리의 의지의 확장이다. 누군가 우연히 태풍에 희생되고 누군가 우연히 사고를 당하여 죽는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너희가 그것을 이해할 수 없고 그 죽음이 억울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도 오산이다. 물론 누군가에게 억울하게 살해를 당하고 너희 범죄로 세상에 들어온 자연재해들에 의해 억울하게 휘말려 죽는 것을 보면 너희는 한탄할 것이다. 그에 대해서는 나(예수님)도 한탄한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우리가 너희에게 준 권세를 너희가 남용하여 벌인 일이다. 그것도 원래 우리가 너희에게 권한을 주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 모든 것은 우리의 허용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다 하여 너희가 그 책임을 우리에게 물을 것인가? 그 일을 벌인 것도 너희다. 애초에 우리를 배신하고 떠나 죄악에 물든 살인자의 무리로 살아간 것도 모두 너희 선택이었다. 우리는 너희가 그러한 선택을 하지 않을 전능한 힘을 성령 안에서 너희에게 부여했다. 성령은 모든 시간에 너희와 함께 하여 너희를 지켰고 너희가 마귀에게 속지 않도록 지혜를 부었다. 그러나 너희는 모든 것을 알고도 교만을 선택하고 우리를 배신하기로 선택했다. 지금도 사탄주의자들은 우리(하나님)의 존재를 알고도 사탄을 따르고 적극적으로 사탄의 일을 위해 교회를 훼파하고 성도들을 타락시키는 일을 한다. 왜 그렇게 하겠는가? 그것이 너희 선택인 것이다. 너희 첫 우두머리 아담이 선택한 것을 너희도 계속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너희는 질서 안에서 순리대로 살아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너희 탐욕을 채워준다라고 약속하는 존재가 있다면 심지어 그것이 세상임금인 마귀라 할지라도 너희는 그를 따른다. 돈과 탐욕을 채워준다는 말에 무당들이 귀신을 따르고 또 무당이 돈과 명예와 권력을 준다는 말에 무당을 따른다. 결국 모두 자신의 탐욕으로 인해 하는 선택들이다. 우리는 너희가 돌이켜 살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었다. 바로 나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어 길을 열어주었다. 너희는 믿기만 하면 되는데 그 길을 거부하고 있다. 그 이유는 너희 교만과 탐욕이다.

우리의 통치라고 하면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의 잘못도 우리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우리를 원망한다. 우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우리를 욕하면서도 자신들에게 벌어지는 불행에 대해서는 우리를 탓한다. 얼마나 모순적인가? 교인이라는 자들은 조금 행복하고 쾌락이 주어지면 결코 우리를 거들떠보지도 않다가 삶이 힘들어지면 교회를 열심히 다니고 우리에게 잘 보이려 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 중심의 썩음을 알고 응답하지 않으면 또 우리를 원망한다. 너희 수준이 이러함에도 신인 우리(하나님)가 변명의 글을 쓰는 것은 너희가 구원 얻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우리를 원수로 여기지 말고 우리의 사랑을 이해하기 원한다. 그래서 우리에게 와서 다시 한번 살기를 바란다. 다시 에덴의 안식을 얻고 그 영원한 기쁨을 누리기 원한다.

세상은 이미 죄로 물들어 우리를 떠났다. 이제 우리의 통치를 인격적으로 받아들이는 자들이 희박하다. 교회를 다니는 자들 중에서도 우리의 통치 속에 있는 자들은 극히 작다. 우리의 통치는 현재 모든 곳에 있다. 세상이 존재할 수 있는 것도 또한 세상의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것도 우리의 통치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 세상 속에 우리의 나라(통치)가 임하는 것은 이 책의 앞에 설명한 대로 우리의 통치를 인격적으로 받아들이는 자가 있을 때만 가능하다.

