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눈꽃 02화

라일락

우정ㆍ젊은 날의 추억

by 서율

첫차가 지나가고 나서 비어 있던 거리를 가장 먼저 밟은 사람은 단정한 복장의 남자였다. 넥타이를 매고 회색 정장을 입은 차림을 한 그는 이제 막 떠오른 해를 뒤로하고 거리를 지나 바쁘게 뛰어갔다. 그는 밤사이 잔뜩 쌓인 눈을 피해 갈 생각도 하지 않았다.

“괜히 눈이 쌓여서.”

어느새 가죽 신발에 물기가 묻어있었고 그는 잠시 불평을 늘어놓았다. 바닥에 신발을 톡톡 치며 눈을 조금 털고서 다시 뛰어가는 그가 못마땅했다. 시야의 끝으로 사라져 가는 그의 주머니에서 종이봉투가 눈 위로 떨어졌다. 소리가 너무 작아서인지 그는 알아차리지 못하고 계속 달려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바닥에 떨어진 종이를 자세히 보니 위에 쓰인 글자는 ‘사직서’였다.

-저 남자는 오늘 사직서를 내러 가는 건가?

-바빠 보이던데. 또 가난해 보이고.

옆에 있던 작은 눈송이가 나에게 답해주었다. 그러고 보니 다시 떠올린 그의 모습에서 가죽 신발은 이미 많이 낡아 있었다. 들고 있던 서류가방은 태가 나게 색이 바래버렸고 말이다.

-어때, 우리가 도와야 할 것 같지 않아?

잠시 생각에 빠진 나에게 작은 눈송이는 질문을 건넸다.

-근데 우리가 본모습은 솔직히 너무 단면적인 거 아닌가? 솔직히 그렇게 눈에 띄거나 힘들어 보이기까지 한 건 아니었는데.

내가 생각했던 ‘우리가 따스함을 전해주어야 할 사람’의 모습과는 조금 달랐다. 그냥 좀 바빠 보일 뿐이었으니까.

-글쎄, 네 생각이 그래?

작은 눈송이는 태연한 듯한 말투로 답했다.

누군가는 겨울이 모두에게 공평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모두에게 겨울이 찾아오지만 고난과 역경을 딛고 있는 사람에게 당연히 추위가 배로 느껴지는 거 아닌가, 이미 구멍 난 마음을 차갑게 얼려버리는 꼴이니까 말이다. 그들에게 겨울은 우리가 느끼는 추위를 넘어서 잔인할지도 모른다.

바닥에 떨어져 사람들의 발에 밟히고 또 지저분해져 가는 사직서를 바라봤다. 그가 잔인한 겨울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 중 한 명일까.

-그런데 우리는 겨우 눈송이일 뿐인데 뭘 해줄 수 있긴 할까?

실은 하늘 위에서 이미 수십 번은 했던 생각이다. 내가 그들을 돕고 싶어도 어떻게 도울 수 있긴 한가. 사람들에게 눈송이는 너무나 차가운데 우리가 마음을 녹여줄 수 있나. 상기시켜 준 과거도 어찌 됐든 간에 현재와 미래는 바꿔주지 못하는 거 아닌가. 솔직히 우리가 이미 얼어버린 마음에 무언가를 해줄 수 있다는 게 말이 되는 건가. 구름은 이 질문에 늘 같은 답을 내놓을 뿐이었다.

“그들에게 너희의 냉기가 정말 따스할 거야, 겨울의 한기와는 다른 아름답고 예쁘고 포근한 냉기니까. 그냥 사람과 가까이서 그들과 함께하면 알 수 있어. 너에게는 그들의 온기가 따뜻한 것처럼.”

얕은 웃음과 함께 얻었던 답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모호한 답이었다. 소복이 쌓인 눈의 찬 기운이 그들에게 포근할 수 있나. 그 남자가 내 덕분에, 우리 덕분에 웃음 지을까. 난 그저 나를 믿을 뿐이다. 내가 그들의 온기에 녹을지, 그들에게 내 냉기가 포근할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저 사직서 저렇게 둬도 되는 거야?

낮이 지나도 여전히 한 자리에서 구겨진 종이봉투를 보고선 내가 말했다.

-우린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는걸.

