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는 바람에 흔들리며 빛을 반사하는 식물들의 빛깔에 관하여
지금 내가 사는 아파트 창문을 열면 앞에 동백나무가 보인다. 그리고 그 옆엔 작은 향나무가 있다. 동백과 향나무 사이에는 키 큰 전나무가 보인다. 멀리에는 벚꽃나무가 몇 그루 보인다. 처음 이사 올 때 어린 아들이 층간 소음에 자유롭게 다닐 수 있도록 1층을 선택했다. 불편함이 많지만 그래도 1979~1980년도에 아파트가 지어질 때부터 심어져 있던 오래된 나무들을 볼 수 있어서 좋다. 봄, 여름, 가을에는 푸름을 볼 수 있고 겨울에도 그 잎이 떨어지지 않는 상록수들을 볼 수 있어 좋다. 활엽수들이 겨울에 잎을 떨구어도 그 나름대로 보여주는 가지들도 매력이 있다. 낙엽송과 벚나무는 잎을 떨구지만 향나무와 동백 그리고 사철나무는 겨울 추위에도 그 푸르름을 유지한다. 이곳 부산은 날씨가 따뜻한 편이라 겨울에 상록수들이 좀 덜 지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전나무는 키가 너무 커져서 아파트 5층 높이는 되는 것 같다. 그래서 내 방의 창으로는 나무의 큰 나무줄기의 중하단 부분만 보인다. 전체를 보려면 베란다 창으로 가야 한다. 그래도 나무의 꼭대기는 볼 수 없다. 베란다 창에 서면 아파트 화단에 심어진 여러 종류의 나무들을 볼 수 있다.
아파트 중앙의 길을 따라 심어진 벚꽃나무들도 볼 수 있다. 오래된 아파트에 벚꽃나무가 수십 그루 심어져 있다. 벚꽃나무는 중앙에 십자로 난 길을 따라 심어져 있고 그리고 아파트 외곽의 담을 따라 심어져 있다. 봄에 한창 꽃이 필 때면 벚꽃 잎들이 아파트 전체를 연분홍으로 채색을 한다. 심어지고 40년이 넘은 나무들이라 꽤 볼만하다. 몇 년 자라면 그 가지가 아파트를 넘어 인도를 덮는다. 또 가지가 너무 풍성해지면 인도를 넘어서 차가 통행하는데 방해가 된다. 작은 승용차들은 괜찮지만 트럭이나 버스는 가지가 차에 닿는다. 아파트 내부에도 가지가 차에 걸려서 부러지는 일들이 종종 있다. 그렇게 되면 조경업체를 불러 가지치기를 한다. 벚나무들이 커서 장비들이 필요하다. 그리고 베어낸 가지들을 처리하는 것도 트럭을 동원해 하루 넘게 작업해야 한다. 사실 나는 승용차를 몰고 다니기 때문에 벚나무 가지들이 통행을 방해하지는 않는다. 여름에는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고 겨울에는 잎이 떨어져 가지들 사이로 충분한 햇빛이 들어 베란다를 따뜻하게 데운다. 겨울 가지들의 휘어진 곡선들도 나는 사랑한다. 나는 식물들을 좋아하기 때문에 나뭇가지를 정리하는 것이나 아파트 앞뒤로 있는 화단의 풀을 정리하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도 혼자 사는 집의 정원이 아니니 내 뜻대로 할 수는 없다. 그렇게 푸른 풀과 나무가 잘려나갈 때는 푸념을 하곤 한다.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고 예쁜 꽃도 보여주고 특이하게 구부러지고 휘어지는 멋진 벚나무의 가지들이 아까운데 굳이 저렇게 많이 잘라야 하나, 나는 원하지도 않는데 자기들이 원한다고 내가 낸 관리비를 마음대로 사용해서 내가 아끼는 식물들을 자른다고 불평이 나온다. 머리로는 잘라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는데 마음이 그것을 용납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그것을 입 밖으로 내면 이상한 사람이 되는 것이니 그냥 혼잣말로 불평을 한다. 예전에는 그런 비합리적인 생각들은 혼잣말로도 입 밖으로 낸 적이 없는데 살면서 배웠다. 마음을 표현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은 치유가 된다는 것을. 한참 가지들이 풍성하게 자라면 집이 숲 속에 있는 것 같다. 바로 앞 동 아파트도 나무들에 가려져서 잘 보이지 않는다. 나는 그 푸르름을 사랑한다. 사람들은 오래되고 식상한 나무들이 심어져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식상해도 그 식물들이 주는 푸름의 다양한 색깔과 빛들을 사랑한다.