우리의 통치는 은밀하며 숨겨져 있다. 우리의 통치는 위에 설명한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스스로 받아들인 사람에게만 은밀히 임한다. 여기서 은밀하다고 하는 이유는 그 받아들인 자 외에는 인간들이 우리의 통치를 보고자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보려고 하는 의도가 없으면 우리의 통치 자체를 삭제해 버린다. 마치 선입견을 가지고 갈릴레오의 지동설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세대와도 같다. 그래서 괴테는 인간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혐오의 반응을 보인다라고 했다. 그의 말은 인간들의 행동양식을 잘 관찰한 결과에서 나온 것이다. 그 결과 우리의 통치는 완전히 드러나 자연을 움직이고 모든 우주를 움직이며 심지어 인간의 인격적 선택에 의해 그 인간의 삶 속에 임하지만 보지 않으려는 자들에게는 숨겨져 있다.

그러므로 완전한 우리의 통치가 우주를 유지하는 것과 인간 각자에게 우리의 통치가 임하는 것은 또 다른 차원으로 보아야 한다. 무신론자의 우주에서도 우리는 우주를 지탱하며 우주의 모든 것을 운행한다. 그러나 그 무신론자의 인격에는 신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가 우리를 거부하며 보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우리가 인간 각자의 영역에 부과한 권세에 의해 그곳에서 통치자이며 자신의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한다. 물론 우리의 통치 안에서 제한된 자신의 영역을 통치할 뿐이지만 그래도 제한된 신의 형상 즉 우리(하나님)의 형상으로 다스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신론자에게 우리는 숨겨졌으며 또한 그가 계속 보기를 거절함으로 가려졌다.

우리를 인격적으로 받아들인 자들과 또한 거부하는 무신론자들에게 각각 우리의 나라는 다른 것이다. 이를 국가의 영토적 개념에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01.3.2.3.10.9.6.2.2. 신비적 영토 개념


우리(하나님)의 나라도 영토를 가진다. 그런데 그 영토가 일반적으로 세상의 나라가 가지는 영토처럼 지상의 한 지역에 몰려있지 않다. 미국은 아메리카 대륙의 북부에 있으며 북부의 상부가 아닌 하부에 있다. 북으로 캐나다의 아래로 시작해서 남으로 멕시코에 이른다. 일반적인 국가의 영토는 지상의 눈에 보이는 땅과 관련되어 있다. 그 땅은 해외 식민지나 섬을 제외하면 거의 모두 한 덩어리로 붙어있다.

그런데 앞에서 하늘나라(천국)는 우리(하나님)의 통치다. 그래서 통치를 인격적으로 받아들이는 각자에게 임한다. 그러므로 지상의 왕국들과는 다르게 한 덩어리로 뭉쳐진 지상의 땅을 영토로 가지지 않는다. 하늘나라의 영토는 우리의 통치를 받아들인 거듭난 자들이 소유한 영역이다. 그들의 삶의 영역이 우리의 나라의 영토다. 더 정확하게는 그들의 인격이 우리 통치의 영역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나라는 세상 속 어디에든지 존재할 수 있다. 그리고 어떤 곳이든 우리의 나라를 제한 할 수 없다. 심지어 세상 모두에게서 차단된 사형수의 감옥에도 우리의 나라는 임한다. 심지어 홀로 고립되어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는 자들의 은밀한 영역에도 임한다. 또한 세상의 영토와 어떠한 제약도 받지 않는다. 각자 흩어져 존재하지만 우리를 매개로 하여 모두 하나다.


또한 유형 교회에 소속되어 있는 곳이라 하여 모두 우리의 영토는 아니다. 그런데 어떤 세상의 다른 어떤 곳보다 유형교회 안에 가장 많은 유효한 영토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나라의 확장이 폭발적으로 일어나는 부흥도 바로 유형교회 안에서 대부분 일어난다.


이 책이 유형 교회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들을 취하는 것같지만 그것은 교회의 회복을 바라는 마음일 뿐 유형교회를 순수 악으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다. 마치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들임으로 우리(하나님)가 잊지 못하는 것과 같이 유형교회는 나 예수가 지상에 세운 에클레시아의 후예들이다. 그러니 내가 유형교회를 잊을 수 있겠는가? 유대인들이 나를 대적했지만 나는 여전히 그들을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여기고 그들을 위해 그들의 땅에서 십자가를 졌다. 지금도 나는 유형교회를 사랑하며 유형교히를 위해 눈물 흘리는 자다.

