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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3.2.3.10. 기업을 취한 아들 여호수아20

01.3.2.3.10.9.6. 침노하는 자들의 리더 여호수아

by 에스겔 Jan 11. 2025

지금 우리는 여호수아서와 관련해 나(예수님)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너무 긴 글의 흐름에 휩쓸려 방향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이야기의 흐름을 다시 한번 목차를 통해 보여주겠다. 지금 너희가 읽고 있는 것은 여호수아 연대기의 20 번째 글이다. 그러니 지혜로운 자들도 목차를 통하여 글의 흐름을 보지 않는다면 너무 긴 글 속에서 길을 잃을 것이다. 여호수아의 연대기의 제목은 위에 보이는 01.3.2.3.10. 기업을 취할 아들 여호수아의 연대기이다. 그 큰 가지 아래에 다음의 글들이 곁가지를 뻗어나간다.
01.3.2.3.10. 기업을 취할 아들 여호수아의 연대기
    01.3.2.3.10.1. 물과 땅에 속한 자와 하늘에 속한 자
    01.3.2.3.10.2. 하늘을 땅에 가져온 자
    01.3.2.3.10.3. 하늘에 속한 자
    01.3.2.3.10.4. 통치, 사귐, 대화
    01.3.2.3.10.5. 거짓 아비, 거짓 신앙, 거짓 통치
    01.3.2.3.10.6. 참 통치와 거짓 통치
    01.3.2.3.10.7. 광야에 속한 거짓 통치
    01.3.2.3.10.8. 참 개혁과 참 교회
    01.3.2.3.10.9. 종 모세와 아들 여호수아
        01.3.2.3.10.9.1. 가나안
        01.3.2.3.10.9.2. 강 건너편의 신들
        01.3.2.3.10.9.3. 가나안 7 족속의 의미
        01.3.2.3.10.9.4. 가나안의 의미
        01.3.2.3.10.9.5. 산상수훈과 가나안(천국) 입성
        01.3.2.3.10.9.6. 침노하는 자들의 리더 여호수아
            01.3.2.3.10.9.6.1. 침노하는 자들?  
            01.3.2.3.10.9.6.2. 천국의 신비적 개념

            01.3.2.3.10.9.6.3. 침노의 뜻
            01.3.2.3.10.9.6.4. 침노하는 무리의 리더인 나 예수와 예표자 여호수아
            01.3.2.3.10.9.6.5. 침노의 이유



01.3.2.3.10.9.6.5. 침노의 이유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을 때 선포된 메시지는 회개하라는 것이었다. 회개하라는 말은 항복하라는 것이다. 사랑의 신인 우리(하나님)가 왜 항복을 말하는 것인가? 화목을 말하는 우리가 왜 전쟁의 개념에서 사용되는 침노를 말하는 것인가?

이를 설명하기 위해 앞에서 긴 내용을 기록했다. 그리고  그 이전에 이미 역사를 통해 수많은 이해를 위한 노력을 했다.

아담이 범죄함으로 세상이 지옥으로 변했을 때도 우리(하나님)는 아담에게 원시복음을 전해 두 번째 아담인 내(예수님)가 갈 것을 알렸다. 그러나 그 세대는 가인과 같이 타락하며 라멕과 같이 잔악해졌다. 그들은 죄악이 온 세상을 가득 채우게 했다. 그들의 삶에는 폭압이 가득했다. 그 결과 그들은 공의에 의한 심판을 불러들였다.

바로 노아시대에 임한 심판이었다. 노아시대에 나는 구원을 준비했고 공의의 법에 의한 심판을 피할 수 있는 의인을 세웠다. 바로 노아였다. 노아를 통해 노아의 가족을 구원은 얻었다. 그러나 인류의 타락은 멈추지 않았다. 노아의 후손들도 번성하여 땅을 채우기 시작하자, 이전 아담의 세대와 같이 타락하여 폭압이 세상을 가득 채웠다. 강한 자가 약한 자들을 압제하여 약육강식의 피라미드 세상을 세웠다. 그리고 이전에 자신들을 멸망시켰던 홍수로 인한 심판에 대항하기 위해 하늘에 닿는 탑을 세우려 했다.

