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하늘의 꼭대기에서 불어오는 찬 바람에 눈발이 휘날린다. 나는 구름에서 서서히 멀어져 갔다. 구름은 손짓으로 인사를 전했고 난 겨울의 노랫소리에 살랑이며 서서히 사람의 온기에 가까워진다. 달밤에 은빛이 은연히 퍼져갔다. 매일 보던 모습으로 검게 물든 하늘을 거닐며 나는 기대감을 품는다.
먼 곳에 일렁이는 빛들 사이에는 가지각색이라 읊을 수많은 사람들이 제 할 일로 하루에 마침표를 찍어가고 있다.
"엄마, 밖에 눈 와!"
높은 톤의 앳된 목소리로 말하는 어린 소녀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긴 시간이 지나 빈 나뭇가지 위에 자리 잡았다. 앙상하게 말라 있던 나뭇가지를 백색의 꽃이 메웠다. 따스한 온기가 감싸는 길거리가 한눈에 들어오는 나뭇가지 위에서 올려다보는 밤하늘은 더 짙고 아름다웠다. 함께 내려온 새하얀 눈송이들이 하늘에서 떨어졌다. 사람들의 발에 밟혀 지저분해져 있던 보도블록들은 곧이어 하얗고 하얀 겨울의 입김에 뒤덮였다. 길거리에 사람 한 명 지나다니지 않는 깊은 새벽, 가게 간판은 여전히 빛을 내고 있고 다가오는 크리스마스를 알리는 장식과 트리에서도 밝은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다.
-우리는 이제 뭘 하면 돼?
-우리는 겨울이 유독 추운 사람들에게 추억을 상기시켜 주면 되는 거야. 그러려고 내려온 거니까.
눈송이는 “겨울에 피는 꽃”이라 말한다. 겨울날 피어나는 순백의 꽃. 새싹이 꽃이 되어 피어나기까지 걸리는 시간만큼 우리도 긴 시간을 구름과 함께 기다리고 또 기다려왔다. 마침내 우리는 겨울에 짙은 어둠에 지쳐버릴 때쯤에 피어난다. 행복이 겨울의 눈에 완전히 묻힌 채로 소중한 열매는 매정하게 떨어져 버리고 나뭇가지마저 메말라 고독을 느끼는 세상, 삶에 꼭 한 번씩은 찾아오는 이 시기를 견디기에 사람은 너무나 가녀린 존재라서 우리는 그들에게 따스한 온기를 다시 심어주어야 한다. 혹여나 잠깐의 겨울이 너무 차가워서 그들의 희망과 행복까지 얼려버리면 안 되니까. 그들이 삶을 놓아버리면 안 되니까, 봄이 올 때까지 버틸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앞서 구름에게 들은 말로는 사람의 온기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즐거웠던 기억이 품은 과거의 온기, 사람으로서 전하는 사랑의 온기, 미래에 대한 기대가 품은 희망의 온기. 우리는 이 온기가 모두 찬물 엎지른 듯 흐려져 겨울을 버틸 수 없는 사람을 돕는 것이다. 과거의 온기를 상기시켜 주면서 말이다. 한낱 눈송이일 뿐이기에 사랑을 전할 수도, 그들의 삶에 개입할 수도 없기에 미래를 바꿀 수도 없지만 과거를 되새겨주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들이 수차례 겪었음에도 막상 필요할 때 감흥하지 못하고 깊은 곳 묻혀있는 기억을 끄집어내 주는 것뿐이다.
말만 거창하지 해봐야 우린 눈송이일 뿐이니 말이다.
가로등이 비추어주는 거리에서 보낸 새벽은 금세 지나갔다. 옅은 빛이 비추며 이른 아침을 알리는 시간이 되어서야 사람들이 길거리에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 보드라운 목도리를 두르고 두꺼운 겉옷을 껴입은 다름없는 차림새를 한 채로 길을 걷는 이들이 거리를 채워간다. 카페와 선물 가게 옆에 낡은 듯 보이는 식당이 자리 잡고 있다. 뒤이어 온 머리가 희끗한 여성은 선물 가게 오른쪽에 보이는 식당 문을 열었다. 시간이 지나고선 식당 옆에 위치한 선물 가게와 카페에도 불이 켜졌다. 불이 켜진 선물 가게에서는 특유의 포근함이 묻어났고 약간의 음악 소리가 흘러나왔다.
가까이에 있는 버스정류장에는 하나둘씩 사람이 모여들었다. 이어 정류장에 도착한 첫차를 타고 그들의 목적지로 향한 사람들을 뒤로하고 잠잠하던 거리는 순식간에 활기를 되찾았다.
“새벽에 눈 왔나 봐.”
일부러 새하얀 숫눈을 밟으며 포근한 소리를 낸다. 바쁘게 어디론가 향하던 사람들과 다르게 나란히 걷던 소녀들은 우리의 존재를 언급해 주었다. 곧이어 눈을 맨손으로 뭉쳐보다 손이 시린 듯 내려놓고 다시 길을 간다.
-좀 더 놀다 가지.
눈송이가 사람들의 온기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시간은 길어야 5일이라고 한다. 이렇게 새롭고 또 따뜻한 곳에서 겨우 5일. 처음 보는 땅 위와 사람들은 반가운 존재다. 고작 눈송이가 잠시나마 그들과 가까이 지낼 뿐이니 건물과 가로수마저 신기할 만큼 미지라고 여겨진다.
나는 그들의 따스함을 느끼고 싶은 게 아니다. 따스함을 전하는 게 실로 달갑지는 않다. 그저 이곳에 오래 머물고 싶다. 처음 보는 신비로운 땅 위의 세상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행복한 추억을 만들든 호기심을 채우든, 5일은 너무 짧은 시간이니까.
허전하던 새벽이 있었냐는 듯 길거리는 생기와 사람들의 인기척으로 매워졌다. 인간이라는 존재와 어느 순간보다 가까이에서 함께할 수 있는 시간, 얼마나 길지 모르는 시간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