겨울이면 창 바로 앞에는 꽃을 피우는 동백이 있다. 겨울이면 이 나무의 꽃이 언제 필지 기다려진다. 예전에는 피는 시기가 일정했는데 요즘은 지구온난화의 영향으로 그 시기를 짐작하기 어렵다. 늦가을에서 2월 사이 언제든 꽃이 필 수 있다. 겨울에 바로 창 앞에서 찬바람 속에 핀 꽃을 보는 것은 겨울처럼 삭막한 마음에 위로를 준다. 내가 본 죄 많은 이 세상은 추운 겨울 모든 것이 죽어진 죽음에 죽음을 덧댄 고통의 땅이었다. 그래서 세상이 지어진 원형의 생명과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한 식물을 사랑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을 보는 자체로 위로를 받는다. 죽음의 세상에서 생명을 본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사람들은 이해를 못 하는 것 같다. 그래도 그 생명을 내가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풍성한 위로인지 모른다. 표현을 못해도 그 위로를 찾아 숲을 찾는 이들은 세상을 떠나 자연 속에 묻히는 것 같다.
동백은 우리나라에 자생하는 종이 그렇게 많지 않다. 내가 부산 동백섬에서 본 동백은 한 겹의 꽃잎을 가진 붉은 꽃을 피우는 동백이다. 꽃잎은 외겹에 6장이 있다. 그 꽃잎이 겹치면서 꽃의 수술을 두르고 있다. 색은 붉은데 그 색이 전통 혼례의 신부들이나 여인들이 화장을 하던 연지의 색을 닮았다. 연지의 색보다는 약간 진할 수 있다. 붉은데 약간 노랑계통의 색을 품고 있다. 피와 같이 붉은색이 아니라 눈을 감고 강한 태양을 쳐다보면 보이는 붉은색이다. 눈꺼풀을 통해 투과된 빛은 사람 살과 그 속에 있는 피의 색을 품게 된다. 원래의 태양의 색인 주광색에 살아있는 맑은 피의 색이 더해지면 보이는 색이다. 아주 햇살이 강한 날 눈을 감고 태양을 쳐다보면 그 색을 볼 수 있다. 수술은 노란색인데 일반적인 꽃들에 비해 수술의 크기가 크고 색도 선명하다. 수술의 대는 길게 뻗어있고 그 대의 끝에 마치 꽃이 핀 것처럼 더 노란 병아리 빛 수술이 귀엽게 인사를 한다. 수수한 애기 빛 웃음처럼 해맑다.
