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ㆍ젊은 날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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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늦은 밤에서야 퇴근길에 들어섰다. 그가 거리에 눈송이를 밟을 때, 그의 내면을 들여다봤다. 처음으로 마주했던 누군가의 내면이라는 공간은 겉모습과는 또 다른 분위기였다. 생각했던 것보다 조금 더 어두운 분위기였달까.
거의 황폐화라 말해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메마른 땅 위를, 끝없는 길을 걸어가고 있는 남자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풀숲은 시들어버린 풀과 꽃뿐이고 밤이 지속되는 그 길을 남자는 뒤돌아가지 못하고 하는 수 없이 나아가는 듯 보였다. 잠시도 멈추지 못하고 말이다.
하루를 힘들게 버틴 그의 내면을 훑었다. 시들어버린 꽃은 남자의 마음속 응어리를 고스란히 전해주었다. 회사에서 따돌림당한 일, 혼자 사무실에 남겨진 일, 그리고 그의 친구가 그에게 등을 돌려 상사를 포함한 다른 동료들과 사무실을 떠나는 모습이 담겨있는 꽃은 흩날릴 꽃잎마저 남아있지 않았다.
'눈에 파묻혀서 함께 녹아버리고 싶다.'
남자의 메마른 내면을 지배하고 있는 한 생각이었다. 오늘 아침 그가 그렇게 힘들어 보이지 않다고 생각했던 나에게 화살이 되어 꽂혀오는 것 같았다.
그는 도움을, 따스함을 필요로 하는 정말로 아픈 겨울을 보내고 있는 사람이었다.
-이제 도와야 할 것 같지 않아?
언제부터인지 함께 그의 내면을 살펴보던 작은 눈송이가 말을 걸었다.
그래, 메마른 생각마저 덮어줄 봄처럼 따뜻한 추억을 찾아야 한다. 그 위에 다시 새겨주는 것이다. 물론, 그저 심연에 갇힌 기억을 끄집어내 줄 뿐이겠지만 말이다.
가뭄이 일은 듯 말라비틀어진 그의 내면에 그나마 고운 빛깔이 남아있는 꽃 한 송이가 눈에 띄었다. 보랏빛 드리운 꽃잎은 이전에 여겼던 친구의 존재였음이 분명했다. 그의 내면에 유일하게 시들지 않은 꽃은 ‘그의 친구와 추억’이었다. 그 안에 비추어지는 모습은 둘이 20살이 되던 해에 함께 술을 마셨고, 같은 부서에서 일하게 되었다 기뻐하고, 친구가 남자만 제외된 회식에 가지 않고 둘이서 저녁을 먹었다. 고등학생 때부터 함께 입시를 준비했고, 함께 입사를 준비했으며 늘 서로를 공유해 왔다. 여전히, 유일하게 져버리지 않은 꽃이다.
-결국 남자의 강점이랑 약점도 모두 유일한 친구였던 거네.
-실은 당연한 거지. 버팀목이 일그러지면 더 이상 지탱해 줄 수 있는 존재는 없어지니까.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남아있는 꽃 한 송이가 더 활짝 피워낼 수 있도록 봄을 전해주는 것이다. 아픈 겨울의 기억을 행복했던 한순간으로 덮어주면서.
시야를 가리고 내가 남자가 되어 생각한다. ‘나의 유일하고 늘 내 편인, 그리고 누구보다 소중한 친구’라고. 허망한 배신감일지도 모르는 생각에 갇혀 힘들어하는 남자에게 소중한 추억을 진하게 되새겨주었다. 눈꽃의 향기로, 봄날의 꽃들이 풍기는 향기와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저 눈꽃의 향기는 현재의 행복을 전해주기보다 과거의 추억을 되새겨주는 것일 뿐이다.
이후 시야에 들어온 모습은 남자의 발걸음만 남은 익숙한 거리의 모습을 뿐이다.
-눈꽃의 향기에 갑자기 떠오른 여느 날의 추억이 그에 내면의 얼음 조각들을 모두 녹여주길 바란다.
***
자정을 향해가는 시계의 초침이 작은 단칸방을 가득 메웠다. 사람 한 명 생활하기도 좁은 원룸이었다. 남자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이부자리 옆에 위치한 창문을 열어 환기했다. 허름한 단칸방에서는 꾸준히 환기해도 특유의 악취가 코를 찔렀다. 창문을 열자마자 찬 공기가 집에 퍼졌다. 곧이어 눈꽃의 포근한 향기도 섞여 들어왔다.