01.3.2.3.10.9.6.2.3. 신비적 백성 개념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우리의 통치 즉 우리(하나님)의 나라는 우주 전체에 흐르는 우리의 통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의 우리의 통치는 인간들이 우리의 통치를 받아들이는 것과 관련된 것이다. 세상의 왕이 자신이 통치하는 백성을 가지고 영토를 가지듯 우리의 통치도 백성을 가진다. 그런데 그것이 한 곳에 국한된 영토에 속한 백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의 국적과 상관없이 우리에게 복종하는 자의 인격이 우리의 통치 영역이며 우리의 땅이 된다.

거듭난 자들은 이 책에서 설명한 대로 넓은 길로 가는 자들이 아니며 국가 교회의 전통 속에서 형식적 세례문답의 신앙고백자들이 아니다. 우리(하나님)는 우리를 사랑하여 모든 것을 내어 놓은 구별된 자들에게 임한다. 이 책에서 수도 없이 말했으므로 나는 더 이상 이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겠다.

그런데 거듭난 자들의 인격과 그들의 영역에 관해 설명함에 있어 지상의 영토에 관한 부분이 언급되어야 한다. 세상은 아담의 범죄로 이 세상 임금인 마귀에게 사기에 의해 탈취당했다. 그러므로 이 땅에 우리(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은 마귀에게 빼앗긴 영역을 다시 되찾는 것이다. 그것은 침략전쟁에 의해 수행된다. 바로 침노를 통해 이루어진다.

모든 사람은 죄인인데 그 죄인 하나가 인격적으로 거듭나 우리의 백성이 되는 것은 원수 나라의 백성을 노략질하는 것이다. 바로 침략하여 노략질하는 행위가 이것이다. 또한 그 거듭난 백성이 자신의 삶의 영역에서 우리에게 복종함으로 그 영역이 우리의 나라가 되는 것도 세상의 것을 침략하여 노략질하는 것이다. 바로 침노다.

이러한 침노는 거듭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전도하여 거듭나게 할 때에도 일어난다. 이렇게 연쇄적으로 일어난 반응이 하늘나라의 확장이다. 그러므로 하늘나라는 누룩과 같이 세상 전체로 번져나간다.

이렇게 세상 속에서 침노함을 받아 노략질 당한 영혼들이 모여 참된 에클레시아가 된다. 원수의 관점에서는 분명 사람과 그 영역을 탈취당한 것이다.

이를 구약의 예표로 보여 준 것이 가나안 정복이다.


01.3.2.3.10.9.6.3. 침노의 뜻


마 11:12이 가나안과 관련된 것을 말하고 있다. 본문에 사용된 침노라는 단어의 정확한 뜻을 찾아보자. 그 정확한 뜻이 무엇인지 본문 자체에서 밝혀진다면 구약과의 연계성이 더 뚜렷해질 것이다.

Matthew 11:12 바른
세례자 요한의 날들로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가 침입을 당하고 있으니, 침입하는 자들은 그 나라를 탈취한다.

Luke 16:16 바른
16율법과 선지자들은 요한까지이다. 그 후부터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 나라로 침입한다.

Luke 16:16 KJV
16The law and the prophets [were] until John: since that time the kingdom of God is preached, and every man presseth into it.

Luke 16:16 YLT
16the law and the prophets [are] till John; since then the reign of God is proclaimed good news, and every one doth press into it;


01.3.2.3.10.9.6.3.1. 침노를 당한다


침노를 당한다라는 단어는 원어로 비아제타이(βιάζεται)다. 이 단어는 비아조(βιάζω)라는 단어의 수동태 또는 중간태 동사다.

수동태로는 천국은 침노를 당한다라는 뜻이 된다(NIV 2011).

중간태로는 천국은 침노한다라는 뜻이 된다(NIV 1984).

얼핏 보아 천국이 침노를 당한다라는 해석은 옳지 않아 보인다. 어떻게 우리(하나님)의 나라인 천국이 침략당하여 노략질당한다는 말인가?