인류는 교만하여 다른 이에게 겸손히 대할 줄 모른다. 겸손을 말하거나 겸손한 행동을 할 때도 사실 그 안에 자기 자랑이라는 교만의 동기가 뱀과 같이 숨어 똬리 틀고 있다. 결국 겸손한 행동으로 자신의 착함을 자랑하려 한다. 자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 한다. 그것이 증명되고 나면 마음 안에 우쭐됨이 가득 해진다. 그 교만으로 자신이 아닌 모든 타자들을 자신의 발아래 놓아야 만족한다. 힘이든 지식이든 또는 재물이든 수단으로 사용하여 타자들을 굴복시키고 지배해야 한다. 그래서 직장에서 높은 자리에 오르려 하고 돈을 모아 더 부유한 자리로 가기를 추구한다. 삶의 모든 동기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정말 심각한 문제는 자신들의 행동이 악인 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부동산의 가격을 폭등시켜 결국은 집 없는 자들이 집을 살 수 없게 만들고 그들이 평생 모든 노동의 대가를 착취하면서도 전혀 양심의 떨림이 없다. 오직 자신만 돈을 모으고 다른 이보다 더 행복해지면 되는 것이다. 자신의 동네가 가난할 때는 세끼 밥을 굶지 않을 만큼 많은 양식이 있는 것을 자랑한다. 그리고 잉여 생산물을 팔아 재물을 만들고 그것으로 이웃의 유동자산과 부동자산을 사들인다. 그리고 결국 그 이웃의 몸도 사들여 노비로 삼는다. 그리고 기존에 있던 자본과 노비들의 노동력을 이용해 더 큰 부를 축적한다. 그리고 그것에서 만족하지 못하고 더 극악한 탐욕을 부린다. 결국 인구의 대부분이 소작농과 노비로 전락하는데도 그것도 당연시 여긴다. 단지 저들은 게으르고 무능하여 가난한 것이므로 자신들이 노예로 부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현대의 너희의 시스템도 별반 다르지 않다. 단지 너희는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너희 대부분은 현대 산업사회의 노예다. 임금을 받는다고 생각하지만 그 임금도 다양한 방식으로 다시 착취를 당하고 통장에는 빚만 가득하다. 불필요하며 해로운 것들에 중독되어 몸과 마음이 병들어가고 결국 마지막에는 병원에서 평생을 번 돈의 몇 배를 빼앗기고 빚만을 자식들에게 남기고 불운한 생을 마친다. 평생을 노예로 살고 착취당하며 거짓 것들에 중독되어 처참한 인생을 살면서도 그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한다. 마치 메트릭스에서 기계들에 의해 전기를 생산하는 수단으로 사용되는 지도 모르는 어리석은 행복자들이다. 과연 너희 행복이 행복인가? 냄비에서 서서히 물이 끓어 오르니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익어 죽어가는 개구리들아! 너희에게 악을 행하는 자가 누구냐? 바로 너와 같은 인간들이다. 그리고 그들의 뒤에는 너희가 부정하는 영적 존재들인 악마들이 도사리고 있다.

그런데 더 불운한 사실은 너희가 악마의 시스템 속에서 그것을 적극적으로 지지한다는 것이다. 너희 본성이 그렇다. 너희는 도적질 하며 빼앗고 멸망시키는 것을 즐긴다. 그렇게 하여 타인의 것을 빼앗고 타인을 멸망시켜 자신이 그들의 위에 앉기를 기뻐한다. 너희는 행악의 종자요. 불운을 퍼트리는 저주의 종자들이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다.

그러나 첫 아담이 그러했듯 너희는 원래 우리(하나님)의 형상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너희를 지옥의 바다에서 건져내기를 원한다. 너희는 너희가 그 고통 속에 헤매이는 것을 보는 우리의 마음을 아는가? 너희를 내어 놓지 않으려는 사탄에게서 우리는 너희를 빼앗아야 한다. 또한 너희를 지키고 있는 세상의 성벽에서 너희를 빼앗아야 한다. 또한 그 지옥에서 나오기를 거부하는 마약에 취해 제정신이 아닌 너희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우리는 너희를 빼앗아야 한다. 이것이 침략이며 노략질이라 해도 우리는 반드시 너희를 지옥에서 건져내어야 한다. 어찌 자식이 불못에서 고통당할 것을 알면서 그것을 그냥 지켜볼 수 있겠느냐? 너희는 그것이 가능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견딜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너희 자신의 악한 육체와 너희가 속한 세상과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너희를 약탈한다.

이것이 침노의 이유다. 이것이 약탈의 이유다.

우리(하나님)의 나라에 속하지 않은 자들의 결말은 정해져 있다. 그들은 직간접적으로 악을 행하여 온 세상을 고통으로 물들인다. 그 결과 그들은 죄악 된 세상과 함께 사라진다.

