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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아안 Jun 07. 2022

할머니의 밥상머리

나를 살게 하는 힘, 절대 긍정과 무한 신뢰

  외할머니와 함께했던 35 전의 나날들은 희미하지만 잊히지 않고 마음속에 남아 있다. 어느 동네 어귀에 든든하게  있는 오래된 나무처럼. 부모님   모두 공무원으로 객지에 계셔서 동생은 친할머니와 살고 나는 외할머니와 살았다.  달에 한두  부모님을 함께, 혹은 따로 만날  있었다. 그래서 외할머니는 나에게 전부였다. 그렇게 할머니의 자양분을 먹고 마시며 성장했다.

그 동네에 가면 그때가 그리워진다.


  헤어질 수 없을 것 같았던 외할머니와 30  전에 헤어지고 어른이 되어  아이들을 데리고 뵈러 가면 놀러 오신 이웃 어르신들께서 말씀하신다. “오야 할머니, 손주 왔다”라고. '오냐' 뜻은 "아랫사람의 물음이나 부탁에 대하여 긍정하여 대답할  하는 "이라고 한다. 내가 어렸을  무슨 말만 하면 할머니께서 "오야 오야, 우리 아기"라는 대답을 하셔서 그때부터 할머니의 별명이 '오야 할머니' 되셨다고 한다. 그때 내가 제일 많이 들었을 거면서 나는 여태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때는 모든 것이 당연하고 따뜻했다. 달그락 거리는 그릇 부딪히는 소리를 들으며 이불속에서 빈둥대면 할머니는 어깨 넓이보다 조금   동그란 나무 밥상을 힘겹게 들고 들어오신다. 무겁게 든다고  밥상 안에 모든 것이  들어있는 것은 아니다. 이어서 문턱 높은 부엌을 두세   들락날락하신다. 숭늉 대접, 주전자, 상에  올린  그릇에 담긴 나물 반찬들. 지금 생각해보면 둘이 먹을 것인데 뭐가 그리 많았는지... 할머니는  아무 말씀 없이 드셨다. 나는  말이 많았다. 어제 동네 형들과 놀면서 싸웠던 얘기, 강가에서 고기 잡은 얘기, 감나무에서 떨어진 얘기... 그때마다 할머니는 그냥 "오야, 잘했네", "오야, 할머니가 해줄게" 이렇게 말씀하시던 기억이 난다. " 먹을 때는 조용히 밥만 먹어라", "친구들이랑 사이좋게 지내야지 싸우긴  싸우냐", "누가 감나무에 올라가라고 했어?" 같은 말씀은 전혀 하지 않으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얘기는 아주 가끔 만나는 우리 아버지나 어머니께서 얘기하셨던  같다. 그래서  먹을  입을 다무는 습관을 주셨던  같다. 그런데 할머니는 그런 말씀을  기억이 전혀 없다. 그래서 당연 긍정의 답이 돌아올지   먹을 때마다 동네에서 있었던 어제 일을 할머니께 일러바쳤고 할머니에게서 들을 100% 확률의 ‘칭찬과 긍정 만끽했었다. “할머니는 하늘이 무너져도  편일 이라는 믿음이 그때,  밥상머리에서 생겼던 것이다.


  2017 9 28 8시경 할머니는 향년 98세의 연세로 영면하셨다. 그날 아침 어머니의 울음 섞인 전화를 받았지만 실감이 나지 않았다. 장례를 치르고 돌아온  한참이  실감이 나지 않는다. 사실은 그렇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받아들일  없는 것이다.  받아들일  없을까? 무엇이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막는 것일까?