그래서 학자들 중에는 중간태로 해석하여 천국이 침노한다. 또는 천국이 강한 힘으로 확장해 나간다로 해석한다. 이것이 더 합리적인 해석으로 보인다.

그러나 문맥을 살펴보면 그 뜻이 생각한 것과는 다를 수도 있음을 알게 된다.

01.3.2.3.10.9.6.3.2. 침노의 큰 문맥


마태복음 11:12절의 큰 문맥

1 장: 왕인 나 예수의 태어남
2 장: 왕인 나에게 경배하는 자와 대적하는 자
3 장: 왕인 나의 세례
4 장: 시험 통과- 세상 임금 마귀 정복
왕으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선포
5~7장: 모인 무리에게 산상수훈
8~9장: 나(예수님)를 통해 임한 우리(하나님) 나라
10장: 제자들을 통해 임한 우리(하나님) 나라
11장: 침노당하는 천국 그리고 천국을 빼앗는 침노하는 자

천국이 임하고 내가 그 왕이 되어 왔다(마 1). 세상의 왕이 죽이려 했으나 나는 이집트로 피했다. 나사렛에 돌아와 살았다(마 2). 나는 인간들을 대신하여 세례를 받았다. 나는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다(마 3). 나는 죄 없는 두 번째 아담(인간)으로서 정당한 세상의 주인이다. 나(예수님)는 불법적 임금인 마귀와 싸워 마귀도 이겼다. 모두 이긴 후 왕으로서 선포했다. "항복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마 4)." 항복조건은 산상수훈대로 사는 삶이었다(마 5~7). 그리고 선포한 대로 하늘나라는 임했다. 나 예수를 동해 우리(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했다(마 8~9). 우리(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침략해 들어온 것이다. 제자들에게 천국전파의 권세를 부여하여 제자들을 통해서도 우리(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마 10).

결국 우리(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을 침략해 들어가다가 마지막 세상의 심판 때에는 옛 세상을 점령해 불살라 버린 후 새 세상 즉 새하늘과 새땅에서 우리(하나님) 나라를 완전케 하여 시작한다.

나(예수님)의 나라는 결코 이 세상에서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나라는 영으로 이 땅에 임하여 이 땅에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어낸다. 통치의 능력을 나타내어 이 땅을 실효적으로 지배한다. 그 일은 한 사람의 인격을 통해 나의 통치가 임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그렇게 시작한 침투(침략)는 확장되어 온 세상으로 임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옛 세상을 심판하고 새 세상을 열어 새 하늘과 새 땅을 지배한다. 나(예수님)의 나라는 영적이지만 결코 육신을 가진 세상과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 한번 상기시키지만 과거와 현재적 시점에서의 나의 나라와 통치는 전 우주적 통치를 말함이 아니다. 세상은 이미 마귀에게 속하여 있으므로 나의 나라를 침략하여 빼앗은 세상의 부분만을 소유한다. 그러나 결국에는 세상 모두를 침략하여 얻고 그래도 굴복하지 않는 옛 세상은 심판하여 불에 던진다. 그리고 결국 새하늘과 새땅에는 완전한 통치를 이룬다. 이때에는 인간이 세계의 위에 교회로 세워져 원래의 기능대로 우리의 통치를 세상에 이룬다. 그렇게 하여 태초의 모습 그대로 우리의 통치는 모든 세상에 가득하게 된다. 그때에는 원수에게 속한 어떤 영역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시점에서 나의 나라는 우주적 통치와 동일해진다. 왜냐하면 지금과 같이 우리의 통치를 거부하는 세계의 어떤 부분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통치는 원래 모양 그대로 막힘 없이 인간을 통로로 하여 온 우주에 퍼진다. 이렇게 나의 나라가 세상에 영적으로 임하고 또한 육적으로 구체화되어 결국 모든 세상을 침략하여 빼앗는 것은 육신에 한계 되어진 현재의 거듭나지 않은 인간들의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신비다.