우리는 사라질 필멸자들이 죽임 당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가 누구이든지 살기를 원한다. 그가 가인의 자손 라멕이라도 그의 죄가 가인의 77 배일찌라도 그를 사랑한다. 그가 살기를 원한다.

그런데 라멕의 상태를 생각하여 보라. 과연 그가 돌이킬 자이겠는가? 또한 그 뒤에 있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 마귀를 생각하여 보라. 그 마귀가 라멕을 놓아주겠는가? 라멕과 함께 마귀를 따르는 세상의 집단이 라멕을 놓아주겠는가?

왜 세상이 나 예수를 죽였는지 아는가? 왜 바울을 죽이고 베드로를 죽였으며 12 사도 모두를 죽였는지 아는가? 사도 요한은 여러 번 죽음의 형에 처해졌으나 그의 사명을 인해 내가 보호했다. 그러니 세상은 열둘 모두를 죽이려 시도했다. 그리고 열한 사도를 죽이고 나머지 하나는 죽음보다 더한 고통들을 여러 번 주었다. 그러한 자들이 자신의 전사인 라멕을 원수의 나라에 빼앗기겠는가? 사탄과 그의 세상은 빼앗기지 않기 위해 적들을 화형 시키고 목 베고 수장을 시킨다. 이렇게 원수들을 집요하게 추적하여 죽이는 어둠이 만약 자신의 종인 라멕을 우리(하나님)나 성도들이 빼앗으려 하면 가만히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가 라멕을 구하려면 전쟁을 해야 한다. 힘과 능력으로 눌러 적의 성문을 파하고 그 속에서 약탈하듯이 빼앗아야 한다. 그래야 라멕 자신과 세상과 사탄에게서 라멕의 영혼을 구할 수 있다. 라멕 자신도 구해짐을 원하지 않기에 약탈해야 한다.

01.3.2.3.10.9.6.6. 침노의 방정식


그런데 사탄에게는 전능의 능력으로 공격을 가하여 파쇄를 하지만 정작 구원받아야 할 라멕에게는 침노의 방식이 다르다. 분명 침노하여 약탈하는 것이지만 그 침노의 방식이 다르다. 영혼을 향한 침노는 그 방식이 사랑이다. 사랑이 아니고서는 영혼 구원의 방정식을 풀 수 없다. 사랑 외에는 영혼을 빼앗아 구원할 방법이 없다. 침노는 심판이지만 사실 침노는 사랑이다.

생각하여 보라. 자신의 영역에서는 신과 같은 존재가 인간이다. 그런데 그 인간을 강제로 구원하려 한들 그들이 스스로 원하지 않는다면 구원이란 불가능하다. 구원이란 스스로 원수와 원수의 죄악과 그로 인한 심판에서 벗어나 참된 진리를 행함으로 진리와 빛의 나라에 속하여 참된 쉼을 얻는 것이다. 그런데 스스로 진리를 행하지 않고 원수와 원수가 미끼로 던지는 탐욕을 따른다면 그 인간이 어떻게 쉼을 얻고 천국의 상을 얻을 것인가? 구원이란 반드시 스스로 원해야 가능하다.

그러므로 영혼에게 우리의 사랑을 베풀어 그에게 우리의 사랑을 보이고 보여서 결국 그 영혼이 우리의 사랑을 깨닫게 하여 그도 우리를 사랑하게 하는 방법만이 영혼 구원 방정식의 해법이다.

구약의 여호수아 세대의 정복은 마지막까지 회개하기를 거부한 악마와 그 악마를 따르는 극악한 자들에 대한 심판을 보여준다. 가나안 7 족속은 회개할 기회를 저버리고 죄악을 그 땅에 가득 채웠다. 저들은 선을 따르지 않고 악마를 따랐다. 악마와 악마를 따르는 자들은 결국 심판에 의해 불로 들어간다. 그들의 세상인 옛 세상도 불로 들어간다. 그래서 옛 하늘과 옛 땅이 녹고 불탄다는 구절이 성경 안에 있다. 그리고 새하늘과 새땅 즉 새 세상이 들어선다. 여호수아 세대의 정복은 마지막 심판까지의 정복을 압축하여 한번에 보여준 것이다. 옛 세상의 심판과 새 세상(세대)의 도래를 보여 준 것이다. 결코 이 땅에서 나 예수가 메시야로서 인간 군대를 동원한 군사 정복을 일으킬 것을 예언적으로 보인 것이 아니다. 유대인들이 기대한 것은 이런 군사적 정복이었다. 그러나 나와 나의 나라는 군대를 통한 억압으로는 전파될 수 없다. 억압과 폭력으로는 인간의 마음을 녹일 수 없다.