살아간다는 것에, 인간관계를 강제적으로 맺어야 하는 생활을 하는 것에, 그 생활에 자연스럽게 살아가지 못하는 것에 자신을 탓하던 남자에게 포근한 향기는 지나온 추억을 다시 한번 새겨주었다. 그는 불현듯 친구와의 추억이 또렷해지며 그의 눈에 추억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자연스러운 필름 속에서 집 안에 자리 잡고 있던 기억을 강조하는 듯 친구와 찍었던 사진, 친구와 입사 시기 함께 샀던 오래된 서류 가방 그리고 그가 선물해 주었던 식탁 위에 머그컵까지 평소보다 눈에 띄었다. 그 옆에 친구가 부서 이동 때 선물해 주었던 라일락도 눈에 들어왔다. 그 꽃말이 ‘우정’이라 하며 건네주었던 친구의 모습이 생생하다.
곧이어 너무나도 따뜻했던 추억과 함께 남자가 느꼈던 배신감과 실망이 곧이어 진한 그리움과 둘의 사이에 대한 위화감으로 번져갔다. 여전히 남자의 친구를 무의식 중에 품고 있었다는 건 소중했기 때문이었으니까. 남자는 친구와의 추억으로 은연중 자신을 안아준다. 그의 내면에도 어느새 피어있던 꽃과 함께 푸른 새싹이 조금씩 돋아난다.
환기를 끝마친 그는 플라스틱 창틀을 잡고 밀어 창문을 닫았다. 여전히 찬 공기는 집 안에 남아있었다. 휴대폰을 집어 든 그는 고민 끝에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름 세 글자를 띄운 화면 아래로는 통화 기능 버튼과 통화 종료 버튼이 있었다. 기본 연결음이 3~4번 정도 울리는 동안 그의 손은 통화 종료 버튼 위에서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생각보다 빠르게 통화가 연결되었고, 남자는 휴대폰 스피커로 들려오는 친구의 목소리에 잠시 굳어지다 이어 물음에 답했다.
“그냥, 뭐 해?”
가까운 사이였을 때와 다름없이 그의 친구에게 물음을 건넸다. 이어서 돌아온 친구의 답도 이전과 일절 다름없었다. 순간적으로 ‘변하지 않았었구나’라는 안도감이 그의 내면에 봄의 불길을 지펴왔다.
그날 밤 그들은 자정이 되었음에도 통화를 끊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대화를 나누며 남자의 굳어진 표정이 풀어져 갔다. 둘은 정말 가까운 친구 사이와 다를 바 없이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근데 너 안 바빠? 상사가 너 대표 이사님이 권유한 프로젝트 맡게 돼서 바쁠 거라던데. 직원들한테 정말 중요한 거라고 통보하면서.”
처음 듣는 프로젝트 이야기에 남자는 모든 일들이 꾸며진 상사의 거짓이라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전혀, 난 네가 상사한테 붙은 줄 알았어.”
“애들 장난도 아니고 상사 왜 이렇게 유치하냐.”
완전히 속았던 남자의 친구가 이야기를 들은 후에 표현한 일말의 분개에 안도감이 녹아있었다는 걸 남자도 느낄 수 있었다.
“이참에 뭐라고 상사한테 말이라도 할까? 오늘 휴게실에서 동기들이랑 잠깐 대화하는데 다들 상사가 너 따돌리는 거 알더라.”
“올해만 지나면 부서 이동할 것 같던데 조금만 참지, 뭐.”
오늘까지도 자신을 생각하고 있었던 친구에게 남자는 괜찮다는 듯 말했다. 분명 힘들었는데 지금은 다시 버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변함없는 지금의 한 장면이 ‘어쩌면 남자가 느꼈던 배신감도 상사만큼 유치하고 보잘것없는 질투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전했다. 남자는 장난스럽게 상사 이야기를 마무리 지은 후 그들은 한동안 어색함에 못 이겨 건네지 못했던 이야기를 나누었다. 새벽이 깊어지자 그들은 “같이 밥 한번 먹자”라는 흔한 끝인사로 통화를 종료했다. 떨리는 손 대신 입가에 웃음으로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잠자리에 누운 남자는 ‘아침이 오지 않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런데 오늘은 조금 다르다. 늘 인간관계로 슬퍼하면서 다시 인간관계에서 웃음 짓고 희망을 얻는다. 그게 인간인가 보다. 정말 한없이 멍청한데 그만큼 따스한 한마디만을 갈망하는 존재인 것이다.
때론 오로지 그 한마디만이 어느 날의 씨앗이 되어 꽃을 피운다. 그렇게 피운 꽃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른다.