그런데 이 모든 과정에서 세상의 왕국은 나(예수님)와 나의 나라를 대적했다. 세상의 인간 임금(헤롯)이 나를 대적했다. 또한 이 세상 영적 임금(마귀)도 나를 대적했다. 또한 그 마귀에 속한 세상도 나를 대적했다. 그 세상은 유대인들이었으나 거듭나지 않은 넓은 길로 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리더들은 제사장들과 바리새인 그리고 사두개인들이 있었다.

원래 세상은 전체가 낙원인 세계였다. 그것을 인간의 반역으로 마귀에게 빼앗겼는데 나(예수님)와 나의 나라는 마귀의 세상인 이 세계를 침략하여 다시 빼앗아 나의 나라에 속하게 한다. 그러므로 원래 낙원이었던 세상은 침노를 당한다.


01.3.2.3.10.9.6.3.3. 침노의 작은 문맥


또한 나(예수님)와 나의 나라를 예비하던 세례요한도 감옥에서 죽음 직전에 나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

요한은 나에게 자신의 제자들을 통해 이렇게 물었다.

"오실 그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마 11:3 바른)

그래서 나는 그에게 이렇게 답했다.

"가서 너희가 듣고 본 것을 요한에게 알려라. 맹인들이 보고, 앉은뱅이들이 걷고,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머거리들이 들으며, 죽은 자들이 살아나고, 가난한 자들이 복음을 듣는다. 나 때문에 걸려 넘어지지 않는 자는 복이 있다."(Matthew 11:4-6 바른)

나는 요한의 제자들이 떠나자 무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아니면,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 보아라,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들은 왕궁에 있다. 아니면,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선지자냐?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니, 그는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이다.

이 사람에 관하여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보아라, 내가 너보다 앞서 내 사신을 보낸다.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예비할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하니, 여자들에게서 태어난 자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이가 일어난 적이 없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자라도 그보다 더 크다. 세례자 요한의 날들로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가 침입을 당하고 있으니, 침입하는 자들은 그 나라를 탈취한다. 모든 선지자들과 율법이 예언한 것은 요한까지니, 너희가 받아들이기 원한다면, 바로 그가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이다. 귀 있는 자는 들어라."(Matthew 11:7-15 바른)


"이 세대를 무엇에 비유하겠느냐? 이 세대는 마치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서 다른 아이들을 부르며 말하기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았고, 우리가 애곡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함과 같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그들이 말하기를 '그가 악령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므로 그들이 '보아라, 탐식가요 술꾼이며 세리들과 죄인들의 친구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지혜는 그 행한 일들로 옳다고 입증된다."(Matthew 11:16-19 바른)


그 세대는 위와 같이 나(예수님)와 나의 나라를 거부했다. 나는 그들의 거부에 대해 꾸짖었다. 나는 내가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한 성읍들이 항복하고 나의 나라에 투항하지 않은 것에 대해 꾸짖었다.

"고라신아, 너에게 화가 있다. 벳새다야, 너에게 화가 있다. 너희 가운데서 행한 권능들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은 벌써 베옷을 입고 재 가운데서 회개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더 견디기 쉬울 것이다.

너,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네가 음부에까지 내려갈 것이다. 너에게 행한 권능들을 소돔에서 행하였다면, 그것이 오늘까지 남아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더 견디기 쉬울 것이다."(Matthew 11:21-24 바른)


그 무렵에 나는 입을 열어 기도했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이것들을 지혜롭고 현명한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계시하시니, 아버지께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이것이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맡겨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하며, 아들과 그 아들의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합니다."(Matthew 11:25-27 바른)


그리고 이 전쟁터에서 어리석게 나의 나라를 대적하여 심판을 자초하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여호수아 세대 때와 같이 나의 나라를 선택하여 항복하고 투항하는 자에게는 결국 전쟁이 그치고 안식이 있다. 이 내용은 성경에 다음과 같이 언급되어 있다. 이는 그 시대 사람들의 눈높이에 맞추어진 표현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모두 내게 오너라. 그러면 내가 너희를 쉬게 할 것이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 영혼에 안식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Matthew 11:28-30 바른)