여호수아의 시대에도 우리가 진정으로 원한 것은 세상을 상징하는 가나안 7 족속을 심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도 구원받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들은 끝까지 악을 행하여 심판을 불러들였다.

우리는 한 영혼을 사랑으로 설복시켜 우리에게로 전향시킨다. 그리고 그 하나를 통해 또 세상에 영향을 준다. 인간은 자신의 영역에서 변화를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는 유일한 존재다. 그 유일한 존재가 사랑의 존재가 되어 우리와 사랑의 관계를 이루고 또 그 사랑이 전파되어 옆의 인간들을 사랑의 관계로 초정한다. 이렇게 천국은 누룩과 같이 전파된다.

이렇게 세상은 사랑에 의해 침노를 받는다. 그리고 침노를 받은 영역은 천국으로 회복된다. 천국은 하늘나라다. 하늘나라는 우리(하나님)의 나라다.


01.3.2.3.10.9.6.7. 침노의 대상


여호수아 세대의 침노의 대상은 가나안이었다. 가나안에는 7 족속이 살았다. 이 책의 <01.3.2.3.10.9.3. 가나안 7 족속의 의미>에서 언급했듯
가나안 7 족속이 의미하는 바는 인간의 마음속의 7가지 대죄가 아니다. 마음속의 죄악에 대한 정복은 이미 광야에서 옛사람이 죽음으로 끝났다. 물론 세상 속의 죄악에 대한 정복이라 할 수 있다. 침노의 대상은 침노하는 자의 내부가 아니라 그의 외부의 세상이다. 세상 속의 죄악도 침노하는 자의 외부다.

천국이 침노하는 곳은 세상이며 그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개인이다. 세상 속의 죄가 그 대상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근본적 대상이 아니다. 세상 속의 죄의 근원은 사탄이다. 그리고 그 사탄의 뜻을 따라 세상에 죄를 퍼트리는 자들은 사탄과 같이 타락한 천사들이다. 그런데 사탄과 그 졸개들도 진정한 근본적 대상은 아니다. 결정적인 열쇠는 인간에게 있다. 우리가 인간들에게 준 권세는 인간 개인의 영역에서는 전능이다. 자신의 영역을 스스로 통제하고 변화시키는 결정은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다. 또한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인간 자신의 영역에서는 질서대로 복종하게 되어있었다. 그런데 인간의 타락으로 그것이 부분적으로 문제가 생겼다. 그러나 여전히 인간은 자신의 삶을 통제하고 자신의 영역에서 모든 결정을 내리고 현재와 미래를 통제한다. 결국 자신이 결정하여 행하는 대로 그 영역은 이끌려 나간다. 인간은 철저히 스스로 원해야 움직이는 우리의 형상을 닮은 지상의 작은 신이다(시 82:6, 요 10:34). 사탄도 질서상으로 인간의 권위를 무너트리지 못한다. 단지 속여서 인간을 조종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인 인간만을 설득하면 다른 어떤 것도 권위 상 인간을 다시 빼앗아 갈 수 없다. 또한 인간만 빼앗아 온다면 그에게 속한 모든 세상의 영역을 회복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너희 인간이 우리가 너희 세상을 침노하여 너희를 빼앗아 오는 동기가 세상을 다시 찾기 위한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우리도 세상이 다시 사랑으로 가득 채워져 아름다워지기를 원하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의 탈취나 인간의 탈취가 필요해서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다. 세상과 인간에 대한 처분들 중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없다. 우리는 원래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전능자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그런데 그 따위 세상이 반역을 했다면 그냥 없애버리고 새로 만들든지 그것도 싫으면 그냥 우리 자신으로 만족하면 된다. 우리는 완전한 자기 충족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침노를 하려는 이유는 오직 하나다. 사랑이다. 누군가 자녀를 기른다면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랑에 의해서도 우리의 마음도 동일하다. 세상에는 기형적으로 그렇지 않은 부모들도 보이지만 그들은 우리의 사랑에서 벗어난 타락한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침노의 대상과 목적은 우리가 사랑하는 인간이다. 유괴당한 아이를 찾는 것이 목적이다.

