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오심을 이용한 완전범죄, 잘 짜여진 플롯의 힘
인간 본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싸울 때입니다. 상대에 대한 감정이 격해지면 자신도 모르는 자신이 드러나기도 하지요. 보편적 인식을 넘어서는 행태가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측 가능한 감정은 덜 위험합니다. 문제는 격한 감정을 누르고 냉철하게 계획을 세울 때입니다. 무섭지요. 이런 계획은…. 최근 드라마 ‘더 글로리’가 생각납니다.
싸움에 관한 이야기 하나 더 해보겠습니다.
손자병법입니다. 손자병법에서 말하는 최고의 싸움 기술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서로 싸우게 하여 자멸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감정을 건드리면 되지요.
이언 매큐언의 소설 ‘암스테르담’은 싸움에 관한 위 두 가지 내용이 잘 드러납니다. 등장인물의 감정을 적나라하게 표현합니다. 목적을 위해 자신의 감정을 속이기도 하고, 합리화하기도 하며, 한없는 속물성을 보이기도 합니다. ‘인간이 다 그렇지 뭐’ 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또 하나는 잘 짜여진 풀롯입니다. 마지막에 반전이 있는 구조입니다. 독자에게 읽는 재미를 주는 구성이지요. 소설의 결말 부분에 이르면, 등장인물들이 격한 감정에 휩싸여 죽거나 자멸하는데 이 모든 것이 한 사람의 계획이었다는 것입니다. 반전영화의 대명사 ‘유주얼 서스펙트’가 떠오릅니다. 그래서 이 소설은 드라마 ‘더 글로리’와 영화 ‘유주얼 서스펙트’를 잘 버무린 듯합니다.
소설은 몰리의 장례식장에 2명의 남성이 등장하면서 시작합니다. 이들은 죽은 몰리의 연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맞이하는 사람은 몰리의 남편입니다. 현실에서 이런 경우가 있을까 싶습니다만, 장례식장에 등장하는 또 다른 남자는 외무장관이며 몰리의 또 다른 전 연인입니다. 이렇게 총 4명의 남성들이 한 여성의 장례식장에서 만나게 됩니다. 음악가인 클라이브, 신문사 편집국장 버넌, 외무장관 가머니, 그리고 까탈이 심하고 병적으로 소유욕이 강하며 몰리의 남편이자 신문사 사주인 조지. 이들은 서로 웃고 이야기하지만 상대에 대한 감정이 좋을 리 없습니다. 대화와 표현에서 보이지 않는 힘겨루기와 싸움은 치열합니다. 결국 싸움은 사람의 감정을 잘 활용하여, 싸우지 않고 이기는 방법을 계획한 조지의 승리로 끝납니다.
조지가 3명의 남자를 처리한 방식은 이렇습니다. 먼저, 자신의 신문사 편집국장 버넌을 통해 외무장관 가머니의 사생활 사진(몰리가 찍은 사진) 공개를 사주합니다. 사진을 본 편집국장 버넌은 친구인 클라이브와 공개여부를 상의하다 사진이 몰리와 관계된 것임을 놓고 싸우고 결국 같이 죽게 되지요. 이 모든 걸 계획한 조지는 종국에 이렇게 말합니다.
가머니는 넘어졌고 거짓말쟁이 부인이 기자회견에서 그의 외도를 부인함으로써 마누라 손아귀에서 옴짝달싹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이제 버넌은 갔다. 클라이브도, 몰리의 옛 애인들과의 전쟁을 통틀어 보면 성과가 그리 나쁘지 않다. (204쪽)
그런데 조지가 몰리를 사랑해서 이런 일을 계획한 게 아닙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을 보면 말이지요.
조지는 핼리데이의 집 현관 계단에서 멈춰 섰다. 맨디를 안 지도 수년이 흘렀다. 멋진 여자였다. 열정적이라고나 할까. 저녁 먹으러 가자고 해도 이르지 않으리라. (204쪽)
맨디는 버넌의 아내입니다. 인간의 바닥이 어디까지인지 모르겠습니다. 이야기가 소설이라서 다행입니다. 그런데 가끔 현실에서도 이런 경우가 있는 것 같아 두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