여전히 능청스럽고 태연한 작은 눈송이의 한마디는 의문점만 키워갈 뿐이었다.

그럼 우리는 도대체 뭘 해야 한단 말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다. 우리는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왔는데 할 수 있는 일은 없다는 말이다.

-그럼 우린 뭘 하는데?

황당해 묻는 말에 작은 눈송이는 평온한 답을 내놓았다.

-그냥 사람들의 온기를 느껴. 붐비는 거리를 지그시 바라보며 그들의 온기를 최대한 많이 느끼는 거야.

뭐, 그 말대로 하늘보다 따뜻한 곳이긴 하다. 온기가 가장 잘 느껴지는 곳, 그리고 그들이 가장 잘 보이는 곳은 여기밖에 없을 테니까. 그저 온기를 느끼라면 말이다.


***


출근 시간에 촉박하게 도착한 남자에게 상사는 노골적으로 눈치를 주었다. 남자도 그것을 느꼈는지 서둘러 자리로 가서 업무를 시작했다.

남자는 어렸을 때 기초생활수급자였다. 이사를 다니는 일도 잦았고 하늘이 제대로 보이는 집에 살아본 기억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잠시라도 정착할 때면 괜한 동정과 무시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어린 그가 엄마와 집 밖에 나서면 몇몇 동네 주민들은 “저 주택가 단지만 없어져도 집값이 훨씬 더 오를 텐데. 솔직히 코 앞에 반지하가 보이는 아파트에 누가 살고 싶어 하겠냐고.”라며 비난을 일삼았다.

그런 말들을 들을 때마다 남자는 그저 악착같이 버틸 거라 다짐했다. 그는 보란 듯이 이름 있는 대학에 합격했고 졸업 직후 기업 공채로 입사했다. 그는 2~3년 단위로 다양한 부서를 돌며 여러 가지 일을 경험했다. 벌써 10년째 회사를 다니고 있었다.

평범하게 직장인으로 일하며 부서와 일에 따라 힘들기도 하고 재밌기도 하고, 상시적으로 일을 챙겨야 하기도 하고 특정 기간에 일이 몰리기도 한다. 남자는 관리하는 일보다 성과가 나오는 일을 더 좋아했다. 약간의 스트레스와 마감을 즐기고 남자의 경력이나 역량에 비해 버거웠던 일을 해결하며 성장했음을 느끼는 일에 만족감을 얻었다.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왔다고 내심 자부했던 그에게 일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남자에게 일보다 힘든 건 사람이었다. 한없이 좋은 상사는 한때 사적으로까지 가까운 사이가 될 수 있었지만 상사의 권위적인 지위와 무능력함은 팀원 모두에게 해만 끼칠 뿐이었다. 남자와 3년째 같은 부서에서 일하고 있는 상사도 마찬가지였다.
부서 내에서도 유능했던 남자는 잘난 사회생활을 위해 당연하다 느낄 만큼 상사의 일을 대신해야만 했다. 팀원 관리며 보고서 중간 점검, 공정 관리, 대외 업무에 심지어 대표 이사가 있으면 연기까지 해야 했다. 남자는 “이 부분을 강조하시고, 밑줄 그어진 부분은 대표 이사님 관심 사항입니다.”라며 직접 했던 일의 보고는 항상 상사에게 양보했다. 칭찬받을 일이 있더라도 “우리 팀이 다 같이 한 거죠.”라며 성과를 공유하는 어조에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내뱉어야만 했다.

그럼에도 남자는 상사로 인해 직장 내 따돌림을 받게 되었다. 상사는 남자를 제외한 TF를 만들고 남자 대신 그저 그런 사람의 결과물을 과장해 칭찬하는 등 남자의 능력을 부정하는 듯한 비난을 일삼기도 했다. 또한 회식 자리에서 “담배나 한 대 핍시다.”라며 사람들을 몰고 나갔다. 처음에 민망해하던 사람들도 금세 적응해 자기들끼리 웃으며 돌아왔다. 남자만 모르는 회식도 여러 차례였다. 소식을 전해 들은 후 “저도 그날 야근했는데 부르시지 그러셨어요.”라 용기 내서 말하면 “우연히 만나서요.”,“금방 헤어져서요.”라며 얼버부리기만 했다.