그런데 이 침노의 대상은 세상이라 했다. 물론 유형교회 밖의 세상은 구원받아야 할 대상이다. 그런데 유형교회 안에도 구원받아야 할 대상들이 있다. 대부분의 유형교회 안의 신앙고백자들은 우리에게 속한 자들이 아니라 원수에게 속한 자들이다. 그들을 원수에게서 다시 찾아오는 것이 구원이다. 그러므로 우리(하나님)의 침노 대상은 세상뿐 아니라 유형교회 안의 거짓신앙자들이다. 이들은 거짓 선지자들을 따라 간 자들이며 넓은 길로 들어간 자들이다. 이들을 그냥 두면 열매 맺지 못하는 가지들이 되고 결국 잘려져 불에 던져진다. 이를 알고도 이들을 그냥 둔다는 것은 우리가 참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들을 사랑하여 이들도 구원하기를 원한다. 이들이 구약적으로 말하면 유대인들이다. 저들은 유형 교회 속에 있으나 열매 맺지 못하는 가지들이며 영적으로는 거짓 선지자들에게 속하였다. 저들은 강 건너편 광야의 신들을 섬기는 자들이었다. 광야의 백성이며 율법아래에 있는 자들이다. 결코 자유자들이 아니다. 아들이 아니며 종이다.

우리(하나님)는 이렇게 세상과 세상에 발을 들인 유형교회 안의 신앙고백자들에게 침노한다. 우리는 침노하여 넓은 길로 가는 자들에게 좁은 길로 가는 지혜를 선물한다. 평탄한 길을 가는 자에게 험한 길로 가는 지식을 선물한다. 쉬운 길을 가는 자에게 험한 길로 갈 용기를 선물한다.

바울은 나(예수님)를 만나 삶의 방향을 전환했다. 그 이전에 자신이 따르던 조상들의 종교를 버렸다. 사실 버린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거짓신앙에서 빠져나와 조상들이 섬기던 우리(하나님)를 만난 것이다.

역사를 살펴보면 한 공동체의 신앙이 한세대를 넘지 못해 변질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그 주된 이유가 잘못된 종교 조직 때문이며 카톨릭이 만들어 놓은 국가교회의 전통 때문이다. 나의 나라는 세상과 상관이 없다. 세상의 권력과 상관이 없으며 세상의 조직과도 상관이 없다. 세상의 힘에 의존하는 그 어떤 조직도 나와는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나의 나라는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01.3.2.3.10.9.6.8. 침노의 시와 때


가나안 정복은 세상을 정화시켜 천국으로 만든다는 행위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가나안 정복은 현재적 시점에서 세상을 멸하고 우리(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정 지으면 안 된다. 영적 의미에서는 맞지만 세상의 물질계에서는 그 의미가 맞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렇게 생각하면 유대인들과 같이 정치적인 메시야를 통한 세계 정복을 꿈꾸기 때문이다. 물질계에서 세상을 멸하고 하늘나라를 세운다는 것은 군사적인 정복을 뜻한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이 세상의 나라가 아니다. 이 세상의 나라에서는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다. 인간은 악하다. 너희 악한 인간들이 회개하여 지상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 그런데 모든 자가 돌이켜 회개하려 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지상의 나라에서는 완전한 우리의 통치를 받는 나라가 세워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구약의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무리 모두가 우리에게 복종하지만 아간과 고라와 같은 반역자들이 나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여호수아가 하늘로 온 이후에 이스라엘 자손들은 사사기의 기록과 같이 타락했다. 지상에 완전한 우리의 나라가 세워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간의 악으로 인해 그러하고 회개한 자들이 살 수 있는 한 세대를 지나면 다음 세대들이 타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호수아 시대에는 전쟁이 그쳤지만 여호수아의 사후에 이스라엘이 타락함으로 이스라엘에 전쟁이 그치지 않았다. 안식이 사라졌다. 이렇게 인간의 부패한 속성은 지상에 완전한 하늘나라 건설에 장애물이 된다.

그래서 지상에는 완전한 왕국을 세울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마지막 심판의 때를 제외하고는 세상에 군대의 무력을 통해 개입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심지어 인간들을 재난이나 여타 다른 심판적 수단을 통해 함부로 죽이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어떤 악한 인간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사랑한다. 그가 죽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영원한 심판에 들어가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모든 자들이 구원받는 것이다. 비록 인간들이 마지막까지 회개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그들을 사랑하여 기다린다.