본문을 함께 자세히 읽음으로 이미 이 본문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 것이다. 세상과 나의 나라와의 전쟁이다. 이 전쟁에서 우리에게 항복하고 투항한 자들에게는 안식이 주어진다. 바로 완전한 마음의 평화다. 그리고 그 평화는 확장되어 마지막 심판 때에는 온 세상에서 전쟁이 그칠 것이다. 왜냐하면 마귀와 그에게 속한 세상의 모든 인간들이 심판의 불로 들어가 세상은 태초 때와 같이 완전한 우리의 통치에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01.3.2.3.10.9.6.3.4. 침노의 뜻


원래 천국이었던 세상을 다시 회복하기 위해 침략하여 빼앗아 다시 천국으로 전환시킨다. 그러므로 원래 천국이었던 세상을 침략하는 것이 침노다. 바로 여호수아 시대에 가나안 7 족속이 있던 가나안을 침략하여 빼앗아 천국으로 전환시킨 것과 같은 이치다.

나와 나의 나라는 존재하는 목적 자체가 마귀에게 빼앗겨 고통하는 세상을 침략하여 그곳에서 영혼들을 건져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침노는 필연적 과정이다. 나의 나라는 세상에 침노하여 세상에 침투하고 그 영역을 확장하여 나간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항복하지 않고 극렬히 저항하는 자들은 심판하여 불에 던진다. 이와 같이 세상은 불에 던져져 심판을 당하고 새 세계가 되어 새하늘과 새땅이 된다. 그곳은 새 세계로 모든 피조물은 새 피조물이다. 옛 타락한 세상은 이미 그곳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과정에서 필연적인 것이 침노다. 즉 침략하여 영혼(백성)과 영토를 빼앗는 것이다.

그런데 그 대상이 되는 세계가 원래는 낙원이었으므로 낙원이 침노를 당하는 것이다. 침노 자체가 마치 식민지에서 회복되는 광복과 같다. 그러므로 이 과정에서의 침노는 태극기를 들고 환영해야 하는 기쁜 일이다. 광복군을 향해 환영과 감격의 환호를 터트려야 한다.



01.3.2.3.10.9.6.4. 침노하는 무리의 리더인 나 예수와 예표자 여호수아


여호수아는 헬라어식 표기인 나 예수의 히브리어식 표기다. 두 이름은 서로 동일하다. 원래 히브리어를 사용했던 나와 나의 시대에는 헬라식 이름인 예수(이에수스)라고 나를 부르지 않았다. 그때에는 나의 이름이 히브리식으로 여호수아라 불렸다. 그것을 신약의 코이네 헬라어로 옮겨 적으면서 예수(이에수스)라는 표기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기억하라. 내가 사용한 내 이름의 정확한 발음은 여호수아(히 예슈아 또는 예허수아)다.

구약에서 나를 예표하는 인물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런데 나와 동일한 이름을 사용한 자는 여호수아와 호세아 둘이다. 그런데 그 발음이 정확히 일치하는 것은 여호수아다.

왜 그럴까?

그것은 여호수아가 맡은 사명이 나의 사명을 명확하게 나타내기 때문이다. 바로 원래 천국이었다가, 원수에게 빼앗긴 세상을 침노하는 것이다. 빼앗아 노략하여 원래 영토로 즉 하늘나라로 회복시키는 것이다. 여호수아는 왕으로 정복 전을 펼쳐 원래 천국이었던 세상을 수복하는 나의 예표자다.

참고로 발음이 거의 동일하며 뜻은 완전히 같은 호세아는 나와 같이 타락한 세상을 사랑하여 끝까지 사랑하고 돌이키기를 기다리는 남편이다. 그래서 그는 나의 인내와 사랑의 예표다.

그러므로 나와 함께 하여 세상을 침노하는 무리는 세상을 정복하여 빼앗아 다시 천국으로 회복시키는 회복의 무리다.

이제 마 11:12절에서 말하는 침노와 침노하는 무리에 대한 이해가 너희 마음에 와닿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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