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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잃어버린 낙원, 세스 노터봄

by 나즌아빠

내가 세상의 일부이면서 동시에 그 일부가 아니라서 이 세상과 영영 화해를 이룰 수는 없으리라는 것을 안다. 이것은 스스로 해결해 가야 할 모순, 자가당착이다.(41쪽)


사람들이 생각하는 낙원은 어떤 것일까요? 타인과의 교감에서 오는 안정감, 인간성을 지켜주는 사회제도,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수 있는 환경, 그리고 그 무엇 무엇... 혹 ‘한 여자가 뱀이 한 말을 딱 한 번 들은 건데 영원히 쫓겨나고 만’ 곳은 어떤가요? 세스 노터봄은 소설 ‘잃어버린 낙원’에서 낙원을 이렇게 표현한 것 같습니다.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했더라도 꿈꾸기를 통해 그들은 연결되’고(48쪽) ‘개인이, 혹은 집단이 언제나 되돌아갔던 자리’, ‘우리를 온당한 자리로 이끌어주는 세계’ (49쪽)


토템적인 원초적 세계를 이상향으로 그리고 있는 듯합니다. 그런데 이런 낙원이 있을까요? 그리고 사람들은 이런 곳을 찾을 수 있을까요?

낙원을 갈망한다는 것은 역으로 생각하면 그만큼 현실의 삶이 감당키 어렵다는 것이지요. ‘잃어버린 낙원’의 주인공 알마는 사내들로부터 ‘먹장구름 같은 일’을 당합니다. 이런 상처를 남기고 말입니다.


‘무시무시한 공포 속으로, 끝없는 심연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 세상 끝으로 떨어질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분노, 쾌락, 우울, 이 모든 것이 뒤섞여 하나로 엉켜 들고, 그 기분이 사라지면 남는 것은 끔찍한 칼날, 하얗게 전율처럼 이는 명징한 느낌, 그 속에서 살아 있고 싶지 않다는 자각이 오고, 모든 것이 증오로,’(41쪽)


이런 상처는 어떻게 치유될 수 있을까요? 가해자에 대한 처벌과는 별개로 주인공 알마에 집중해 봅니다. 일마는 여행을 떠납니다. 낙원을 찾아가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신문의 연극난에 광고를 보고 낙원에 산다고 알려진 천사 역을 맡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말을 붙여도 대답하지 못하고 부동자세로 죽은 듯이 있어야 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천사입니다. 저는 이 부분이 은유라고 생각합니다. 상처받은 영혼이 치유되는 과정 혹은 여정은 매우 힘듭니다. 현실이 그런 것 같습니다. 천사를 찾아 헤매었지만 ‘천사는 사람과 함께할 수 없다’니 말입니다. 그래서 작가는 제목을 잃어버린 낙원이라고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 우리의 알마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소설을 곱씹어 보면서 단서를 찾아봅니다. 마치 작가가 숨겨놓은 보물을 찾듯이 말입니다. 이런 문구가 눈에 띕니다.


‘그러니까 나는 세상을 나의 사막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내게는 평생을 계속해도 좋을 만큼 충분한 생각거리가 있다. 어디를 가든지 꿀단지개미와 위체티 애벌레가 있다 그게 없어도 풀뿌리나 산딸기 열매는 있다. 그리고 이제 나는 그런 것을 어디서 찾아야 하는지도 안다. 나는 살아남을 수 있다.’ (129쪽)


‘살아남을 수 있다.’라는 말에 안도와 위로를 받습니다. 한바탕 폭풍우가 몰아치고 난 다음 잔잔해지는 사막 같은 고요 속에서 회복과 치유의 길을 찾아가는 알마를 통해 자신만의 낙원을 마음에 담아봅니다.

소설은 수많은 은유와 시공간을 넘나드는 서사로 상상력을 필요로 합니다. 간혹 표현과 표현 사이의 간극이 멀어 해석에 시간을 들여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퍼즐 맞추듯 읽는 재미가 어쩌면 이 소설의 가장 큰 미덕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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