우리의 침노는 현재의 시간에는 영적 침노다. 물리력을 동원한 군사적 침투가 주를 이루는 것이 아니다. 침노는 결코 세상을 심판함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물론 현재적 심판이 임할 때가 있다. 그런데 그것은 그 죄악이 가득 차 더 이상 그 죄로 인한 심판이 기다려 주지 않을 때에만 그렇다. 그러함에도 개인이나 공동체의 심판이 그들의 거주지 전체의 종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현재적으로 침노는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며 인간의 마음을 한 사람 한 사람 점령함으로 이루어진다. 그렇게 하여 열방으로 침노가 전파되지만 그 침노가 열방 전체의 모든 영역을 점령하지는 않는다. 단지 각 개인의 영역과 개인의 영역이 합해진 공동체의 영역에서만 이루어진다.

그런데 마지막 심판 때에는 그 침노가 옛 세상을 불태우고 오직 새 세상만을 남기는 침노다. 옛 세상 자체가 옛 나라다. 또한 새 세상 자체가 새 나라다. 통치자가 일시에 완전히 바뀌는 것이다.

여호수아 세대의 침노는 마지막 완성될 심판 때의 침노까지 보여주었다. 그래서 여호수아 세대의 침노는 심판과 진멸까지 보여주었다. 옛 세상과 그에 속한 자들이 모두 진멸을 당하였고 그 땅은 우리와 우리에게 속한 광야에서 새로 난 새피조물들이 점령했다.

여호수아 세대의 침노는 현재적 침노와 미래적 침노, 둘을 동시에 보여준다. 현재적 침노는 개인의 영혼을 노략하는 것이고 미래적 침노는 종말적 진멸과 새 세계의 창조를 통해 오직 우리에게 속한 새피조물이 된 영혼들만이 존재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마지막 침노의 시와 때는 어떻게 알 것인가? 그때는 정하여져 있다. 비로 세상에 죄악과 폭압이 가득하면 그 결과 공의의 심판이 일어나게 된다. 그때는 모든 육체의 마지막이 우리(하나님) 앞에 이를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자식들이 지옥에 떨어지는 것을 보아야 할 것이다.

가나안 7 족속도 그들의 죄악이 가득 차게 되어 심판이 왔다. 그 심판을 우리를 대리하여 한 자들이 여호수아 세대였다. 그들은 침노하였고 그곳에 우리의 통치에 순종하는 왕국을 세웠다.

이 내러티브 자체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이는가? 마지막 날의 심판 때에 벌어질 일들이 보이지 않는가? 바로 새하늘과 새땅이 임하고 우리의 나라가 임하는 것을 보이는 것이다.

물론 가나안 족속들을 심판함은 구약 이스라엘을 위한 선택이었다. 최대한 정화된 땅에서 구별되도록 하기 위해 그 땅의 모든 죄악과 우상들을 가진 자들을 진멸했다. 그러나 우리는 가나안 족속들의 멸망을 기뻐하지는 않았다. 아브라함의 때로부터 400여 년을 우리가 기다린 것은 오직 그들을 오래 참아 그들이 돌아올 기회를 주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우리가 기회를 주었음에도 회개하지 않은 자들은 심판을 당했다.


01.3.2.3.10.9.6.9. 침노에의 반응


여호수아 시대에 침노에 대한 가나안 족속들의 반응은 두려움이었다. 그들은 40년 전에 이집트에 내려졌던 재앙과 홍해가 갈라진 사건에 대해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민족이 이동하는 곳에는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함께 함을 보았다. 그 기둥은 인간적인 어떤 수단에 의해 세워진 것이 아니었다. 신이 아니라면 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구름 기둥과 불기둥은 아주 거대해서 구름 기둥이 만드는 그늘이 이스라엘이라는 민족 전체를 사막 같은 광야의 태양에게서 보호했다. 밤의 불기둥도 그 빛으로 이스라엘 민족이 있는 곳을 밝혔으며 사막의 추위에 대항하여 온기를 제공했다. 저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스스로 수고하지 않았지만 저들의 신인 우리가 저들을 먹이고 입혔다. 하늘에서 양식이 내려와서 백성 전체를 먹이는 기적은 그 어떤 민족의 신들도 행하지 못한 기적이었다. 저 거대한 민족이 사막에서 옷을 구할 수도 없는데 저들의 옷은 늘 해어지지 않고 그대로였다. 이해할 수 없는 수많은 일들이 따라다녔다. 요단을 건너기 전의 전투에서 보여준 저들의 정복전은 두려움 그 자체였다. 홍해가 갈라진 것은 가나안인들이 직접 보지 못했지만 요단의 강물이 끊어져 이스라엘이 요단을 건넌 사건은 저들의 눈으로 직접 보니 더 이상 무엇으로도 형언할 수 없는 공포가 몰려왔다.