부서 이동 초반에 그는 유일한 친구가 동기로 같은 부서에서 일하게 된 일에 마냥 기뻐했다. 늘 해왔던 것처럼 다 이겨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친구 역시 그에게 상사가 남자에 대해서 하는 험담, 남자를 빼놓고 정한 일정 등을 모두 전해주었다. 상사의 따돌림에 절대 끼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상사라는 작자의 존재는 서로에게 서로가 버팀목이 될 만큼 가까워지도록 이끌어줄 뿐, 일상을 괴롭게 만들지 않았다.

문제가 시작된 건 겨우 몇 주 전이었다. 그날 출근하자마자 상사를 포함한 직원들이 모여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친구마저 함께였다. 이후 그에게 친구를 포함한 어떤 직장 동료도 선뜻 다가오려 하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 사귄 친구는 털털한 성격에 은근히 배려심 있는 심성에 인기가 많았음에도 늘 남자에게 다가와 주는 착한 심성의 친구였다. 이전까지 버팀목이 되어주었던 우정이란 키워드가 갑작스럽게 사라진다는 건 남자를 무너지게 만들어버렸다.


남자를 향한 상사의 괴롭힘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남자는 단순한 질투심인지 목적이나 이유가 있는 건지 조차도 모른 채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매일 아침마다 정장을 입고 헐어버린 가방을 메고 출근길을 걸으며 부서 이동까지 견디고 또 견디려 애썼다.


점심시간이 되자 사무실에는 남자밖에 남지 않았다. 모두 점심을 먹으러 갔을 시간이었다. 보통 그는 친구와 함께 점심시간을 보냈지만 요즘에는 점심시간마다 도통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보고서 고요한 사무실이 나름 마음에 들어 굳이 밥을 먹으러 나가지 않기로 결정했다. 남자는 자신의 자리에 앉아 다시 모니터로 시야를 옮겼다. 고요한 사무실에 키보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저희 오늘 회식 어디에서 하나요?”

점심을 먹고 돌아온 부서 동료 직원의 물음은 남자의 귀까지 들어갔다. 남자는 들은 적 없는 회식 이야기였지만 딱히 숨길 생각이 없는 듯했다. 자기들끼리 신나게 떠들어댔다.
그는 대화 소리마저 지겹다는 듯 화장실로 향했다. 끝없이 이겨내고 버티려 애쓰는데 주변에는 더 아래로 끌어내리려는 사람들뿐이다. 힘내길 바라며 응원해 주는 사람을 찾고 있었다.

화장실 밖으로 나가려 할 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장실 옆쪽에 있는 직원휴게실에서 들려오는 이야기 속에 남자의 이름이 불리는 것을 들었다. 어차피 좋은 이야기는 아닐 거라 짐작한 남자는 귀 기울여 듣지 않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사무실에 들어가니 친구의 자리는 비어있었다.

이후 상사는 자신의 일을 다 떠넘겨버리고 정시에 퇴근했다. 동시에 자기들끼리만 회식을 잡았는지 남자의 상사는 남자의 친구와 직원들을 모두 이끌고 떠났다. 남자의 친구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로 사무실을 떠났다. 사무실에 적막이 허전할 정도로 남자밖에 남지 않았다.
남자는 퇴근 시간이 3시간이나 더 지나서야 사무실을 나설 수 있었다. 회사 건물 밖으로 나가자마자 실내와는 달리 찬 공기가 감돌았다. 아침이랑 크게 다를 바 없이 눈이 쌓여있었고 남자는 눈을 밟으며 힘없는 걸음으로 걸었다.

가득 쌓인 눈을 보는 남자는 생각한다, 눈에 파묻혀서 함께 녹아버리고 싶다고. 그러면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사라질 수 있을 것 같다. 왜 자신만 사람에게 미움받아야 하는지, 잘못이 무엇인지 누군가 알려줬으면 한다. 위선의 말 한마디를 듣더라도 괜찮을 것 같은데 말이다. 왜 그 한마디 들을 자격조차 되지 않는가, 모든 일들에 자격이 필요하다면 그런 삶은 너무 버겁다. 숨 막히는 곳에서 숨구멍이라도 있으면 살만할 텐데,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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