우리나라에서 자생하는 동백은 대부분 해운대 동백섬의 동백과 비슷한 종류인 것 같다. 울릉도나 제주도에 자생하는 동백도 비슷한 형태를 지녔다. 물론 울산동백처럼 여러 겹의 꽃이 피고 그 꽃도 6색으로 흰색에서 진한 붉은색이 같이 있는 것도 있다. 홍도와 거문도, 남해안과 제주에는 흰 동백꽃이 있다. 서상(瑞祥)이라 한다. 거문도와 울릉도, 거제, 통영시 우도에는 분홍 동백꽃도 있다. 또 눈 오는 겨울에 꽃을 피우는 종류는 동백(冬栢)이라 부른다. 이 시기에는 벌들이 없어서 수분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새가 대신 수분을 해주는데 이런 꽃을 조매화(鳥媒花)라고 한다. 그리고 동백을 수분해 주는 새의 이름이 동박새다. 그 색은 어린 동백잎의 연두색이다. 그 크기도 동백잎의 크기만큼 작다. 동박새는 향기가 없는 동백꽃이 겨울에 꿀을 제공하기 때문에 동백의 수분을 도와준다. 동백꽃의 방언 동박꽃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또 봄(3~5월)에 분홍꽃을 피우는 종류는 춘백(春栢)이라 부른다. 일본에서는 한자는 다르지만 이와 비슷하게 춘(椿)이라 불린다. 동일한 한자가 한국에서는 참죽나무를 뜻하는데 일본에서는 봄 춘(春)에 나무 목(木)을 붙여서 동백나무(椿)를 뜻한다. 아마 이른 봄에 꽃이 핀다 해서 춘(椿)이라 부른 것 같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나라에 동백의 종류가 많은 것은 아니다. 동백의 특성상 따듯한 남해안 지역이 아니면 자생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요즘은 지구온난화로 많이 더워져서 동백이 조금은 더 북쪽에서도 자랄 수 있는 것 같다. 그래도 동백의 전통적인 자생지는 남해안이 그 한계다. 울산이나 울릉도는 좀 더 북쪽이지만 겨울에 쿠루시오 난류의 영향으로 따뜻한 기후를 유지하던 곳들이었다. 아무래도 우리나라는 동백의 북방한계선에 위치해서 자생할 수 있는 면적이 작다. 그래서인지 동백의 종류도 그리 많지 않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비해 따뜻한 지역이 많은 중국에는 온대에서 아열대를 아우르는 동백의 종류가 아주 많다. 동백은 중국에서 산다화라 부른다. 그 종류도 수도 없이 많다. 그 색도 흰색부터 흰색에 붉은 줄이 희미하게 간 것부터 분홍이나 진한 붉은색이 있는 것까지 다양하다. 또 흰색에 붉은색이 섞이는 모양도 다양해서 여러 종류를 나눈다. 흰 꽃인데 수술 주변의 꽃잎들이 노란빛을 띠는 종류까지 수많은 종이 있다. 꽃잎도 외겹이나 쌍 겹이 있고 장미의 그것처럼 꽃잎이 겹겹이 겹쳐진 것까지 다양하다. 심지어 카네이션을 닮은 동백도 있다. 중국 외에도 동남아에서도 동백은 자생을 한다. 유럽에 처음 전해진 것은 필리핀 산이었다. 동백 중 애기 동백이나 장미를 닮은 동백은 그 아름다움이 또한 독특하다. 애기동백이나 울산동백은 엄밀히 말하면 동백과는 종류가 다른 다매(茶梅)지만 우리나라에는 그냥 동백이라 불린다. 꽃이 통으로 덜어지는 동백과는 달리 꽃이 한 잎씩 떨어진다. 같은 동백나무속에 속하는 거의 비슷한 식물이라 그렇게 부르는 것 같다. 중국에서는 오래전부터 동백을 사랑하여 정원수로 기르고 수많은 품종을 개량한 것 같다. 나무는 ‘산다(山茶)’라 하고 꽃은 ‘산다화(山茶花)’ 또는 ‘해홍화(海紅花)’라 불렀다. 산다화는 나무이름을 따른 것이고 해홍화는 바닷가 절벽에서 붉은 꽃을 피우는 아름다운 꽃이라 붙여진 것 같다. 나무의 이름 산다는 산에 사는 야생차나무와 닮아서 산에 있는 차나무(山茶)라 부른 것 같다.