가나안인들을 더욱 두려워 떨게 한 것은 세작[^1]들로부터 전해오는 첩보였다. 첩보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신인 우리가 자신들의 전멸을 원하는 것으로 보였다. 자신들은 도망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전투를 하기도 너무 공포스러웠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자신들의 터전을 버리고 어디로 갈 수 있다는 말인가? 그래서 힘을 합해 대항하기로 했다. 다행히 첩보 중에는 희망적인 것도 있었다. 이스라엘의 무기가 형편없다는 것이었다. 자신들은 성 안에서 수성전을 하면 되기에 그렇게 방어가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이들은 도시국가 수준이나 부족국가 수준의 형태를 유지한 곳도 있었고 또 그들 위에 군림하는 연맹체의 강력한 수장들도 있었다. 유럽의 봉건제를 생각하면 그 당시 가나안 세력들의 모습을 이해할 수 있다. 고구려가 연맹체 국가였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고구려는 봉건제에 비해 더 강력한 왕권을 갖춘 국가였다. 이 시기 가나안 세력들은 유럽의 봉건제에 가까운 권력구도가 지배적이었다. 이들은 도시국가나 부족 국가 단독으로 이스라엘과 싸워서는 승산이 없음을 알고 동맹을 맺어 함께 싸우기도 했다. 우리와 우리의 군대인 이스라엘은 결국 이 모든 세력들을 점령했다. 그런데 우리가 과연 가나안의 모든 민족들을 멸절하기 원했을까? 우리는 침노에 대해 저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기를 원했을까?

01.3.2.3.10.9.6.9.1. 라합의 응답


이러한 가나안 침노의 서막이 된 전쟁이 있었다. 바로 여리고 성 전투였다. 그곳에서 침노에 대한 올바른 반응을 보인 사람이 있었다.

바로 라합이었다. 그 내용을 성경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싯딤에서 두 사람을 정탐꾼으로 은밀히 보내며 말하였다.

"너희는 가서 그 땅과 여리고를 정탐하여라."

이에 그들이 가서 라합이라는 기생의 집에 들어가 거기 묵었다. 어떤 사람이 여리고 왕에게 말하였다.

"왕이시여, 몇 명의 이스라엘 사람이 이 땅을 정탐하려고 오늘 밤 여기에 들어왔습니다."

여리고 왕이 사람을 라합에게 보내어 말했다.

"네게로 와서 네 집에 들어간 그 사람들을 끌어내어라. 그들은 이 땅을 정탐하러 왔다."

그 여자 라합은 두 사람을 데려다가 숨겨놓고 말하였다.

"그 사람들이 제게 오기는 하였으나 어디에서 왔는지는 몰랐습니다. 그들은 날이 어두워 성문을 닫을 때쯤 나갔는데, 어디로 갔는지 저도 알지 못합니다. 급히 그들을 뒤쫓아 가시면 따라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여자는 이미 그들을 지붕으로 데리고 올라가, 그 지붕 위에 널어놓은 삼대 속에 그들을 숨겨 놓은 뒤였다. 그 사람들은 요단강을 따라 나루터까지 정탐꾼들을 뒤쫓아 갔고 그들이 나가자 곧바로 성문이 닫혔다. 정탐꾼들이 잠들기 전에 라합은 지붕 위에 있는 그들에게 올라가서, 말했다.

"저는 여호와께서 이 땅을 여러분에게 주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당신들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고, 이 땅의 모든 주민도 당신들 앞에서 간담이 녹았으니, 이는 당신들이 이집트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당신들 앞에서 홍해의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여러분이 요단 동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한 일 곧 그들을 모두 멸망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일을 듣자마자 우리 마음이 녹았고, 당신들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으니, 이는 여호와 당신들의 하나님께서 위로는 하늘과 아래로는 땅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당신들에게 호의를 베풀었으니, 당신들도 부디 제 아버지 집에 호의를 베풀어 주겠다고 여호와께 맹세하고 확실한 징표를 제게 주십시오. 그리고 제 부모와 형제자매와 그들에게 속한 모든 사람을 살려 주시고, 죽음에서 우리의 생명을 구해 주십시오."

그 사람들이 그 여자에게 말하였다.

"만일 네가 우리의 이 일을 누설하지 않으면 너희를 대신하여 우리의 목숨을 죽기까지 내놓을 것이며, 여호와께서 이 땅을 우리에게 주실 때에 우리는 인애와 진실로 너를 대우할 것이다."