 

  학창시설, 질풍노도의 시기를 거치면서 우리는 몸과 마음이 성장한다. 하지만  성장 속에는 시련과 아픔, 절망, 고독의 과정을 피해   있는 사람이 없다. 누구나 아프다. 아픈 것이 당연하다고 어른들이 말하고 책에도 그렇게 쓰여있다. 그래서 그런지 그때 누구나 아프게 해도 된다는 권한이 주어진 것처럼 나에게 상처를 주었다. 우리의 행실이 못마땅한 부모님과 선생님은 상처 전문가인  촌철살인의 비슷비슷한 명언으로 상처를 줬다. 그룹에 끼지 못하면 친구들도 욕설을 해댔으며 선배들은 그것을 무슨 유산인  전수했다. 대학에 가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상처를 받아야 성장하는  알았다. 연약한 어린아이를 깊은 계곡에 던졌던 스파르타의 쓸모없는 존재 같이 되지 않으려고 아무렇지 않은 , 누구나 청춘은 그렇게 버텨간다고 생각했다.

아픈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시기가 있었다.


  직장생활 초년에는 학창 시절이라는 수련과정을 무사히 마친 젊은 사자처럼 제법 의욕이 넘쳤다. 하지만 사자는 본능적으로 무리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사실을  마음속에 새겨두며 처신한다. 끝없는 회의, 야근, 회식 속에서 권력구도의 정치적 경향성을 빠르게 탐색하는 것이 성패를 좌우한다는 사실을 알아간다. 상사의 충고가 아무리 마음에 상처를 주어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포커페이스를 유지해야 살아남을  있다. 그것이 사회에서의 능력이고 당연한 '인간성'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그것을 '스트레스'라고 말하고 의사들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ost Traumatic Stress Discorder)'라고 진단을 내리고도 남을 명백한 상처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당연한 삶의 과정으로 인식한다. 인간성이 심각하게 훼손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한다.  자식들도 나처럼 살아간다면 분명히 그럴 것인데..." 자식들은 어떻게 버틸  있을까?" 걱정이 되기 시작한다.

어떻게 버틸 수 있을까

 

  나는 아직 할머니가 그립다. 그 마음의 저변에는 “내가 살아남고 싶다 본능 같은 것일 수도 있다. 할머니는 절대적으로 나를 신뢰했다. 아니 내가 그렇게 믿었다. 왜냐하면 할머니께서 그렇게 행동하셨기 때문이다. 그때   번도 할머니가 나의 얘기를 긍정하지 않으리라고 상상할  없었던 것은 밥상머리에서 매일 보여주셨던 할머니의 습관이  습관으로 전이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나브로 할머니의 존재가 든든한 나무처럼  마음속에 자리 잡았고 어떠한 상처나 의도적인 외부 침해 “누군가 나를 절대 신뢰하고 무한 긍정하고 있다 믿음의 에너지가 스스로를 보호하고 있던  아닌가 생각한다.

나는 아직 할머니가 그립다.

 

  내 아이는 밥상머리에서 나에게 모든 것을 말하고 있을까? 혹시 내가 말을 못 하도록 하는 것은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내 아이는 어떤 에너지로 앞으로의 많은 날들을 버텨 나갈 수 있을 것인가? 그 애의 스승이 그 역할을 해줄까? 아니면 친구가 그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절대 긍정과 무한 신뢰의 에너지를 사랑하는 내 아이들은 어떻게 갖게 될까? 돌아가신 할머니에게서 받은 그 귀한 에너지는 5살 어린 시절, 그 아침 밥상머리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 밥상머리가 그때 거기서 끝났다는 게 실감 나지 않는다. 당연하지 않은가? 그때 받은 사랑과 신뢰의 에너지가 내 존재 속에 그대로 존재하고 내일 아침에도, 그다음 날 아침에도 내 아이들과의 밥상머리는 계속될 것인데 끝날 리가 있겠는가. 이제는 내가 그들과 눈을 맞추며 귀 기울일 차례다. 문득 할머니의 목소리가 듣고 싶다. “오야~”라는 말씀을 더 이상 들을 수 없다. 그러나 맘 속 깊은 곳에 남아 있음을 느낀다. 그래서 내가 떠나가도 아이들에게 남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의 밥상머리는 계속해서 전수되고 복제되어 가는 것이 아닐까?

절대긍정과 무한신뢰, 내가 살게 하는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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