동백이 차나무와 닮아서 유럽에서는 처음에 동백이 차나무인지 알고 그것을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가져가 대량으로 재배를 했다. 물론 뒤에 차나무가 아닌 것으로 밝혀졌지만 그 꽃의 아름다움에 반해 동백을 사랑하게 되었다. 불어로 카멜리아다. 기타 유럽어들은 발음이 거의 비슷하다. 처음 실수로 동백을 가져간 체코슬로바키아 선교사의 이름이 카멜이었다. 동백꽃 카멜리아는 그의 이름을 딴 꽃이다. 그는 필리핀에서 차나무와 비슷한 나무를 보았다. 차나무로 착각해 유럽으로 가져갔다. 차나무는 중국에서 엄격히 외부 반출을 막고 있는 나무라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 실수를 한 것 같다. 그러나 선교사 카멜의 실수 덕분에 유럽인들은 사랑스러운 동백꽃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유럽인들은 이 꽃을 사랑한다. 샤넬의 브랜드화도 카멜리아(동백)다. 샤넬의 문장에 등장하는 꽃이 동백이다. 유럽인들은 이 동백을 유난히 사랑했다. 그래서 프랑스의 작가 알렉상드르 뒤마가 쓴 소설 춘희(La Dame aux camélias)의 주인공 마르그리트 고티에가 바로 동백의 여인이다. 원래 프랑스 제목인 La Dame aux camélias가 동백의 여인이란 뜻이다. 25일 동안은 흰 동백꽃 옷을 입고 5일은 붉은 동백꽃 옷을 입는 사랑스러운 여인이다. 원래 동백꽃같이 아름다운 고급매춘부였는데 아르밍 뒤망이라는 청년의 순수한 사랑에 지금까지의 생활을 청산하고 사랑을 쫓으려 했으나 뒤망의 아버지의 반대로 이별을 하고 결국 폐병으로 죽게 되었다. 그녀가 죽은 후 뒤망은 파리로 돌아와 그녀가 자신을 사랑했음에도 아버지의 반대로 뒤망 자신을 위해 이유도 밝히지 않고 다시 매춘부로 살아가는 절망을 선택했음을 알고 슬픔과 후회에 젖게 된다. 이런 비극적이고 아름다운 소설의 여주인 공이 동백꽃 여인(La Dame aux camélias)이다. 그래서 일본어 번역이 춘희(椿姬: 동백 아가씨)다. 그녀는 고급 매춘부였지만 순수했다. 사랑이 다가왔을 때 자신의 모든 것을 버려 사랑을 선택했고 그 사랑이 상처받지 않도록 또 자신을 버려 희생했다. 결국 그 사랑의 그리움을 이기지 못해 병들고 죽음을 맞이했다. 그 추운 겨운 예쁜 꽃송이를 피우고 결국 그 꽃송이 전체가 함께 땅에 떨어져 다시 한번 땅에서 피는 동백을 닮았다. 그래서 유럽인들은 카멜리아라는 여성의 이름을 많이 쓰는 것 같다. 뒤마의 소설 동백꽃 여인의 주인공 마르그리트처럼 애절하고 비극적인 사랑의 주인공이 되라고 딸에게 그 이름을 주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 동백을 닮은 아름답고 순수한 열정적 사랑을 하는 행복한 동백꽃이 되라고 사랑스러운 이름을 붙여주는 것 같다. 그래서 까멜리아는 그 이름 자체의 어감부터 사랑스럽다. 베르디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이탈리아어: La traviata, 방황하는 여인)는 뒤마의 아름다운 비극을 각색해서 만든 것이다.