라합이 창문을 통하여 줄을 달아 그들을 내려 주었는데, 이는 그 여자의 집이 성벽 위에 있어서 그 여자가 성벽 위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라합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뒤쫓는 자들이 당신들과 마주치지 않도록 산으로 가서 거기에서 사흘 동안 숨어 있다가 뒤쫓는 자들이 돌아간 후 당신들의 갈 길로 가십시오."

그 사람들이 그 여자에게 말했다.

"네가 우리에게 맹세하게 한 이 맹세에 대해 우리가 허물이 없도록 하겠으니, 우리가 이 땅에 들어올 때, 우리를 달아 내린 창문에 이 붉은 줄을 매어 두고 너의 부모와 형제와 아버지 집의 사람들을 모두 너의 집으로 모이게 하여라. 누구든지 너의 집 문 밖으로 나가면 그의 피는 그의 머리로 돌아갈 것이고, 우리에게는 허물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너와 함께 집 안에 있는 사람에게 손을 대면, 그의 피는 우리 머리로 돌아올 것이나, 만일 네가 우리의 이 일을 누설하면, 네가 우리에게 맹세하게 한 이 맹세에 대해 우리는 허물이 없을 것이다."

그 여자가 말하였다.

"당신들의 말대로 될 것입니다."

여자가 그들을 보내니, 그들이 떠나간 후에 라합은 그 붉은 줄을 창에 매달았다. 정탐꾼들은 산으로 가서 뒤쫓는 자들이 되돌아갈 때까지 사흘 동안 거기에 머물렀으므로, 뒤쫓는 자들이 모든 길을 두루 찾아다녔으나 정탐꾼들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 두 사람은 다시 산에서 내려와 강을 건너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와서 그들이 겪은 모든 일을 자세히 보고하고, 여호수아에게 말하였다.

"분명히 여호와께서 그 온 땅을 우리 손에 넘겨주셨고, 그 땅 모든 주민도 우리 때문에 녹았습니다."
(Joshua 2:1-24 바른)

침노에 대한 라합의 반응을 보았는가?

그녀는 우리(하나님)와 우리의 백성들이 한 일들을 듣고 정직하게 반응했다. 두려워했으며 자신의 나라를 버리고 항복했다. 그리고 자신의 나라의 적인 우리의 정탐군들을 도왔다. 라합의 행동이 매국노의 행동과 같이 느껴질 수 있다. 그런데 생각하여 보라. 우리는 원래 그녀를 보살피는 창조주였다. 아담의 범죄 이후의 세상에 태어난 라합은 우리의 존재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라합의 조상 아담을 만든 자로 바로 아담의 아버지였다. 아담의 근원이며 출발이며 창조자였다. 우리는 또한 아담으로 인하여 라합의 아비이기도 했다. 그러니 라합이 원래 창조주와 아비에게 돌아오는 것이 무슨 잘못이란 말인가? 사실 인류는 우리의 자식들인데 원수인 사탄에게 유괴당했다. 그런데 유괴당한 아이들이 우리에게 다시 돌아오는 것이 죄이겠는가?

여리고는 우리의 기적으로 인해 무너졌다. 이스라엘이 한 것이라고는 우리가 시키는 대로 그곳을 한 주 동안 돌며 마지막 날에 하라는 대로 한 것뿐이었다. 그 소식을 들은 가나안 족속들은 모두 마음이 공포로 가득 찼다.

이들과 반대로 올바른 반응을 보인 라합은 그녀로 인해 자신의 모든 가족이 구원을 얻었다. 그리고 라합은 살몬이라는 유다지파 남자와 결혼했는데 그는 다윗의 조상이었다. 마태복음에는 다음과 같은 족보가 있다.

Matthew 1:5-6 바른
5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6이새는 다윗 왕을 낳았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다윗은 인간으로 간 나 예수의 조상이었다. 그러니 라합은 나의 조상이 되는 영광을 누렸다. 그녀의 선택은 성경에 기록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침노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 것이 옳은 것이지 보여주는 모범이 되고 있다.

침노에의 올바른 반응은 항복이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회개라 할 수 있다. 회개의 원어적 뜻은 그 방향을 전환하는 것이다. 원수의 사상과 나라를 버리고 우리의 진리와 나라에 투항하는 것이다.

여호수아 세대는 그들의 침노로 인해 가나안에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다.

"항복하라 천국이 침노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1]: 스파이, 첩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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