몇 주전에 나무 가지들을 잘라냈다. 집 앞의 동백이나 향나무까지 가지치기를 했다. 그 키 작은 나무들도 앙상하게 가지를 쳐버렸다. 가을이나 이른 봄도 아니고 이 더운 여름(7월)에 저렇게 잘라버리면 나무들이 힘들어할 텐데 잘라버렸다. 작은 나무들은 사실 매년 조금씩 전지를 하기 때문에 저렇게 잘라버릴 이유가 없는데 앙상하게 잘라버렸다. 이런 걸 보면 속상하다. 그런데 내 속상한 마음을 아는지 동백나무가 이 더운 여름에도 새 싹을 돋우었다. 처음에는 희고 가냘픈 잎을 냈다. 흰 잎은 약간 붉은 듯도 하고 연한 살색인 듯도 한 색들이 섞여있었다. 초록의 색은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몇 주 만에 그 작은 것이 자라서 큰 동백 잎이 되었다. 나중에는 흰색도 변해서 연두로 변했다. 잎뿐 아니라 가지도 뻗었다. 가지도 잎의 색과 같이 살색이 섞인 흰색이었으나 변해서 연두가 되었다. 그리고 태풍 카눈(2023/08)이 지난 다음에는 연두에 나뭇빛이 도는 가지도 생겼다. 처음 크기만큼은 아니더라도 10~15cm 정도의 길이가 자랐다. 태풍이 비를 많이 뿌리고 나서는 한층 더 싹이 자라나고 있다. 벌써 20cm까지 자란 것도 있다. 그리고 또 새로운 싹이 돋아나고 있다. 다른 활엽수들은 태풍 후에 잎이 쳐지고 시들시들한데 동백은 더 생생하고 푸르르다. 한 달이 안된 잎은 아직 연두 색이지만 결국 다 큰 동백 잎처럼 강한 광택과 색감을 나타낼 것이다. 그 두께도 두꺼워질 것이다. 나도 동백은 많이 보았지만 새싹이 돋는 것을 본 것은 사실 처음이었다. 동백은 상록수라 그 잎이 잘 떨어지지도 않고 잎의 색도 진하고 그 두께도 두껍다. 기름을 바르지 않아도 그 잎의 광택이 강하다. 초록 중에서도 유난히 광택이 강하고 색도 강하다. 그 잎을 보면 그 열매에서만 아니라 그 잎에서도 동백유가 추출될 것처럼 보인다. 그처럼 생명력이 강한 잎은 좀처럼 떨어지지도 않고 좀처럼 새싹이 돋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나무가 빨리 성장하지도 않는다. 수십 년을 자라도 그 크기가 그렇게 크지 않다. 집 가까이 해운대 동백섬이 있다. 길이 막히지 않으면 차로 15분이면 도착한다. 동백섬에 가면 수백 년 된 동백들도 자주 보는데 그 크기가 다른 수백 년 된 나무들과 비교하면 아담하다 못해 작다. 성장이 그렇게 빠르지는 않은 것 같다. 그렇다고 나무의 둥치나 목본경(나무줄기)과 가지가 그렇게 굵어지지도 않는다. 동백은 다 자라도 일반적인 나무들의 1년생의 크기를 넘지 않는다. 그런 동백이 군락을 이룬 모습을 볼 수 있는 동백섬이 가까이 있다는 것은 나에게는 큰 행운이다. 사람들은 동백섬을 산책하면서도 그것을 잘 모르는 것 같다. 그 나무들이 작으니 겨우 십 년도 안된 나무들이라 생각을 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자라지도 않고 매년 같은 모습으로 있는 것은 모를 것이다. 아마 관심이 없을 것이다. 단순히 꽃이 피고 그 꽃이 떨어져 붉은 융단을 형성하면 그것에 잠시 눈이 가고 마는 것 같다. 수백 년이 넘은 동백나무 군락을 산책로에서 바로 볼 수 있는 것이 기적이란 것을 모르는 것 같다. 이런 작은 나무들의 특징은 크기는 작지만 그 나무의 색이나 생명력이 아주 강한 것 같다. 나무의 목질도 아주 단단하다. 그리고 대부분 상록수인 것 같다. 마치 아주 높은 고지대에서 자라는 나무들이 고지대의 거센 바람과 극심한 일교차를 견디고 작은 키로 땅에 거의 달라붙어있는 것과도 비슷하다. 그런 환경에서 살 수 있는 나무들은 아주 생명력이 강할 수밖에 없다. 향나무나 동백은 그런 것 같다. 수백 년을 자라도 다른 나무의 1년생 크기밖에 안 되지만 그 작은 나무 안에 수백 년의 생명을 간직한다. 그리고 그 생명은 항상 푸르다. 겨울을 이길 뜨거운 생명을 그 안에 품고 있다. 겨울 추위가 아무리 매서워도 그 모든 것을 이긴다. 그것이 생명이다. 여름 더위가 아무리 뜨거워도 그것을 이긴다. 가뭄이 아무리 이어져도 그 안에 품고 있는 수분을 스스로 품고 그 가뭄을 이겨낸다. 절벽 바위에 매달려서도 그 생명을 이어간다. 향나무와 같이 토양도 수분도 영양분도 없는 곳에서 죽음을 이기고 승리한다. 절벽은 여름 더위에 달아오르면 50~60도 이상의 열기를 품는다. 계란도 서서히 익혀버리는 무서운 온도다. 그래도 소나무의 송진보다 더 향기롭고 강인한 진액을 가진 향나무는 부활의 생명을 가졌다. 울릉도 도동리의 향나무는 2500년을 살았다. 울릉도 향나무처럼 척박한 섬의 절벽에서 결코 시들지 않는 영생의 생명을 품고 있는 동백이 군락을 이루어 울릉도에 자생한다.
이들은 다 자라도 1년생의 작은 몸을 가졌지만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는 1년생인 듯 죽음의 곳에서도 죽지 않고 결코 그 잎이 시들어 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상록수라고 한다. 항상 푸르르다. 그 ‘항상 푸르르다’는 말을 Evergreen이라 한다. 죽음의 곳에서조차 언제나 푸르르다. 33살로 영원히 푸르른 나사렛 청년처럼.
또한 모든 것이 생명을 숨기는 겨울에도 꽃을 피운다. 동백의 종류마다 개화시기가 조금 다르지만 공통인 것은 겨울(겨울과 늦겨울)에 꽃이 핀다. 일반 식물들과는 정반대다. 죽음의 곳에서 피와 같은 붉은 꽃을 피우고 꽃의 몸 전체가 떨어져 내린다.
동백
그 떨어 나린 꽃들 아름답다
그런 아름다운 주검
골고다 절벽 어느 목수의 낙화
저주나무아래 떨어 나린 피
방울방울 굳어 나린 동박꽃
아름다와 영원히
그의 사랑 가슴에 떨어 나린다
그 떨어 나린 날 찬 바람
사랑의 가슴 시려 아린다
그 남과 죽음
봄날이나
그 마음 시절
차웁고 시라린 겨울
아무도 없던 그 봄날 오후
그 생명 제 십이시 채 못 내어
오롯이 쏟아 나린다.
마지막 피 방울 꽃 떨어 나릴 때
그 가슴 아파 시럈다
오날 따가얀 여름날
이리 가슴 시라린 한풍 아림은
그 손끝 발끝 달리았던
떨어 나린 춘백낙화 마음에 나린 까닭
Je vous aime, mon seigneur camélia.
동박새
이 겨울 너는 동박의 사랑
너의 사랑 동박꽃
너의 사랑 동박꿀
이 겨울 그는 동박새의 사랑
겨울 주검 서리바람
갸냐린 연두 동박잎 새
지쳐 떨어져
겨울 주검 동박낙조
동박꿀은 피 생명
붉게 피어 오른 동박꽃
주검 겨울
동박꿀 흘러
피의 생명 부어진 동박새
불사생명 타오른다
동박꿀 내어준 동박화
주검 겨울
동박새 갈음생명 떨구어
그의 이름 동박낙화
혈화 혈화(血花 血火)
나무 아래
가득타(充) 가득타(爞)
겨울 주검 이긴 동박혈화
그 결실
동박지름 호롱 타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